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ODYSSEY : The Pencilism

갤러리밈

July 1, 2020 ~ July 19, 2020

펜슬리즘 - aph파 선과 aph파 함께 aph파 떠나는 aph파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갤러리밈이 aph파 기획하고 4명의 aph파 중견 aph파 작가가 aph파 참여한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aph파 전은 aph파 aph파 작가의 aph파 드로잉을 aph파 오디세이의 aph파 여정으로 aph파 간주한다. aph파 작가 aph파 별로 aph파 다른 aph파 역에 aph파 도착한 aph파 aph파 같은 aph파 차이점이 aph파 있지만, si가s 가던 si가s si가s 멈추고 si가s 구석구석 si가s 뜯어보고 si가s 싶은 si가s 밀도감이 si가s 공통적이다. si가s 인생과도 si가s 비교될 si가s si가s 있는 si가s 선의 si가s 여행과 si가s 함께하는 si가s 동반자는 si가s 연필 si가s si가s 자루다. si가s 유목민의 si가s 지혜가 si가s 알려주듯, c갸히m 떠나는 c갸히m 자의 c갸히m c갸히m 꾸러미는 c갸히m 가벼워야 c갸히m 한다. c갸히m 삶의 c갸히m 편리를 c갸히m 보장해 c갸히m 준다고 c갸히m 믿어지는 c갸히m 점점 c갸히m 늘어나는 c갸히m c갸히m 꾸러미 c갸히m 때문에 c갸히m 떠나기 c갸히m 힘든 c갸히m 시대는 c갸히m 여행을 c갸히m 원점으로 c갸히m 회귀할 c갸히m 따름인 c갸히m 아늑하고 c갸히m 안전한 c갸히m 소비 c갸히m 품목으로 c갸히m 변화시켰다. c갸히m 예술은 c갸히m 제자리에서도 c갸히m 가능한 c갸히m 여행이다. c갸히m 가상현실 c갸히m 기술도 c갸히m 그와 c갸히m 유사한 c갸히m 체험의 c갸히m 제공을 c갸히m 약속하지만, g0t6 게임 g0t6 참여자의 g0t6 역할은 g0t6 수동적이다. ‘손가락이 g0t6 아닌 g0t6 손의 g0t6 감각’(들뢰즈)을 g0t6 되살리기 g0t6 위해 g0t6 스크린에 g0t6 직접 g0t6 g0t6 g0t6 있는 g0t6 플라스틱 g0t6 펜도 g0t6 있지만, pj0h pj0h 둔탁한 pj0h 감도는 pj0h 펜슬과는 pj0h 감히 pj0h 비교도 pj0h pj0h pj0h 없다.

선과 pj0h 함께 pj0h 떠나는 pj0h pj0h 다른 pj0h 시공의 pj0h 여행에는 pj0h 다양한 pj0h 서사가 pj0h 깔려 pj0h 있다. pj0h 자크 pj0h 아탈리의 pj0h 미로나 pj0h 유목에 pj0h 대한 pj0h 단상에 pj0h 나오듯, f2쟏라 미로를 f2쟏라 유목하는 f2쟏라 사람은 f2쟏라 이야기꺼리를 f2쟏라 가지고 f2쟏라 온다. f2쟏라 f2쟏라 전시에서 f2쟏라 서사의 f2쟏라 범위는 f2쟏라 소소한 f2쟏라 일상의 f2쟏라 단상부터 f2쟏라 장대한 f2쟏라 우주적 f2쟏라 풍경에 f2쟏라 이른다. f2쟏라 그들의 f2쟏라 주재료인 f2쟏라 펜슬은 ‘The Pencilism’이라는 f2쟏라 낯선 f2쟏라 용어로 f2쟏라 묶여졌는데, 바c파으 그것은 바c파으 소박한 바c파으 필기구라고도 바c파으 바c파으 바c파으 있는 바c파으 매체에 바c파으 기념비적 바c파으 위상을 바c파으 부여한다. 바c파으 연필 바c파으 바c파으 자루는 바c파으 아르키메데스의 바c파으 지렛대 바c파으 같은 바c파으 역할을 바c파으 수행할 바c파으 수도 바c파으 있다. 바c파으 선은 바c파으 마치 바c파으 인생처럼 바c파으 나아간다. 바c파으 지나온 바c파으 길을 바c파으 되돌아보면 바c파으 여기까지 바c파으 어찌 바c파으 왔나 바c파으 싶을 바c파으 예술가의 바c파으 길이 바c파으 바c파으 뻗은 바c파으 고속도로는 바c파으 아니다. 바c파으 매끄러운 바c파으 표면을 바c파으 활주하는 바c파으 선이 바c파으 있는가 바c파으 하면 바c파으 살을 바c파으 파고드는 바c파으 듯한 바c파으 선도 바c파으 있다. 바c파으 모든 바c파으 것이 바c파으 효율성을 바c파으 따지는 바c파으 시대에 바c파으 시간 바c파으 낭비인 바c파으 방황은 바c파으 금기시 바c파으 된다. 바c파으 하지만 바c파으 목적지가 바c파으 각기 바c파으 다른 바c파으 이들에게 바c파으 시점과 바c파으 종점 바c파으 간의 바c파으 최단 바c파으 거리는 바c파으 허구적이다. 바c파으 모두를 바c파으 위한 바c파으 속도는 바c파으 정체를 바c파으 낳는다.

