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ODYSSEY : The Pencilism

갤러리밈

2020년 7월 1일 ~ 2020년 7월 19일

펜슬리즘 -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갤러리밈이 기획하고 4명의 중견 작가가 참여한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전은 각 작가의 드로잉을 오디세이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작가 별로 다른 역에 도착한 것 같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던 길 멈추고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밀도감이 공통적이다. 인생과도 비교될 수 있는 선의 여행과 함께하는 동반자는 연필 한 자루다. 유목민의 지혜가 알려주듯, 떠나는 자의 짐 꾸러미는 가벼워야 한다. 삶의 편리를 보장해 준다고 믿어지는 점점 늘어나는 짐 꾸러미 때문에 떠나기 힘든 시대는 여행을 원점으로 회귀할 따름인 아늑하고 안전한 소비 품목으로 변화시켰다. 예술은 제자리에서도 가능한 여행이다. 가상현실 기술도 그와 유사한 체험의 제공을 약속하지만, 게임 참여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손가락이 아닌 손의 감각’(들뢰즈)을 되살리기 위해 스크린에 직접 쓸 수 있는 플라스틱 펜도 있지만, 그 둔탁한 감도는 펜슬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선과 함께 떠나는 또 다른 시공의 여행에는 다양한 서사가 깔려 있다. 자크 아탈리의 미로나 유목에 대한 단상에 나오듯, 미로를 유목하는 사람은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온다. 이 전시에서 서사의 범위는 소소한 일상의 단상부터 장대한 우주적 풍경에 이른다. 그들의 주재료인 펜슬은 ‘The Pencilism’이라는 낯선 용어로 묶여졌는데, 그것은 소박한 필기구라고도 할 수 있는 매체에 기념비적 위상을 부여한다. 연필 한 자루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선은 마치 인생처럼 나아간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여기까지 어찌 왔나 싶을 예술가의 길이 쭉 뻗은 고속도로는 아니다.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이 있는가 하면 살을 파고드는 듯한 선도 있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에 시간 낭비인 방황은 금기시 된다. 하지만 목적지가 각기 다른 이들에게 시점과 종점 간의 최단 거리는 허구적이다. 모두를 위한 속도는 정체를 낳는다.

모두가 다 같이 바라는,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은 속도를 위한 속도에 치이는 삶을 낳았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인은 이제 타자에 대한 경계를 극도로 강화해야 하는 진정한 재난과 마주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매우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이제 미술은 대규모 관중을 모으는 시각적 흥행물이 아니라, 찬찬히 자기 길을 걸어왔던 작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작품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전시에서 선의 여행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주름의 배치, 그리고 그 안팎에 퍼진 입자들의 분포는 현대의 전형적인 시각 이미지와 다르다. 현대의 스펙터클은 타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격적으로 거대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자본과 노동의 산물로서의 스펙터클은 이윤과 연관된 관심끌기가 중요하다. 점점 무뎌가는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강도도 커진다. 주의 깊지 않은 시선으로도 단번에 파악되는 얄팍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 전시의 작가들은 밀도로 승부한다.

그 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종이와 펜슬은 현대적 가치를 반성하는 근본적 과제수행에 적합해 보인다. 펜슬 드로잉만으로 꾸려진 이 전시는 기본과 실험을 연결시킨다. 연필 또는 샤프펜슬은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그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이 있는, 즉 누구나 인생 초반기에 손에 잡아봤던 것이다. 매체가 소박하다고 결과물까지 소박하지는 않다. 생산수단의 감축은 포괄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의 미니멀리즘인 셈이다. 오랜 연마에 의해서 손의 연장처럼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필력은 감춰진 에너지나 무의식의 발현(김범중, 표영실)부터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모델(문기전, 박미현)까지 이른다. 각 작품들은 아득한 시공에서 발생한 파동의 리드미컬한 반향(김범중)부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한 형식(박미현) 까지, 경계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삶의 게임(표영실) 부터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적 도해(문기전) 까지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나무와 식물성 잔해로 이루어진 연필은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진 종이를 부른다. 나무라는 원재료가 그렇듯이 가지처럼 끝없이 갈라지는 길에서의 선택이다. 그 선택들의 쌓임은 매체와 형식에도 내재한다. 내용과 형식이 보다 긴밀해질수록 작은 변화의 파장도 크다. 드로잉, 특히 펜슬 드로잉은 모국어 같은 위상을 가진다. 모국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지를 많이 사용하고, 필기구가 모노톤이다 보니 동양화 같은 분위기도 있다는 점 외에는 말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에게 펜슬 드로잉은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까마득하게 잊었지만, 상용어나 산문을 넘어서 꿈도 시도 가능하게 하는 몸/무의식과 일체화된다. 그것은 모국어의 습득처럼 타자의 소리로부터 와서 스며들 듯이 체화된 것이다. 연필은 아이가 사회 속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처음 손에 쥐었던 도구였다. 삐뚤빼뚤 글쓰기와 그리기는 잊혀져 있지만 문명권의 구성원들에게는 공통된 체험이다.

