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언 작가는 섬유공예와 순수미술을 접목시켜 베틀로 직접 천을 짜고 염색이나 페인팅을 하는 방식의 직조회화 작업을 한다. 이번 개인전 ‘벽걸이들 Wall Hangings’에서는 직조회화의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지속하는 작품 20여점을 선보인다.
○▲■ 차승언의
비약, -《벽걸이들 Wall Hangings》 전에 부쳐
차승언의1) 직조회화는 참조를 기본으로 한다. 이성자, 애그네스 마틴, 리처드 터틀, 김환기 등 작가가 참조한 대상으로서의 선대 미술가와 작품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독자적 주제로서 탐구 또한 물론 가능하다.2) 문제는 이러한 차승언의 참조가 의제설정 하는 태도와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적으면 참조는 작가가 형식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변화가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추상미술의 구조와 미술사의 방식을 연구하는 작가의 참조 행위는 표면적으로 독학자의 면모를 띤다. 작가 스스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작업은 배우는 것을 ‘체화’하여 몸과 동일시하는 연주가의 그것과 닮았다. “시각의 지성을 탐구하는 것인가요?”라는 나의 질문에 ”겸허한 것, 물질을 상대하는 데 가끔 제가 기운이 없으면 진이 빠지고 작업이 맹해 보이는 듯하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는 독학을 통해 자기 스스로 작품을 연주하는데 이때 정신력이 물질을 컨트롤한다.
그는3) 작품을 만드는 시간 이상으로 미술사의 선례들을 탐색한다. 직조회화의 방법론을 차승언은 자체 설계했고 이어 자가 공정을 돌린다. 정신력이 컨트롤하는 물질에서 남는 것은 과거를 앞세우고 뒤로 물러서는 이상한 시간감각이다. 이것 그러니까 작가의 제작 공정 방법론은 개인이 역사와 타자를 상대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과정이 수동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능동에 수동이 지는 것만도 당연히 또 결코 아닌데 자기만이 수행하는 프로덕션의 방법론을 비-호환적으로 돌리는 독자적 방법론의 위상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독학자적 수동태의 참조가 능동태의 이항 참조(직조와 회화, 차승언과 다른 작가)를 통해 다차원적 결합체가 새로이 미술사(현장)에 등록되는 순간을 보게 되는 셈이다.
차승언이 행하는 참조는 내가 보기에 성찰적인 독학보다는 변형시키는 것에 더 의지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형의 만끽은 감히,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여 반대하고자 하는 자의 그것이다. 거꾸로 말하기의 용례를 따르면서 기존 용법의 해체의 단계에 들어선다. 그는 누구를 우러러보지도 내려다보지도 않으며 진공의 상태에 있는 수평적 거리를 무한히 지연시킨다. 관계를 맺으면서 과거의 한 작가의 작품, 작품을 일구었던 한 올 또는 한 땀, 혹은 한 붓질의 행위들은 차승언이 가진 오늘날의 행위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결과로서 차승언이 짠 작품의 표면은 짐짓 침묵 가운데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 한 이미지를 선취(동시에 성취)한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작고 큰 사각 프레임의 차승언 작업은 그 자체로 온전할 것을 선언하는 자기-충족적 형태를 띤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물리적 짜기와 그리기의 과정은 많은 비평가들이 언급했듯 반복된 숙련 노동이다. 이 노동에서 미술사, 작가, 작품 등 참조하는 타인(타자)의 등장은 변형과 해체의 독특한 방식을 촉진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벽걸이’라고 불리우는 작업군은 전시장을 보다 과감하게 작품에 결부시킨다. 전시가 열리는 공간 자체이자, 이번 전시의 참조와 연구의 대상은 과거의 특정 전시가 차승언의 새로운 독대의 대상으로 등장한 셈이다. 직조 사이로 벌어진 틈이 늘어진 채 더욱 더 보이고, 이 늘어진 틈 뒤로 전시 공간의 벽과 만들기에 들어갔던 ‘공간화된 시간’이 보인다. 모더니즘 미술(사)의 성찰에서 근거하여 충족이 된 물질의 상태에 다른 맥락이 개입할 여지가, 결과론적으로는 없어 보인다. 나는 ‘공간화된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기보다 이 이상한 조어(造語)를 차승언의 작업을 통해 감각하고자 한다. 그 시간은 형태를 스스로 짓고 거부하며 지금은 형태를 늘어뜨리고도 있지만, 하나하나 더듬어 나가며 쌓인 시간의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차승언의 작업은 ‘물리적인 시간에 의해 획득된 시각’의 응집체다. 차승언의 그간 작업은 선택하고 획득한 것으로서, 감각에 의한 반응이 아니라, 유희로서의 제작인 것도 아니다. 결과로서의 차승언의 물리적 지지체는 던져진 문제와 결심한 프로세스의 수행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보다 결연한 무엇이다.