모두가 바c파으 바c파으 같이 바c파으 바라는, 다ㄴaㅓ 그래서 다ㄴaㅓ 결국은 다ㄴaㅓ 누구도 다ㄴaㅓ 도달할 다ㄴaㅓ 다ㄴaㅓ 없는 다ㄴaㅓ 욕망은 다ㄴaㅓ 속도를 다ㄴaㅓ 위한 다ㄴaㅓ 속도에 다ㄴaㅓ 치이는 다ㄴaㅓ 삶을 다ㄴaㅓ 낳았다. 다ㄴaㅓ 이렇게 다ㄴaㅓ 앞만 다ㄴaㅓ 보고 다ㄴaㅓ 달려온 다ㄴaㅓ 현대인은 다ㄴaㅓ 이제 다ㄴaㅓ 타자에 다ㄴaㅓ 대한 다ㄴaㅓ 경계를 다ㄴaㅓ 극도로 다ㄴaㅓ 강화해야 다ㄴaㅓ 하는 다ㄴaㅓ 진정한 다ㄴaㅓ 재난과 다ㄴaㅓ 마주했다. 다ㄴaㅓ 코로나 다ㄴaㅓ 이후의 다ㄴaㅓ 세계가 다ㄴaㅓ 매우 다ㄴaㅓ 달라질 다ㄴaㅓ 것이라는 다ㄴaㅓ 점은 다ㄴaㅓ 많은 다ㄴaㅓ 사람들이 다ㄴaㅓ 인정한다. 다ㄴaㅓ 이제 다ㄴaㅓ 미술은 다ㄴaㅓ 대규모 다ㄴaㅓ 관중을 다ㄴaㅓ 모으는 다ㄴaㅓ 시각적 다ㄴaㅓ 흥행물이 다ㄴaㅓ 아니라, 1idv 찬찬히 1idv 자기 1idv 길을 1idv 걸어왔던 1idv 작지만 1idv 단단하게 1idv 다져진 1idv 작품을 1idv 소중히 1idv 여겨야 1idv 1idv 것이다. 1idv 1idv 전시에서 1idv 선의 1idv 여행이 1idv 만들어내는 1idv 미세한 1idv 주름의 1idv 배치, 나vp기 그리고 나vp기 나vp기 안팎에 나vp기 퍼진 나vp기 입자들의 나vp기 분포는 나vp기 현대의 나vp기 전형적인 나vp기 시각 나vp기 이미지와 나vp기 다르다. 나vp기 현대의 나vp기 스펙터클은 나vp기 타자의 나vp기 시선을 나vp기 끌기 나vp기 위해 나vp기 공격적으로 나vp기 거대해지는 나vp기 것이 나vp기 특징이다. 나vp기 자본과 나vp기 노동의 나vp기 산물로서의 나vp기 스펙터클은 나vp기 이윤과 나vp기 연관된 나vp기 관심끌기가 나vp기 중요하다. 나vp기 점점 나vp기 무뎌가는 나vp기 감각을 나vp기 자극하기 나vp기 위한 나vp기 강도도 나vp기 커진다. 나vp기 주의 나vp기 깊지 나vp기 않은 나vp기 시선으로도 나vp기 단번에 나vp기 파악되는 나vp기 얄팍한 나vp기 이미지의 나vp기 홍수 나vp기 속에서, 거rㅐ마 거rㅐ마 전시의 거rㅐ마 작가들은 거rㅐ마 밀도로 거rㅐ마 승부한다.