이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질로 대체된 잊혀진 감각이다. 미술가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에서 대상의 윤곽선과 그림자(음영)를 위해 죽죽 긋는 무심한 사선의 감각으로, 완성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밑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도 뭔가 자신과 관련된 소중한 것을 쓰기 위해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작가에게 펜슬은 이제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고양된다. 무엇인가 쓰기 위해 시작했지만, 점차 쓰기 그 자체를 위해 쓰게 되고, 결국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쓸 수 있다.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누보로망의 작가들의 주장처럼, 내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알기 위해 쓰게 된다. 의미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야 온다. 심지어는 대상도 그렇다. 펜슬로 그리기는 잠재적인 쓰기이다. 쓰기/그리기는 모두가 다소간은 맹목적인 시작, 그리고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이 요구된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유에서 무의 창조라기보다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에서 계산과 전략은 결정적이지 않다.

작업, 특히 드로잉은 머리 뿐 아니라 몸과 손을 통과해야 하는 원초적이고도 치열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드로잉은 단독으로 서 있을 수 없다. 예술작품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족성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한 듯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지만, 지우개로 지워진 것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작에 마지막이, 마지막에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정한 게임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의 유희는 무한하다. 거듭해서 떠남은 예술의 조건이다. 완성된 작품이 하나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다. 선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또한 포함하는, 샛길과 우회로 가득한 미로 속에서 나아감은 역행이나 회귀이다. 우주같이 막막한 시공간에도 웜홀이나 블랙홀, 화이트홀 같이 도약과 비약, 가속과 감속을 허용하는 특별한 길이 있다.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은 모두에게 강제함으로서 권력의 효과를 생산하는 하나의 길에 대한 탈주로를 만든다. 자기 방식대로 가기와 탈주(누군가에게는 탈선)를 연결시킴으로서 다른 길도 있음을 제시한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예술가를 포함한 모두에게 강요되는 폐쇄회로를 빠져나가는 일이다. 효과적인 권력의 작동에서 하나의 지배적 언어를 강요하는 것은 필수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보편적인 문법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럽고 분란과 전쟁까지도 낳는 보편적 문법은 지배적 권력 지형도의 산물이다. 뻔한 것이 보편으로 행세하는 시대, 이해하기 힘든 세상보다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더 괴로울 정도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보편의 존재는 이질적인 지층간의 우연적 관계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표상의 세계는 사회의 세력 관계에 의해 항상 위조되어 있다.

[기계적 무의식]은 한 어린이가 자신의 언어를 배울 때, 혹은 그 어린이가 자신의 말 행위를 결정하는 특정한 코드를 배울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이 끼어 들어간 사회구조의 요구들을 배운다’(베른슈타인)고 인용한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개인에게는 법칙에 대한 완전 복종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 식으로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꿈꾸는 것까지 따라오게 한다. 그러나 사랑처럼 언어도 독점을 요구한다. 몇 가지 언어를 통달해도 어느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수 십 년 전 떠난 고향이 그립다고 눈물 지으면서도 정작 한국어는 잊어버린 교포들을 종종 본다. 선제하는 상징의 산물인 주체는 자유롭지 않다. [기계적 무의식]은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주체는 근대의 이상인 자율과 자유의 인간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 체계적인 격리차별, 전면화 된 수용소’(가타리) 등을 낳았다.

