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l Hangings 벽걸이들

021갤러리

Oct. 11, 2019 ~ Nov. 30, 2019

차승언 나eam 작가는 나eam 섬유공예와 나eam 순수미술을 나eam 접목시켜 나eam 베틀로 나eam 직접 나eam 천을 나eam 짜고 나eam 염색이나 나eam 페인팅을 나eam 하는 나eam 방식의 나eam 직조회화 나eam 작업을 나eam 한다. 나eam 이번 나eam 개인전 ‘벽걸이들 Wall Hangings’에서는 나eam 직조회화의 나eam 새로운 나eam 시도와 나eam 실험을 나eam 지속하는 나eam 작품 20여점을 나eam 선보인다.


○▲■ 차승언의 나eam 비약, 
-《벽걸이들 Wall Hangings》 카사zㄴ 전에 카사zㄴ 부쳐

차승언의 카사zㄴ 직조회화는 카사zㄴ 참조를 카사zㄴ 기본으로 카사zㄴ 한다. 카사zㄴ 이성자, 거u라카 애그네스 거u라카 마틴, 다ayr 리처드 다ayr 터틀, ㅓㅑ마y 김환기 ㅓㅑ마y ㅓㅑ마y 작가가 ㅓㅑ마y 참조한 ㅓㅑ마y 대상으로서의 ㅓㅑ마y 선대 ㅓㅑ마y 미술가와 ㅓㅑ마y 작품 ㅓㅑ마y 리스트를 ㅓㅑ마y 작성하는 ㅓㅑ마y 일은 ㅓㅑ마y 얼마든지 ㅓㅑ마y 가능하며 ㅓㅑ마y 독자적 ㅓㅑ마y 주제로서 ㅓㅑ마y 탐구 ㅓㅑ마y 또한 ㅓㅑ마y 물론 ㅓㅑ마y 가능하다.1) ㅓㅑ마y 문제는 ㅓㅑ마y 이러한 ㅓㅑ마y 차승언의 ㅓㅑ마y 참조가 ㅓㅑ마y 의제설정 ㅓㅑ마y 하는 ㅓㅑ마y 태도와 ㅓㅑ마y 방향이 ㅓㅑ마y 무엇인가 ㅓㅑ마y 하는 ㅓㅑ마y 점이다. ㅓㅑ마y 결론부터 ㅓㅑ마y 적으면 ㅓㅑ마y 참조는 ㅓㅑ마y 작가가 ㅓㅑ마y 형식의 ‘변화’에 ㅓㅑ마y 관심이 ㅓㅑ마y 있다는 ㅓㅑ마y 것을 ㅓㅑ마y 의미한다. ㅓㅑ마y 나는 ㅓㅑ마y 변화가 ㅓㅑ마y 핵심이라고 ㅓㅑ마y 말하고 ㅓㅑ마y 싶다. ㅓㅑ마y 추상미술의 ㅓㅑ마y 구조와 ㅓㅑ마y 미술사의 ㅓㅑ마y 방식을 ㅓㅑ마y 연구하는 ㅓㅑ마y 작가의 ㅓㅑ마y 참조 ㅓㅑ마y 행위는 ㅓㅑ마y 표면적으로 ㅓㅑ마y 독학자의 ㅓㅑ마y 면모를 ㅓㅑ마y 띤다. ㅓㅑ마y 작가 ㅓㅑ마y 스스로 ‘배우는 ㅓㅑ마y 것’이 ㅓㅑ마y 중요하다고 ㅓㅑ마y 말하는 ㅓㅑ마y 것처럼, 48쟏히 그의 48쟏히 작업은 48쟏히 배우는 48쟏히 것을 ‘체화’하여 48쟏히 몸과 48쟏히 동일시하는 48쟏히 연주가의 48쟏히 그것과 48쟏히 닮았다. “시각의 48쟏히 지성을 48쟏히 탐구하는 48쟏히 것인가요?”라는 48쟏히 나의 48쟏히 질문에 ”겸허한 48쟏히 것, ㅓ타2우 물질을 ㅓ타2우 상대하는 ㅓ타2우 ㅓ타2우 가끔 ㅓ타2우 제가 ㅓ타2우 기운이 ㅓ타2우 없으면 ㅓ타2우 진이 ㅓ타2우 빠지고 ㅓ타2우 작업이 ㅓ타2우 맹해 ㅓ타2우 보이는 ㅓ타2우 듯하다“고 ㅓ타2우 말하는 ㅓ타2우 것이 ㅓ타2우 중요하다.2) ㅓ타2우 작가는 ㅓ타2우 독학을 ㅓ타2우 통해 ㅓ타2우 자기 ㅓ타2우 스스로 ㅓ타2우 작품을 ㅓ타2우 연주하는데 ㅓ타2우 이때 ㅓ타2우 정신력이 ㅓ타2우 물질을 ㅓ타2우 컨트롤한다.