거rㅐ마 보다 거rㅐ마 거rㅐ마 소박할 거rㅐ마 거rㅐ마 없는 거rㅐ마 종이와 거rㅐ마 펜슬은 거rㅐ마 현대적 거rㅐ마 가치를 거rㅐ마 반성하는 거rㅐ마 근본적 거rㅐ마 과제수행에 거rㅐ마 적합해 거rㅐ마 보인다. 거rㅐ마 펜슬 거rㅐ마 드로잉만으로 거rㅐ마 꾸려진 거rㅐ마 거rㅐ마 전시는 거rㅐ마 기본과 거rㅐ마 실험을 거rㅐ마 연결시킨다. 거rㅐ마 연필 거rㅐ마 또는 거rㅐ마 샤프펜슬은 거rㅐ마 굳이 거rㅐ마 작가가 거rㅐ마 아니어도 거rㅐ마 그에 거rㅐ마 대한 거rㅐ마 원초적인 거rㅐ마 경험이 거rㅐ마 있는, 걷za히 걷za히 누구나 걷za히 인생 걷za히 초반기에 걷za히 손에 걷za히 잡아봤던 걷za히 것이다. 걷za히 매체가 걷za히 소박하다고 걷za히 결과물까지 걷za히 소박하지는 걷za히 않다. 걷za히 생산수단의 걷za히 감축은 걷za히 포괄적인 걷za히 내용을 걷za히 담기 걷za히 위한 걷za히 것이다. 걷za히 걷za히 다른 걷za히 의미의 걷za히 미니멀리즘인 걷za히 셈이다. 걷za히 오랜 걷za히 연마에 걷za히 의해서 걷za히 손의 걷za히 연장처럼 걷za히 자연스럽게 걷za히 발휘되는 걷za히 필력은 걷za히 감춰진 걷za히 에너지나 걷za히 무의식의 걷za히 발현(김범중, v카라라 표영실)부터 v카라라 주체와 v카라라 세계의 v카라라 관계에 v카라라 대한 v카라라 모델(문기전, s265 박미현)까지 s265 이른다. s265 s265 작품들은 s265 아득한 s265 시공에서 s265 발생한 s265 파동의 s265 리드미컬한 s265 반향(김범중)부터 s265 s265 치의 s265 오차도 s265 허용하지 s265 않는 s265 엄밀한 s265 형식(박미현) s265 까지, th파자 경계 th파자 위에서의 th파자 아슬아슬한 th파자 삶의 th파자 게임(표영실) th파자 부터 th파자 세계를 th파자 지각하는 th파자 방식에 th파자 대한 th파자 실험적 th파자 도해(문기전) th파자 까지 th파자 다양한 th파자 차원을 th파자 아우른다.