다시 쓰기와 파괴
로잘린드4) 크라우스의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ert)’ 논의를 빌려오자면, 그것은 추상미술의 역사를 현 시점에서 바라보며 새로(다시) ‘쓰고자 하는 시스템’ 이다. 다시 기술(記述)하고자 하는 의지, 또 과거에 기대어 명상하고 의지하는 바의 이중 충동이 작가의 작업에 있다. 새롭게 다시 쓰는 비충족적 상태와과 다시 굳이 쓰지 않아도 대상을 바라보는 거리감의 획득에 이미 만족하여 있는 초연함의 상태가 작가의 작업에 동시에 존재한다. 차승언의 작업 궤적에서는 새로 쓰는 시간과 이미 존재했던 것을 ‘다시’ 쓰는 겹의 시간성이 작업의 내피를 모호하게, 외피를 투명하게 만든다. 표면상 수직수평의 그리드, 단일한 색채에 파고드는 다다르는 선, 시각적 흐트러짐 없는 형태 구성의 시각적 외피들에 의하여 일견 ‘해체’ 행위와 작가의 작업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차승언의 작업에 대해 새로운 것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직조회화, 작품 군(群)이 구축뿐 아니라 파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그의 작품 내부에 파괴적 면모가 있다는 부분 말이다. 차승언의 작업 표면(외피)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화면 안이 아니라 표면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림의 뒷면으로 돌아가서 캔버스 뒤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장난기가 허용된 관객이 된다. 차승언은 직물(실) 개체가 군으로 모여 해낼 수 있는 평평한 상태를 모듈-화한다. 한편 직물 기계가 수행하고 그 기계의 지시자(instructor)가 된 작가의 현존에 의해 구현되는 것은 변화해나가면서 형태를 잡아가는 이행(transition)의 형식이다.
파괴는 파상력의 일종이다. 그는 새롭게 짜면서 손으로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작품군(群)을 형성한다. 회화의 선행 조건으로 결부되는 ‘그리기’는 아직 마음껏 이뤄지지 않았고 직조행위의 결과물인 공산품으로서의 직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기 힘든, 늘어지는 직물의 형태를 캔버스로 하여금 ‘잡아간다’는 행위다. 이때 캔버스틀 자체보다 형성된 ‘정신적 프레임’이 보다 중요하다. 차승언의 작업에서 그는 캔버스의 표면이 되는 배경과 형상 자체를 가치의 차이를 두지 않고 동시에, 구축의 물리적 과정으로서 중요하게 다룬다. 한편 파괴적 성격이라는 단어는 발터 벤야민이 쓴 용어이다. 그는 세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글에서 “현존하는 것을 그(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는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파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잇는 데, 무엇인가가 이어지게 하는 데 용이한 수단으로서의 파편이다. 이와 같은 파편은 오히려 연속성을 획득하는 데 기여한다. 작가 차승언은 파편들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전시장에 수직 수평으로 일으켜 세워 전시장에 배치한다. 그가 세운 시공간은 외부로부터 단절된 감각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전시 가치가 앗아가 버린 제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 높은 천정과 청음이 잘 되는 벽으로 둘러 처진 공간에 들어온 감각을 전한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라보자. 차승언의 참조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아이디어, 즉 개념을 따르는 것과 행위의 결과인 물질 상태를 따르는 두 가지 방식이다. 차승언이 보이는 참조는 이 두 가지 개념과 물질의 방법론을 합치하는 동시에 자기화하는 것 자체다. 그는 참조의 대상을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최종 작품에 ‘용해’시킨다. 용해될 때 화학적인 반응으로서 작가의 시간은 여러 층위를 오간다. 첫째 작가가 수행하는 짜기의 물리적인 노동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은 앞서거나 뒤서거나 순서를 자기화할 수 없는, 직조의, 베틀(짜기)의 순서를 따라야 하는 강박적 시간이다. 