그는 ㅓ타2우 작품을 ㅓ타2우 만드는 ㅓ타2우 시간 ㅓ타2우 이상으로 ㅓ타2우 미술사의 ㅓ타2우 선례들을 ㅓ타2우 탐색한다. ㅓ타2우 직조회화의 ㅓ타2우 방법론을 ㅓ타2우 차승언은 ㅓ타2우 자체 ㅓ타2우 설계했고 ㅓ타2우 이어 ㅓ타2우 자가 ㅓ타2우 공정을 ㅓ타2우 돌린다. ㅓ타2우 정신력이 ㅓ타2우 컨트롤하는 ㅓ타2우 물질에서 ㅓ타2우 남는 ㅓ타2우 것은 ㅓ타2우 과거를 ㅓ타2우 앞세우고 ㅓ타2우 뒤로 ㅓ타2우 물러서는 ㅓ타2우 이상한 ㅓ타2우 시간감각이다. ㅓ타2우 이것 ㅓ타2우 그러니까 ㅓ타2우 작가의 ㅓ타2우 제작 ㅓ타2우 공정 ㅓ타2우 방법론은 ㅓ타2우 개인이 ㅓ타2우 역사와 ㅓ타2우 타자를 ㅓ타2우 상대하는 ㅓ타2우 하나의 ㅓ타2우 시스템이다. ㅓ타2우 ㅓ타2우 과정이 ㅓ타2우 수동적인 ㅓ타2우 것은 ㅓ타2우 결코 ㅓ타2우 아니다. ㅓ타2우 능동에 ㅓ타2우 수동이 ㅓ타2우 지는 ㅓ타2우 것만도3) ㅓ타2우 당연히 ㅓ타2우 ㅓ타2우 결코 ㅓ타2우 아닌데 ㅓ타2우 자기만이 ㅓ타2우 수행하는 ㅓ타2우 프로덕션의 ㅓ타2우 방법론을 ㅓ타2우 비-호환적으로 ㅓ타2우 돌리는 ㅓ타2우 독자적 ㅓ타2우 방법론의 ㅓ타2우 위상은 ㅓ타2우 기이하기까지 ㅓ타2우 하다. ㅓ타2우 독학자적 ㅓ타2우 수동태의 ㅓ타2우 참조가 ㅓ타2우 능동태의 ㅓ타2우 이항 ㅓ타2우 참조(직조와 ㅓ타2우 회화, q아v나 차승언과 q아v나 다른 q아v나 작가)를 q아v나 통해 q아v나 다차원적 q아v나 결합체가 q아v나 새로이 q아v나 미술사(현장)에 q아v나 등록되는 q아v나 순간을 q아v나 보게 q아v나 되는 q아v나 셈이다.

차승언이 q아v나 행하는 q아v나 참조는 q아v나 내가 q아v나 보기에 q아v나 성찰적인 q아v나 독학보다는 q아v나 변형시키는 q아v나 것에 q아v나 q아v나 의지를 q아v나 가진 q아v나 것이다. q아v나 그러므로 q아v나 이러한 q아v나 변형의 q아v나 만끽은 q아v나 감히, ㅓ2mㅓ 대상으로부터 ㅓ2mㅓ 벗어나거나 ㅓ2mㅓ 혹여 ㅓ2mㅓ 반대하고자 ㅓ2mㅓ 하는 ㅓ2mㅓ 자의 ㅓ2mㅓ 그것이다. ㅓ2mㅓ 거꾸로 ㅓ2mㅓ 말하기의 ㅓ2mㅓ 용례를 ㅓ2mㅓ 따르면서 ㅓ2mㅓ 기존 ㅓ2mㅓ 용법의 ㅓ2mㅓ 해체의 ㅓ2mㅓ 단계에 ㅓ2mㅓ 들어선다. ㅓ2mㅓ 그는 ㅓ2mㅓ 누구를 ㅓ2mㅓ 우러러보지도 ㅓ2mㅓ 내려다보지도 ㅓ2mㅓ 않으며 ㅓ2mㅓ 진공의 ㅓ2mㅓ 상태에 ㅓ2mㅓ 있는 ㅓ2mㅓ 수평적 ㅓ2mㅓ 거리를 ㅓ2mㅓ 무한히 ㅓ2mㅓ 지연시킨다. ㅓ2mㅓ 관계를 ㅓ2mㅓ 맺으면서 ㅓ2mㅓ 과거의 ㅓ2mㅓ ㅓ2mㅓ 작가의 ㅓ2mㅓ 작품, 히f6m 작품을 히f6m 일구었던 히f6m 히f6m 히f6m 또는 히f6m 히f6m 땀, qo라j 혹은 qo라j qo라j 붓질의 qo라j 행위들은 qo라j 차승언이 qo라j 가진 qo라j 오늘날의 qo라j 행위와 qo라j 관계를 qo라j 맺는다. qo라j 이러한 qo라j 결과로서 qo라j 차승언이 qo라j qo라j 작품의 qo라j 표면은 qo라j 짐짓 qo라j 침묵 qo라j 가운데 qo라j 존재한다. qo라j 그의 qo라j 작품은 qo라j 아무 qo라j 말도 qo라j 하지 qo라j 않는 qo라j qo라j qo라j 이미지를 qo라j 선취(동시에 qo라j 성취)한다. qo라j 전시장에 qo라j 들어섰을 qo라j qo라j 작고 qo라j qo라j 사각 qo라j 프레임의 qo라j 차승언 qo라j 작업은 qo라j qo라j 자체로 qo라j 온전할 qo라j 것을 qo라j 선언하는 qo라j 자기-충족적 qo라j 형태를 qo라j 띤다. qo라j 누구의 qo라j 힘도 qo라j 빌리지 qo라j 않은 qo라j 물리적 qo라j 짜기와 qo라j 그리기의 qo라j 과정은 qo라j 많은 qo라j 비평가들이 qo라j 언급했듯 qo라j 반복된 qo라j 숙련 qo라j 노동이다. qo라j qo라j 노동에서 qo라j 미술사, 카i나a 작가, 우z갸y 작품 우z갸y 우z갸y 참조하는 우z갸y 타인(타자)의 우z갸y 등장은 우z갸y 변형과 우z갸y 해체의 우z갸y 독특한 우z갸y 방식을 우z갸y 촉진시킨다.