나무와 th파자 식물성 th파자 잔해로 th파자 이루어진 th파자 연필은 th파자 비슷한 th파자 재료로 th파자 만들어진 th파자 종이를 th파자 부른다. th파자 나무라는 th파자 원재료가 th파자 그렇듯이 th파자 가지처럼 th파자 끝없이 th파자 갈라지는 th파자 길에서의 th파자 선택이다. th파자 th파자 선택들의 th파자 쌓임은 th파자 매체와 th파자 형식에도 th파자 내재한다. th파자 내용과 th파자 형식이 th파자 보다 th파자 긴밀해질수록 th파자 작은 th파자 변화의 th파자 파장도 th파자 크다. th파자 드로잉, 우2ㅐ라 특히 우2ㅐ라 펜슬 우2ㅐ라 드로잉은 우2ㅐ라 모국어 우2ㅐ라 같은 우2ㅐ라 위상을 우2ㅐ라 가진다. 우2ㅐ라 모국어라고 우2ㅐ라 해서 우2ㅐ라 반드시 우2ㅐ라 한국적인 우2ㅐ라 것을 우2ㅐ라 말하는 우2ㅐ라 것은 우2ㅐ라 아니다. 우2ㅐ라 한지를 우2ㅐ라 많이 우2ㅐ라 사용하고, jaㅓb 필기구가 jaㅓb 모노톤이다 jaㅓb 보니 jaㅓb 동양화 jaㅓb 같은 jaㅓb 분위기도 jaㅓb 있다는 jaㅓb jaㅓb 외에는 jaㅓb 말이다. jaㅓb jaㅓb 전시의 jaㅓb 작가들에게 jaㅓb 펜슬 jaㅓb 드로잉은 jaㅓb 언제 jaㅓb 어떻게 jaㅓb 배웠는지 jaㅓb 까마득하게 jaㅓb 잊었지만, ㅐs나0 상용어나 ㅐs나0 산문을 ㅐs나0 넘어서 ㅐs나0 꿈도 ㅐs나0 시도 ㅐs나0 가능하게 ㅐs나0 하는 ㅐs나0 몸/무의식과 ㅐs나0 일체화된다. ㅐs나0 그것은 ㅐs나0 모국어의 ㅐs나0 습득처럼 ㅐs나0 타자의 ㅐs나0 소리로부터 ㅐs나0 와서 ㅐs나0 스며들 ㅐs나0 듯이 ㅐs나0 체화된 ㅐs나0 것이다. ㅐs나0 연필은 ㅐs나0 아이가 ㅐs나0 사회 ㅐs나0 속의 ㅐs나0 인간이 ㅐs나0 되기 ㅐs나0 위한 ㅐs나0 과정으로 ㅐs나0 처음 ㅐs나0 손에 ㅐs나0 쥐었던 ㅐs나0 도구였다. ㅐs나0 삐뚤빼뚤 ㅐs나0 글쓰기와 ㅐs나0 그리기는 ㅐs나0 잊혀져 ㅐs나0 있지만 ㅐs나0 문명권의 ㅐs나0 구성원들에게는 ㅐs나0 공통된 ㅐs나0 체험이다.

이제는 ㅐs나0 자판을 ㅐs나0 두드리는 ㅐs나0 손가락질로 ㅐs나0 대체된 ㅐs나0 잊혀진 ㅐs나0 감각이다. ㅐs나0 미술가가 ㅐs나0 되기 ㅐs나0 위한 ㅐs나0 훈련 ㅐs나0 과정에서 ㅐs나0 대상의 ㅐs나0 윤곽선과 ㅐs나0 그림자(음영)를 ㅐs나0 위해 ㅐs나0 죽죽 ㅐs나0 긋는 ㅐs나0 무심한 ㅐs나0 사선의 ㅐs나0 감각으로, d나h파 완성을 d나h파 위해 d나h파 사라져야 d나h파 하는 d나h파 밑그림으로 d나h파 남아있다. d나h파 그러나 d나h파 지금도 d나h파 뭔가 d나h파 자신과 d나h파 관련된 d나h파 소중한 d나h파 것을 d나h파 쓰기 d나h파 위해 d나h파 종이에 d나h파 꾹꾹 d나h파 눌러쓰는 d나h파 수고를 d나h파 마다하지 d나h파 않는 d나h파 사람들이 d나h파 d나h파 있다. d나h파 작가에게 d나h파 펜슬은 d나h파 이제 d나h파 도구가 d나h파 아닌 d나h파 목적으로 d나h파 고양된다. d나h파 무엇인가 d나h파 쓰기 d나h파 위해 d나h파 시작했지만, 나다ㅑg 점차 나다ㅑg 쓰기 나다ㅑg 나다ㅑg 자체를 나다ㅑg 위해 나다ㅑg 쓰게 나다ㅑg 되고, xlㅓh 결국 xlㅓh 처음에는 xlㅓh 생각하지 xlㅓh 못했던 xlㅓh 것도 xlㅓh xlㅓh xlㅓh 있다. xlㅓh 재현주의를 xlㅓh 거부하는 xlㅓh 누보로망의 xlㅓh 작가들의 xlㅓh 주장처럼, 바oyㅓ 내가 바oyㅓ 무엇을 바oyㅓ 쓰고 바oyㅓ 싶었는지 바oyㅓ 알기 바oyㅓ 위해 바oyㅓ 쓰게 바oyㅓ 된다. 바oyㅓ 의미는 바oyㅓ 처음이 바oyㅓ 아니라 바oyㅓ 나중에야 바oyㅓ 온다. 바oyㅓ 심지어는 바oyㅓ 대상도 바oyㅓ 그렇다. 바oyㅓ 펜슬로 바oyㅓ 그리기는 바oyㅓ 잠재적인 바oyㅓ 쓰기이다. 바oyㅓ 쓰기/그리기는 바oyㅓ 모두가 바oyㅓ 다소간은 바oyㅓ 맹목적인 바oyㅓ 시작, vj64 그리고 vj64 지속을 vj64 가능하게 vj64 하는 vj64 몰입이 vj64 요구된다. vj64 이러한 ‘창조’의 vj64 과정—유에서 vj64 무의 vj64 창조라기보다는 vj64 잠재적인 vj64 것의 vj64 현실화--에서 vj64 계산과 vj64 전략은 vj64 결정적이지 vj64 않다.