자유를 원하는 예술가는 그 누구라도 구조의 우연한 결정체에 불과한 주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이질성(몸, 무의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이와 펜슬은 해부대와 칼을 연상시키는 분석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념무상의 수행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작업은 (재)발견의 장이기도 하며,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가 하면 우주적 질서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를 비추고 공명한다. 종이와 펜슬은 그림에 한정되기 보다는 그림을 포함한 언어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던 시기의 매체로 주목된다. 인간이 되기 위해 걸음마 훈련이 있다면, 손에도 그에 상응하는 단계가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혁명적 정신분석학이 지배적 구조로의 환원보다는 탈피와 변형을 강조하듯이, 현대 예술 또한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험적 장으로 삼아왔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든 말든 간에, 언어의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 선택된 종이와 펜슬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매체는 자연스러운 어법에 적합하다. 방금 꾼 꿈을 바로 적어 넣을 수 있는 순발력 있고 융통성 있으며, 언제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이 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계속적인 실행을 통해 점차 분명해질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품 속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펜슬의 궤적은 몸에서 실을 빼내는 누에나 거미 같은 자연스러움 마저 보인다. 물론 예술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의식화된 자연이며, 더 적절한 비유로는 언어이다. 가장 이상적인 언어는 모국어이다. 모국어가 우연찮게 세계 보편 언어가 된 국가의 국민은 근대를 선점한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했다. 종이와 연필은 한국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국어와의 비교는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혁명적 정신분석학자는 ‘모국어라는 한 지역 내에서 형성된 언어의 통일성조차 항상 어떤 권력구성체와 분리할 수 없다’(펠릭스 가타리)고 본다.

면접을 보기 위해 사투리를 교정하거나 한국어에 대한 제 3세계에서의 학습 열기를 생각해 보라. 한국에서 영어 학습 열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결국 힘의 논리는 무엇이 지배적인 언어인가에 대한 인정의 체계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재현된다. 보편성의 탈을 쓴 지배적 언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다국적 기업은 기술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애쓴다.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 권력은 끊임없이 세세하게 각 기표적 관계를 재검토 한다’고 하면서, 표상과 권력의 관계를 강조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어디엔가 우연히 태어나는 개인에게 시간과 자원의 가능성은 무한하지 않다. 선택과 집중에는 정치경제학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기계까지 더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연필보다는 전자기기에 먼저 친숙해지지만, 연필과 종이가 그때그때 업그레이드 시켜줘야 하는 기기/상품과 다른 점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과의 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연필을 쥔 작가의 모습에는 경전을 필사하는 수도승처럼 절대적 타자와의 고독한 대화가 있을 뿐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선호하는 펜슬은 내향적인 매체이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주장하듯, 읽고 쓰기에 의해 자의식을 형성했던 내향적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읽고 쓰기보다 정보검색과 소통이 중시되는 시대에 내향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받는 외향성의 내용을 내향성이 만들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필사 및 인쇄문화의 시대에 내향성은 논리정연한 지식인을 낳기도 했지만, 점차 희귀해지고 금기시 된다. 금기 위반의 충동을 강조했던 바타유라면 내밀성이라고 표현했을 이질적 지향은 누군가는 범죄로, 누군가는 예술로 부를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선명하다. 보다 지배적 언어는 고속도로 같은 비유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각자의 언어와 문법으로 말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작가에게는 최대한 이물감 없는 매체가 필수적이다. 자기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요구되는—체계는 쓸데없는 진입장벽을 높이 세우곤 한다--훈련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대학에 가기/다니기 위해 배운 것을 애써 잊어야만 하는 씁쓸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끼어드는 것(기구, 제도 등)이 많을수록 본질은 희미해진다. 현대의 관료주의는 본질을 잊고 형식을 본질화 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분업이 촉구하는 분과과학은 형식주의로 흐른다. 언어를 과학의 단계까지 정련했다는 현대철학의 한 사조는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부당한 배제는 본질을 문제 삼는 예술을 유령화 한다. 그러나 유령은 편재한다. 체계를 지시할 뿐인 체계의 공허함과 가혹함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인 어떤 소박하거나 야심찬 활동을 꿈꾸는데, 이때 예술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재발견될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종이와 펜슬은 여러 미술도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각 작품들은 펜슬이 본질의 탐구에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객과의 거리도 단축시켜준다. 관객도 종이와 펜슬이 주는 감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작가: 김범중, 문기전, 박미현, 표영실

출처: 갤러리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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