특히 우z갸y 이번 우z갸y 전시에서 ‘벽걸이’라고 우z갸y 불리우는 우z갸y 작업군은 우z갸y 전시장을 우z갸y 보다 우z갸y 과감하게 우z갸y 작품에 우z갸y 결부시킨다. 우z갸y 전시가 우z갸y 열리는 우z갸y 공간 우z갸y 자체이자, 기b나차 이번 기b나차 전시의 기b나차 참조와 기b나차 연구의 기b나차 대상은 기b나차 과거의 기b나차 특정 기b나차 전시가 기b나차 차승언의 기b나차 새로운 기b나차 독대의 기b나차 대상으로 기b나차 등장한 기b나차 셈이다. 기b나차 직조 기b나차 사이로 기b나차 벌어진 기b나차 틈이 기b나차 늘어진 기b나차 기b나차 더욱 기b나차 기b나차 보이고, 가다차l 가다차l 늘어진 가다차l 가다차l 뒤로 가다차l 전시 가다차l 공간의 가다차l 벽과 가다차l 만들기에 가다차l 들어갔던 ‘공간화된 가다차l 시간’이 가다차l 보인다. 가다차l 모더니즘 가다차l 미술(사)의 가다차l 성찰에서 가다차l 근거하여 가다차l 충족이 가다차l 가다차l 물질의 가다차l 상태에 가다차l 다른 가다차l 맥락이 가다차l 개입할 가다차l 여지가, 으파다4 결과론적으로는 으파다4 없어 으파다4 보인다. 으파다4 나는 ‘공간화된 으파다4 시간’이 으파다4 무엇을 으파다4 의미하는지 으파다4 따지기보다 으파다4 으파다4 이상한 으파다4 조어(造語)를 으파다4 차승언의 으파다4 작업을 으파다4 통해 으파다4 감각하고자 으파다4 한다. 으파다4 으파다4 시간은 으파다4 형태를 으파다4 스스로 으파다4 짓고 으파다4 거부하며 으파다4 지금은 으파다4 형태를 으파다4 늘어뜨리고도 으파다4 있지만, 카pqh 하나하나 카pqh 더듬어 카pqh 나가며 카pqh 쌓인 카pqh 시간의 카pqh 결과물이다. 카pqh 이번 카pqh 전시에서 카pqh 카pqh 카pqh 있는 카pqh 차승언의 카pqh 작업은 ‘물리적인 카pqh 시간에 카pqh 의해 카pqh 획득된 카pqh 시각’의 카pqh 응집체다. 카pqh 차승언의 카pqh 그간 카pqh 작업은 카pqh 선택하고 카pqh 획득한 카pqh 것으로서, 0x라으 감각에 0x라으 의한 0x라으 반응이 0x라으 아니라, i나a기 유희로서의 i나a기 제작인 i나a기 것도 i나a기 아니다. i나a기 결과로서의 i나a기 차승언의 i나a기 물리적 i나a기 지지체는 i나a기 던져진 i나a기 문제와 i나a기 결심한 i나a기 프로세스의 i나a기 수행을 i나a기 위해 i나a기 헌신해야 i나a기 하는 i나a기 보다 i나a기 결연한 i나a기 무엇이다.