둘째 해당 참조 대상의 작가가 작품을 제작했던 맥락과 다수의 시간성이 중첩되는 그것으로서의 미술사적 시간이 흐른다. 끝으로는 평행선을 그으며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참조 대상인 작품보다 더 미래의 시제에 있으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한국 미술사의 모더니즘을 전례 없던 방식으로 재고하는 차승언에게 이미 쓰인 미술사의 서술방식은 중간에 가위를 들고 끊어야 하는 맥락 절단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때 관객은 차승언의 작품 안에서 선(직물)이 군이 되어 평면성을 획득한 결과를 본다. 이 직조물은 회화이기도 하지만 전시 공간의 시점에서 보면 공간에서 살짝 몸을 떼고 덮은, 감히 말해 공간적 옷이기도 한 것이다. 차승언의 작업이 일견 건축적인 양태를 띠는 것은 공간을 부분적으로 조각보처럼 덮어내고 있어서다. 이 자의적인 조각보다는 전시 공간을 무대화한다고나 할까. 스테이지에 서 있는 직조화는 작가가 붙인 의제에서 ‘회’라는 음절 하나를 뺏을 뿐인데 무척이나 상이하다. 한편 작가가 행하는 참조의 복합성은 그가 이미 직조회화를 통해 직조와 회화의 제작과 맥락의 측면을 이미 참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가 더 있다. 그러므로 이때 참조는 이항(두 개의 항)이 두 번 행하는 것이 된다. 회화와 직조, 차승언과 선행 작가들. 예로 다른 작업을 참조할 때 그는 이미 직조의 기술과 추상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담론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참조에 참조를 덧댄, 사실상 대상 하나를 향한 적확한 참조가 아닌 것이 된다.
차승언의5) 이중 참조가 용해시키는 것은 그의 어형 변화로 구현된다. 작품 <Sudden Rules-Bay-2>는 헬렌 프랑켄탈러의 <The Bay>(1963)와 이성자의 <갑작스러운 규칙>(1961)이라는, 두 작업의 제작 태도에 깃든 서로 다른 태도(전자의 얼룩 빨아들이기, 후자의 나뭇조각을 이용해 안료를 찍듯이 묻혀나가는 방식)를 차승언이라는 매개자가 평행하게 중첩시킨 것이다. ‘승언’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애그네스 마틴’의 이름 사이에 넣은 것은 어떤가. 자신을 타자화 하는 수단으로 그는 애그네스 마틴의 작업만큼이나 자신에게 떨어져 이미 자신이 만들어놓은 인공물(artifacts)로서 작품을 바라본다. 거리를 두고 볼 때 직조회화는 차승언의 것인 동시에 애그네스 마틴이 손으로 그어놓은 선과 만들어진 면과 ‘이어지는 길’을 갖게 된다. 이어지는 길에서 과거는 현재로 비약한다. 성큼 걸어오고, 또 다가온다. 과거의 현재화는 차승언에게 과거의 작품뿐 아니라 전시 자체를 뒤돌아보게 한다. 매번 다른 오리지널리티를 만드는 일종의 스코어(score)로서 차승언에게 1969년 MoMA에서 열렸던 전시 《Wall Hangings》는 하나의 시각적 텍스트북이자 그 안에 있는 도안들의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조심스러운 도굴의 과정이다. 역사적 전시의 선례는 작가 차승언에게 작품뿐 아니라 작품이 전시장 안에 인스톨되는 방법을 고안하게 만든다. MoMA 웹사이트에 남아있는 흑백 사진들에서 우리는 그때 상태를 부분적으로 기억하는 단서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진만으로는 밟을 수 없는 실제 공간이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가 걸어 다니며 보고 있는 작가의 작품들이 ‘걸려있는’ 시공간은 차승언의 직조 행위들로 파생된 공간이다.
글 현시원(큐레이터, 시청각 공동 디렉터)
1)
2) 작가와의 인터뷰, 2019년 9월 27일.
3) “재료에 끌려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어 재료를 지배하는 것도 아닌, 수동과 능동 사이의 어느 화합의 지점 ”중간태“가 이제 재료와 나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작가노트, 2011년 5월. 노트의 제목은 ‘물질의 경계’다.
4) ‘이행’은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의 개념이다.
5) 2014년 11월 살롱드에이치에서 그가 열었던 개인전 제목은 <차승언 애그네스와 승환스>이었다.
출처: 021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