작업, fㅓw사 특히 fㅓw사 드로잉은 fㅓw사 머리 fㅓw사 fㅓw사 아니라 fㅓw사 몸과 fㅓw사 손을 fㅓw사 통과해야 fㅓw사 하는 fㅓw사 원초적이고도 fㅓw사 치열한 fㅓw사 과정이다. fㅓw사 그렇지 fㅓw사 않으면 fㅓw사 드로잉은 fㅓw사 단독으로 fㅓw사 fㅓw사 있을 fㅓw사 fㅓw사 없다. fㅓw사 예술작품이 fㅓw사 세상과 fㅓw사 소통하기 fㅓw사 위해 fㅓw사 필요한 fㅓw사 것은 fㅓw사 자족성이다. fㅓw사 전시된 fㅓw사 작품들은 fㅓw사 대부분 fㅓw사 원래 fㅓw사 그렇게 fㅓw사 하기로 fㅓw사 fㅓw사 fㅓw사 깔끔하게 fㅓw사 완성되어 fㅓw사 있지만, qmzq 지우개로 qmzq 지워진 qmzq 것조차 qmzq 완전히 qmzq 사라지는 qmzq 것은 qmzq 아니다. qmzq 시작에 qmzq 마지막이, iuxf 마지막에 iuxf 시작이 iuxf 있기 iuxf 때문이다. iuxf 작가가 iuxf 정한 iuxf 게임의 iuxf 시작과 iuxf iuxf 사이에서의 iuxf 유희는 iuxf 무한하다. iuxf 거듭해서 iuxf 떠남은 iuxf 예술의 iuxf 조건이다. iuxf 완성된 iuxf 작품이 iuxf 하나 iuxf 있을 iuxf 때마다 iuxf 거기에는 iuxf 새로운 iuxf 출발이 iuxf 있다. iuxf 선은 iuxf 자신이 iuxf 가는 iuxf 길에 iuxf 대한 iuxf 확신을 iuxf 표현하지는 iuxf 않는다. iuxf 가지 iuxf 않은 iuxf 길에 iuxf 대한 iuxf 미련과 iuxf 아쉬움 iuxf 또한 iuxf 포함하는, ㄴ4v차 샛길과 ㄴ4v차 우회로 ㄴ4v차 가득한 ㄴ4v차 미로 ㄴ4v차 속에서 ㄴ4v차 나아감은 ㄴ4v차 역행이나 ㄴ4v차 회귀이다. ㄴ4v차 우주같이 ㄴ4v차 막막한 ㄴ4v차 시공간에도 ㄴ4v차 웜홀이나 ㄴ4v차 블랙홀, aacg 화이트홀 aacg 같이 aacg 도약과 aacg 비약, i8ㅓ6 가속과 i8ㅓ6 감속을 i8ㅓ6 허용하는 i8ㅓ6 특별한 i8ㅓ6 길이 i8ㅓ6 있다.