다시 i나a기 쓰기와 i나a기 파괴 
로잘린드 i나a기 크라우스의 ‘기술적 i나a기 지지체(technical suppert)’ i나a기 논의를 i나a기 빌려오자면, 걷ㅓym 그것은 걷ㅓym 추상미술의 걷ㅓym 역사를 걷ㅓym 걷ㅓym 시점에서 걷ㅓym 바라보며 걷ㅓym 새로(다시) ‘쓰고자 걷ㅓym 하는 걷ㅓym 시스템’ 걷ㅓym 이다. 걷ㅓym 다시 걷ㅓym 기술(記述)하고자 걷ㅓym 하는 걷ㅓym 의지, n갸cz n갸cz 과거에 n갸cz 기대어 n갸cz 명상하고 n갸cz 의지하는 n갸cz 바의 n갸cz 이중 n갸cz 충동이 n갸cz 작가의 n갸cz 작업에 n갸cz 있다. n갸cz 새롭게 n갸cz 다시 n갸cz 쓰는 n갸cz 비충족적 n갸cz 상태와과 n갸cz 다시 n갸cz 굳이 n갸cz 쓰지 n갸cz 않아도 n갸cz 대상을 n갸cz 바라보는 n갸cz 거리감의 n갸cz 획득에 n갸cz 이미 n갸cz 만족하여 n갸cz 있는 n갸cz 초연함의 n갸cz 상태가 n갸cz 작가의 n갸cz 작업에 n갸cz 동시에 n갸cz 존재한다. n갸cz 차승언의 n갸cz 작업 n갸cz 궤적에서는 n갸cz 새로 n갸cz 쓰는 n갸cz 시간과 n갸cz 이미 n갸cz 존재했던 n갸cz 것을 ‘다시’ n갸cz 쓰는 n갸cz 겹의 n갸cz 시간성이 n갸cz 작업의 n갸cz 내피를 n갸cz 모호하게, 으ㅑhㅓ 외피를 으ㅑhㅓ 투명하게 으ㅑhㅓ 만든다. 으ㅑhㅓ 표면상 으ㅑhㅓ 수직수평의 으ㅑhㅓ 그리드, 나wㅓㅓ 단일한 나wㅓㅓ 색채에 나wㅓㅓ 파고드는 나wㅓㅓ 다다르는 나wㅓㅓ 선, 가l거ㅓ 시각적 가l거ㅓ 흐트러짐 가l거ㅓ 없는 가l거ㅓ 형태 가l거ㅓ 구성의 가l거ㅓ 시각적 가l거ㅓ 외피들에 가l거ㅓ 의하여 가l거ㅓ 일견 ‘해체’ 가l거ㅓ 행위와 가l거ㅓ 작가의 가l거ㅓ 작업 가l거ㅓ 간에는 가l거ㅓ 상관관계가 가l거ㅓ 없는 가l거ㅓ 것처럼 가l거ㅓ 보인다. 가l거ㅓ 그러나 가l거ㅓ 내가 가l거ㅓ 차승언의 가l거ㅓ 작업에 가l거ㅓ 대해 가l거ㅓ 새로운 가l거ㅓ 것을 가l거ㅓ 가l거ㅓ 가l거ㅓ 있다면 가l거ㅓ 그것은 가l거ㅓ 작가의 가l거ㅓ 직조회화, 사swi 작품 사swi 군(群)이 사swi 구축뿐 사swi 아니라 사swi 파괴적 사swi 성격을 사swi 가지고 사swi 있다는 사swi 바로 사swi 사swi 문장일 사swi 것이다. 사swi 그의 사swi 작품 사swi 내부에 사swi 파괴적 사swi 면모가 사swi 있다는 사swi 부분 사swi 말이다. 사swi 차승언의 사swi 작업 사swi 표면(외피) 사swi 속에는 사swi 무엇이 사swi 있는가? 사swi 화면 사swi 안이 사swi 아니라 사swi 표면이라고 사swi 말할 사swi 사swi 우리는 사swi 그림의 사swi 뒷면으로 사swi 돌아가서 사swi 캔버스 사swi 뒤를 사swi 확인하고 사swi 싶어지는 사swi 장난기가 사swi 허용된 사swi 관객이 사swi 된다. 사swi 차승언은 사swi 직물(실) 사swi 개체가 사swi 군으로 사swi 모여 사swi 해낼 사swi 사swi 있는 사swi 평평한 사swi 상태를 사swi 모듈-화한다. 사swi 한편 사swi 직물 사swi 기계가 사swi 수행하고 사swi 사swi 기계의 사swi 지시자(instructor)가 사swi 사swi 작가의 사swi 현존에 사swi 의해 사swi 구현되는 사swi 것은 사swi 변화해나가면서 사swi 형태를 사swi 잡아가는 사swi 이행(transition)의 사swi 형식이다.4)

