이층갤러리
2025년 10월 14일 ~ 2025년 11월 7일
시간의 깊이 The Depth of Time
에그템페라(egg-tempera)의 템페라는 라틴어의 ’temperare‘에서 나온 말로 혼합, 조합이란 뜻을 가진다. 중세 화가들은 색채가 있는 광물이나 식물들을 맷돌에 갈아 색채가루인 안료를 만들고 이것을 용매와 섞어서 물감으로 사용하곤 했는데, 템페라는 이러한 달걀노른자나 벌꿀, 무화과 즙 등 점성이 있는 용매제를 색채가루와 섞어 만든 물감이나 그것으로 그린 그림을 통칭한다.
템페라 물감은 수성 물감과 아크릴 물감의 중간 정도 톤이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은 유화처럼 단단하지 않고, 수채화처럼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투명한 느낌이다. 유화처럼 두껍게 마띠에르를 내는 것은 어렵지만 딱딱한 느낌이 있고, 점성이 만들어내는 광택으로 수채화보다는 강력한 색감을 띤다. 덜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를 채색하는 방식인 프레스코(fresco)와 비교하여, 프레스코가 일단 회반죽이 건조한 후에는 수정이 어려운 반면, 템페라는 덧칠이 가능하고 유화보다 맑고 생생한 색을 전달한다. 하지만 템페라의 주된 미디엄이 달걀 노른자이다 보니 금방 상하거나 변할 수 있어 물감을 오래 보관하기는 어렵다. 원하는 색을 필요한 그때그때 안료를 개어 손수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보관성이 좋지 않아 수급 가능한 기성품의 색상 범위도 제한적인 적인 관계로 현대에 와서 템페라의 수요는 매우 줄어들었다.
이은경은 바로 그 템페라 물감을 사용한다. 그는 템페라가 안료의 원래 색상과 비슷한 색으로 건조되어 그림의 최종 색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작업하면서 안료의 색감을 최대한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그는 직접 광물과 흙을 채취해 안료로 만들기도 하면서 몸소 색을 얻는 과정을 탐구한다. 포항의 뇌성산지에 뇌록(1) 표본을 채집하고자 방문하기도 하고, 지질학자와 암석의 기원 연구를 함께 수행하기도 한다. 그는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낮은 위치에서 회화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에 대해 분석하고, 매체와 안료의 상태를 탐구한다.
이은경의 작업 과정은 먼저 템페라 색채 안료를 겹겹이 쌓아 화면의 질감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질료의 표면 위에 사포질을 가해 변형과 변색을 기대한다. 층층히 여러 층의 색을 얹은 후 긁어내어 그 표층을 바깥으로 보여줌으로써 아래의 과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마치 건물의 한쪽 벽을 걷어내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건물의 단면에서 건물을 구성해온 재료와 쌓임의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매체의 본성에 다가가기 위해 색층의 표면을 스스로 훼손하고 허문다. 균열을 일으켜 재료의 물리적 유약함을 드러내고, 허물어진 바로 그 부분에서 다시 물질이 쌓아온 시간을 재구축한다.
이은경의 작업들은 정해진 중력방향을 갖지 않는다. 흰색 화면에 접히듯 기울어져 자리하던 형상들은 [열린 체계 OPEN SYSTEM]에서 사각 프레임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형 캔버스의 새로운 경계를 만든다. 그는 작품이 놓이는 애매한 각도나 위치를 통해서 자신이 만든 형태에 새로운 불안감이나 운동성이 부여되는 것을 관찰한다. 특히 [반 HALF] 연작에서는 원래 한 대륙처럼 붙어있던 것이 떨어져서 다르게 진화하는 것을 상상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업을 마치 자연 속의 광물들을 관찰하듯 거리를 두며 자생적으로 성장하여 변화하는 것을 허락한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우리가 보는 아주 단단한 돌도 그 상태가 영원하지 않고 잠시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며, 결국 매우 사물다운 대상은 [장기간의 사건]일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로벨리의 관점에서 이은경의 작업은 매우 우연적인 동시에 존재론적인 장기적 사건이다. 단단한 지층 사이에 끼어있는 지질학적 물질로서의 색을 탐구하는 그의 작업은 일면으로는 고고학적 리서치이자, 회화를 자연의 질료로 되돌리는 메타-회화에 가깝다.
원초적 경외감으로 몸을 낮추고, 무겁고 느린 물질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유연하게 형성한 이은경의 이야기들은 화면을 넘어선 물질의 생명성과 영속의 시간성을 상상하게 한다. 그는 담백하면서도 서늘한 화면을 단서로, 자연 속 안료들이 지나온 시공간의 깊이를 확장시킨다.
(1) 뇌록(磊綠)_한문으로는 돌 석자 세개가 조합된 글자인 뇌와 초록의 녹 자를 쓴다. 바위 틈에 끼여있는 회색빛을 띤 녹색의 도료로 목재의 방부기능이 있어 한옥의 단청에 바탕칠로 쓰인다. 포항 뇌성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뇌록산지가 있다.
글: 정현아
작가: 이은경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운영시간
월요일 휴관
화요일 11:00 - 18:00
수요일 11:00 - 18:00
목요일 11:00 - 18:00
금요일 11:00 - 18:00
토요일 11:00 - 18:00
일요일 휴관
휴관: 일요일, 월요일
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