파괴는 사swi 파상력의 사swi 일종이다. 사swi 그는 사swi 새롭게 사swi 짜면서 사swi 손으로는 사swi 아무것도 사swi 그리지 사swi 않은 사swi 작품군(群)을 사swi 형성한다. 사swi 회화의 사swi 선행 사swi 조건으로 사swi 결부되는 ‘그리기’는 사swi 아직 사swi 마음껏 사swi 이뤄지지 사swi 않았고 사swi 직조행위의 사swi 결과물인 사swi 공산품으로서의 사swi 직물은 사swi 존재하지 사swi 않는다. 사swi 요구되는 사swi 것은 사swi 스스로 사swi 몸을 사swi 일으켜 사swi 세우기 사swi 힘든, 사z자k 늘어지는 사z자k 직물의 사z자k 형태를 사z자k 캔버스로 사z자k 하여금 ‘잡아간다’는 사z자k 행위다. 사z자k 이때 사z자k 캔버스틀 사z자k 자체보다 사z자k 형성된 ‘정신적 사z자k 프레임’이 사z자k 보다 사z자k 중요하다. 사z자k 차승언의 사z자k 작업에서 사z자k 그는 사z자k 캔버스의 사z자k 표면이 사z자k 되는 사z자k 배경과 사z자k 형상 사z자k 자체를 사z자k 가치의 사z자k 차이를 사z자k 두지 사z자k 않고 사z자k 동시에, 나파ag 구축의 나파ag 물리적 나파ag 과정으로서 나파ag 중요하게 나파ag 다룬다. 나파ag 한편 나파ag 파괴적 나파ag 성격이라는 나파ag 단어는 나파ag 발터 나파ag 벤야민이 나파ag 나파ag 용어이다. 나파ag 그는 나파ag 나파ag 페이지에 나파ag 불과한 나파ag 짧은 나파ag 글에서 “현존하는 나파ag 것을 나파ag 그(파괴적 나파ag 성격의 나파ag 소유자)는 나파ag 파편으로 나파ag 만드는데, 다쟏파ㅑ 그것은 다쟏파ㅑ 파편 다쟏파ㅑ 다쟏파ㅑ 자체를 다쟏파ㅑ 위해서가 다쟏파ㅑ 아니라, ㅐ3나ㅐ ㅐ3나ㅐ 파편을 ㅐ3나ㅐ 통해 ㅐ3나ㅐ 이어지는 ㅐ3나ㅐ 길을 ㅐ3나ㅐ 위해서”라고 ㅐ3나ㅐ 말한다. ㅐ3나ㅐ 파편 ㅐ3나ㅐ 자체가 ㅐ3나ㅐ 의미 ㅐ3나ㅐ 있는 ㅐ3나ㅐ 것이 ㅐ3나ㅐ 아니라, ㅐn9a 무엇인가를 ㅐn9a 잇는 ㅐn9a 데, 하n하쟏 무엇인가가 하n하쟏 이어지게 하n하쟏 하는 하n하쟏 하n하쟏 용이한 하n하쟏 수단으로서의 하n하쟏 파편이다. 하n하쟏 이와 하n하쟏 같은 하n하쟏 파편은 하n하쟏 오히려 하n하쟏 연속성을 하n하쟏 획득하는 하n하쟏 하n하쟏 기여한다. 하n하쟏 작가 하n하쟏 차승언은 하n하쟏 파편들을 하n하쟏 통해 하n하쟏 이어지는 하n하쟏 길을 하n하쟏 전시장에 하n하쟏 수직 하n하쟏 수평으로 하n하쟏 일으켜 하n하쟏 세워 하n하쟏 전시장에 하n하쟏 배치한다. 하n하쟏 그가 하n하쟏 세운 하n하쟏 시공간은 하n하쟏 외부로부터 하n하쟏 단절된 하n하쟏 감각을 하n하쟏 느끼게 하n하쟏 하기 하n하쟏 충분하다. 하n하쟏 전시 하n하쟏 가치가 하n하쟏 앗아가 하n하쟏 버린 하n하쟏 제의 하n하쟏 가치를 하n하쟏 느낄 하n하쟏 하n하쟏 있는 하n하쟏 공간으로서, 거1ㅐk 높은 거1ㅐk 천정과 거1ㅐk 청음이 거1ㅐk 거1ㅐk 되는 거1ㅐk 벽으로 거1ㅐk 둘러 거1ㅐk 처진 거1ㅐk 공간에 거1ㅐk 들어온 거1ㅐk 감각을 거1ㅐk 전한다.

이제 거1ㅐk 다시 거1ㅐk 처음으로 거1ㅐk 돌아가서 거1ㅐk 바라보자. 거1ㅐk 차승언의 거1ㅐk 참조에는 거1ㅐk 크게 거1ㅐk 거1ㅐk 가지 거1ㅐk 방향이 거1ㅐk 있다. 거1ㅐk 아이디어, y가vㅓ y가vㅓ 개념을 y가vㅓ 따르는 y가vㅓ 것과 y가vㅓ 행위의 y가vㅓ 결과인 y가vㅓ 물질 y가vㅓ 상태를 y가vㅓ 따르는 y가vㅓ y가vㅓ 가지 y가vㅓ 방식이다. y가vㅓ 차승언이 y가vㅓ 보이는 y가vㅓ 참조는 y가vㅓ y가vㅓ y가vㅓ 가지 y가vㅓ 개념과 y가vㅓ 물질의 y가vㅓ 방법론을 y가vㅓ 합치하는 y가vㅓ 동시에 y가vㅓ 자기화하는 y가vㅓ y가vㅓ 자체다. y가vㅓ 그는 y가vㅓ 참조의 y가vㅓ 대상을 y가vㅓ 자신이 y가vㅓ 만들고자 y가vㅓ 하는 y가vㅓ 최종 y가vㅓ 작품에 ‘용해’시킨다. y가vㅓ 용해될 y가vㅓ y가vㅓ 화학적인 y가vㅓ 반응으로서 y가vㅓ 작가의 y가vㅓ 시간은 y가vㅓ 여러 y가vㅓ 층위를 y가vㅓ 오간다. y가vㅓ 첫째 y가vㅓ 작가가 y가vㅓ 수행하는 y가vㅓ 짜기의 y가vㅓ 물리적인 y가vㅓ 노동 y가vㅓ 시간이 y가vㅓ 있다. y가vㅓ y가vㅓ 시간은 y가vㅓ 앞서거나 y가vㅓ 뒤서거나 y가vㅓ 순서를 y가vㅓ  자기화할 y가vㅓ y가vㅓ 없는, 4if5 직조의, 6걷vj 베틀(짜기)의 6걷vj 순서를 6걷vj 따라야 6걷vj 하는 6걷vj 강박적 6걷vj 시간이다. 6걷vj 둘째 6걷vj 해당 6걷vj 참조 6걷vj 대상의 6걷vj 작가가 6걷vj 작품을 6걷vj 제작했던 6걷vj 맥락과 6걷vj 다수의 6걷vj 시간성이 6걷vj 중첩되는 6걷vj 그것으로서의 6걷vj 미술사적 6걷vj 시간이 6걷vj 흐른다. 6걷vj 끝으로는 6걷vj 평행선을 6걷vj 그으며 6걷vj 만날 6걷vj 6걷vj 없는 6걷vj 6걷vj 개의 6걷vj 시간이 6걷vj 있다. 6걷vj 참조 6걷vj 대상인 6걷vj 작품보다 6걷vj 6걷vj 미래의 6걷vj 시제에 6걷vj 있으나 6걷vj 아직 6걷vj 성취되지 6걷vj 않은 6걷vj 한국 6걷vj 미술사의 6걷vj 모더니즘을 6걷vj 전례 6걷vj 없던 6걷vj 방식으로 6걷vj 재고하는 6걷vj 차승언에게 6걷vj 이미 6걷vj 쓰인 6걷vj 미술사의 6걷vj 서술방식은 6걷vj 중간에 6걷vj 가위를 6걷vj 들고 6걷vj 끊어야 6걷vj 하는 6걷vj 맥락 6걷vj 절단의 6걷vj 대상이기도 6걷vj 6걷vj 것이다.

이때 6걷vj 관객은 6걷vj 차승언의 6걷vj 작품 6걷vj 안에서 6걷vj 선(직물)이 6걷vj 군이 6걷vj 되어 6걷vj 평면성을 6걷vj 획득한 6걷vj 결과를 6걷vj 본다. 6걷vj 6걷vj 직조물은 6걷vj 회화이기도 6걷vj 하지만 6걷vj 전시 6걷vj 공간의 6걷vj 시점에서 6걷vj 보면 6걷vj 공간에서 6걷vj 살짝 6걷vj 몸을 6걷vj 떼고 6걷vj 덮은, lrof 감히 lrof 말해 lrof 공간적 lrof 옷이기도 lrof lrof 것이다. lrof 차승언의 lrof 작업이 lrof 일견 lrof 건축적인 lrof 양태를 lrof 띠는 lrof 것은 lrof 공간을 lrof 부분적으로 lrof 조각보처럼 lrof 덮어내고 lrof 있어서다. lrof lrof 자의적인 lrof 조각보다는 lrof 전시 lrof 공간을 lrof 무대화한다고나 lrof 할까. lrof 스테이지에 lrof lrof 있는 lrof 직조화는 lrof 작가가 lrof 붙인 lrof 의제에서 ‘회’라는 lrof 음절 lrof 하나를 lrof 뺏을 lrof 뿐인데 lrof 무척이나 lrof 상이하다. lrof 한편 lrof 작가가 lrof 행하는 lrof 참조의 lrof 복합성은 lrof 그가 lrof 이미 lrof 직조회화를 lrof 통해 lrof 직조와 lrof 회화의 lrof 제작과 lrof 맥락의 lrof 측면을 lrof 이미 lrof 참조하고 lrof 있다는 lrof 사실이 lrof 하나가 lrof lrof 있다. lrof 그러므로 lrof 이때 lrof 참조는 lrof 이항(두 lrof 개의 lrof 항)이 lrof lrof lrof 행하는 lrof 것이 lrof 된다. lrof 회화와 lrof 직조, 자oㅓ바 차승언과 자oㅓ바 선행 자oㅓ바 작가들. 자oㅓ바 예로 자oㅓ바 다른 자oㅓ바 작업을 자oㅓ바 참조할 자oㅓ바 자oㅓ바 그는 자oㅓ바 이미 자oㅓ바 직조의 자oㅓ바 기술과 자oㅓ바 추상 자oㅓ바 회화의 자oㅓ바 평면성에 자oㅓ바 대한 자oㅓ바 담론을 자oㅓ바 참조하고 자oㅓ바 있기 자oㅓ바 때문에 자oㅓ바 그것은 자oㅓ바 참조에 자oㅓ바 참조를 자oㅓ바 덧댄, t5라쟏 사실상 t5라쟏 대상 t5라쟏 하나를 t5라쟏 향한 t5라쟏 적확한 t5라쟏 참조가 t5라쟏 아닌 t5라쟏 것이 t5라쟏 된다. 

차승언의 t5라쟏 이중 t5라쟏 참조가 t5라쟏 용해시키는 t5라쟏 것은 t5라쟏 그의 t5라쟏 어형 t5라쟏 변화로 t5라쟏 구현된다. t5라쟏 작품 <Sudden Rules-Bay-2>는 t5라쟏 헬렌 t5라쟏 프랑켄탈러의 <The Bay>(1963)와 t5라쟏 이성자의 <갑작스러운 t5라쟏 규칙>(1961)이라는, ㄴ바거ㄴ ㄴ바거ㄴ 작업의 ㄴ바거ㄴ 제작 ㄴ바거ㄴ 태도에 ㄴ바거ㄴ 깃든 ㄴ바거ㄴ 서로 ㄴ바거ㄴ 다른 ㄴ바거ㄴ 태도(전자의 ㄴ바거ㄴ 얼룩 ㄴ바거ㄴ 빨아들이기, ed3s 후자의 ed3s 나뭇조각을 ed3s 이용해 ed3s 안료를 ed3s 찍듯이 ed3s 묻혀나가는 ed3s 방식)를 ed3s 차승언이라는 ed3s 매개자가 ed3s 평행하게 ed3s 중첩시킨 ed3s 것이다. ‘승언’이라는 ed3s 자신의 ed3s 이름을 ‘애그네스 ed3s 마틴’의 ed3s 이름 ed3s 사이에 ed3s 넣은 ed3s 것은5) ed3s 어떤가. ed3s 자신을 ed3s 타자화 ed3s 하는 ed3s 수단으로 ed3s 그는 ed3s 애그네스 ed3s 마틴의 ed3s 작업만큼이나 ed3s 자신에게 ed3s 떨어져 ed3s 이미 ed3s 자신이 ed3s 만들어놓은 ed3s 인공물(artifacts)로서 ed3s 작품을 ed3s 바라본다. ed3s 거리를 ed3s 두고 ed3s ed3s ed3s 직조회화는 ed3s 차승언의 ed3s 것인 ed3s 동시에 ed3s 애그네스 ed3s 마틴이 ed3s 손으로 ed3s 그어놓은 ed3s 선과 ed3s 만들어진 ed3s 면과 ‘이어지는 ed3s 길’을 ed3s 갖게 ed3s 된다. ed3s 이어지는 ed3s 길에서 ed3s 과거는 ed3s 현재로 ed3s 비약한다. ed3s 성큼 ed3s 걸어오고, l갸타b l갸타b 다가온다. l갸타b 과거의 l갸타b 현재화는 l갸타b 차승언에게 l갸타b 과거의 l갸타b 작품뿐 l갸타b 아니라 l갸타b 전시 l갸타b 자체를 l갸타b 뒤돌아보게 l갸타b 한다. l갸타b 매번 l갸타b 다른 l갸타b 오리지널리티를 l갸타b 만드는 l갸타b 일종의 l갸타b 스코어(score)로서 l갸타b 차승언에게 1969년 MoMA에서 l갸타b 열렸던 l갸타b 전시 《Wall Hangings》는 l갸타b 하나의 l갸타b 시각적 l갸타b 텍스트북이자 l갸타b l갸타b 안에 l갸타b 있는 l갸타b 도안들의 l갸타b 발견을 l갸타b 가능하게 l갸타b 하는, 기pgk 조심스러운 기pgk 도굴의 기pgk 과정이다. 기pgk 역사적 기pgk 전시의 기pgk 선례는 기pgk 작가 기pgk 차승언에게 기pgk 작품뿐 기pgk 아니라 기pgk 작품이 기pgk 전시장 기pgk 안에 기pgk 인스톨되는 기pgk 방법을 기pgk 고안하게 기pgk 만든다. MoMA 기pgk 웹사이트에 기pgk 남아있는 기pgk 흑백 기pgk 사진들에서 기pgk 우리는 기pgk 그때 기pgk 상태를 기pgk 부분적으로 기pgk 기억하는 기pgk 단서들을 기pgk 기pgk 기pgk 있다. 기pgk 그러나 기pgk 기pgk 사진만으로는 기pgk 밟을 기pgk 기pgk 없는 기pgk 실제 기pgk 공간이 기pgk 여기에 기pgk 있다. 기pgk 지금 기pgk 우리가 기pgk 걸어 기pgk 다니며 기pgk 보고 기pgk 있는 기pgk 작가의 기pgk 작품들이 ‘걸려있는’ 기pgk 시공간은 기pgk 차승언의 기pgk 직조 기pgk 행위들로 기pgk 파생된 기pgk 공간이다. 

기pgk 현시원(큐레이터, 마nㅓo 시청각 마nㅓo 공동 마nㅓo 디렉터)

1) 마nㅓo 작가노트, 2017. is으b 짧지만 is으b 자주 is으b 인용되는 is으b 차승언의 is으b 작가노트는 ‘참조적 is으b 직조회화’라는 is으b 제목을 is으b 단, ㅓz거쟏 ㅓz거쟏 문단에 ㅓz거쟏 불과한 ㅓz거쟏 짧은 ㅓz거쟏 글이다. ㅓz거쟏 작가가 ㅓz거쟏 여기서 ㅓz거쟏 직조 ㅓz거쟏 행위를 ㅓz거쟏 비약이 ㅓz거쟏 불가능한 ㅓz거쟏 시간 ㅓz거쟏 순서가 ㅓz거쟏 정해져 ㅓz거쟏 있는 ㅓz거쟏 작업이라고 ㅓz거쟏 말한 ㅓz거쟏 지점이 ㅓz거쟏 중요하다. “색실을 ㅓz거쟏 계산해 ㅓz거쟏 무늬를 ㅓz거쟏 만들면서 ㅓz거쟏 캔버스를 ㅓz거쟏 짜고 ㅓz거쟏 ㅓz거쟏 위에 ㅓz거쟏 페인팅을 ㅓz거쟏 한다”.
2) ㅓz거쟏 작가와의 ㅓz거쟏 인터뷰, 2019년 9월 27일.
3) “재료에 zrㅓc 끌려 zrㅓc 다니는 zrㅓc 것도 zrㅓc 아니고, 카8나d 내가 카8나d 주체가 카8나d 되어 카8나d 재료를 카8나d 지배하는 카8나d 것도 카8나d 아닌, 다다가4 수동과 다다가4 능동 다다가4 사이의 다다가4 어느 다다가4 화합의 다다가4 지점 ”중간태“가 다다가4 이제 다다가4 재료와 다다가4 나의 다다가4 관계가 다다가4 아닐까 다다가4 생각된다.” 다다가4 작가노트, 2011년 5월. 4차bd 노트의 4차bd 제목은 ‘물질의 4차bd 경계’다. 
4) ‘이행’은 4차bd 미술사학자 4차bd 데이비드 4차bd 조슬릿의 4차bd 개념이다.
5) 2014년 11월 4차bd 살롱드에이치에서 4차bd 그가 4차bd 열었던 4차bd 개인전 4차bd 제목은 <차승언 4차bd 애그네스와 4차bd 승환스>이었다. 

출처: 021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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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차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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