선과 i8ㅓ6 함께 i8ㅓ6 떠나는 i8ㅓ6 여정은 i8ㅓ6 모두에게 i8ㅓ6 강제함으로서 i8ㅓ6 권력의 i8ㅓ6 효과를 i8ㅓ6 생산하는 i8ㅓ6 하나의 i8ㅓ6 길에 i8ㅓ6 대한 i8ㅓ6 탈주로를 i8ㅓ6 만든다. i8ㅓ6 자기 i8ㅓ6 방식대로 i8ㅓ6 가기와 i8ㅓ6 탈주(누군가에게는 i8ㅓ6 탈선)를 i8ㅓ6 연결시킴으로서 i8ㅓ6 다른 i8ㅓ6 길도 i8ㅓ6 있음을 i8ㅓ6 제시한다. i8ㅓ6 예술의 i8ㅓ6 가장 i8ㅓ6 중요한 i8ㅓ6 과제는 i8ㅓ6 예술가를 i8ㅓ6 포함한 i8ㅓ6 모두에게 i8ㅓ6 강요되는 i8ㅓ6 폐쇄회로를 i8ㅓ6 빠져나가는 i8ㅓ6 일이다. i8ㅓ6 효과적인 i8ㅓ6 권력의 i8ㅓ6 작동에서 i8ㅓ6 하나의 i8ㅓ6 지배적 i8ㅓ6 언어를 i8ㅓ6 강요하는 i8ㅓ6 것은 i8ㅓ6 필수다. i8ㅓ6 현대의 i8ㅓ6 정신분석학자들이 i8ㅓ6 주장하듯이 i8ㅓ6 보편적인 i8ㅓ6 문법은 i8ㅓ6 없다. i8ㅓ6 누군가에게는 i8ㅓ6 지극히 i8ㅓ6 인위적이고 i8ㅓ6 거추장스럽고 i8ㅓ6 분란과 i8ㅓ6 전쟁까지도 i8ㅓ6 낳는 i8ㅓ6 보편적 i8ㅓ6 문법은 i8ㅓ6 지배적 i8ㅓ6 권력 i8ㅓ6 지형도의 i8ㅓ6 산물이다. i8ㅓ6 뻔한 i8ㅓ6 것이 i8ㅓ6 보편으로 i8ㅓ6 행세하는 i8ㅓ6 시대, uㅓwh 이해하기 uㅓwh 힘든 uㅓwh 세상보다 uㅓwh 이해할 uㅓwh uㅓwh 있는 uㅓwh 세상이 uㅓwh uㅓwh 괴로울 uㅓwh 정도다. uㅓwh 펠릭스 uㅓwh 가타리는 [기계적 uㅓwh 무의식]에서, ㅑㅓㅓ0 보편의 ㅑㅓㅓ0 존재는 ㅑㅓㅓ0 이질적인 ㅑㅓㅓ0 지층간의 ㅑㅓㅓ0 우연적 ㅑㅓㅓ0 관계에 ㅑㅓㅓ0 의존한다고 ㅑㅓㅓ0 주장한다. ㅑㅓㅓ0 그에 ㅑㅓㅓ0 의하면 ㅑㅓㅓ0 표상의 ㅑㅓㅓ0 세계는 ㅑㅓㅓ0 사회의 ㅑㅓㅓ0 세력 ㅑㅓㅓ0 관계에 ㅑㅓㅓ0 의해 ㅑㅓㅓ0 항상 ㅑㅓㅓ0 위조되어 ㅑㅓㅓ0 있다.

[기계적 ㅑㅓㅓ0 무의식]은 ㅑㅓㅓ0 ㅑㅓㅓ0 어린이가 ㅑㅓㅓ0 자신의 ㅑㅓㅓ0 언어를 ㅑㅓㅓ0 배울 ㅑㅓㅓ0 때, 1으y으 혹은 1으y으 1으y으 어린이가 1으y으 자신의 1으y으 1으y으 행위를 1으y으 결정하는 1으y으 특정한 1으y으 코드를 1으y으 배울 1으y으 때, 72jㅐ 그는 72jㅐ 동시에 72jㅐ 자신이 72jㅐ 끼어 72jㅐ 들어간 72jㅐ 사회구조의 72jㅐ 요구들을 72jㅐ 배운다’(베른슈타인)고 72jㅐ 인용한다. 72jㅐ 문법적으로 72jㅐ 올바른 72jㅐ 문장을 72jㅐ 만드는 72jㅐ 것은 72jㅐ 정상적인 72jㅐ 개인에게는 72jㅐ 법칙에 72jㅐ 대한 72jㅐ 완전 72jㅐ 복종의 72jㅐ 전제조건이라는 72jㅐ 것이다. 72jㅐ 그들 72jㅐ 식으로 72jㅐ 말하는 72jㅐ 것은 72jㅐ 그들 72jㅐ 식으로 72jㅐ 생각하는 72jㅐ 것, 히eik 느끼는 히eik 것, o8차p 꿈꾸는 o8차p 것까지 o8차p 따라오게 o8차p 한다. o8차p 그러나 o8차p 사랑처럼 o8차p 언어도 o8차p 독점을 o8차p 요구한다. o8차p o8차p 가지 o8차p 언어를 o8차p 통달해도 o8차p 어느 o8차p 하나를 o8차p 제외한 o8차p 나머지는 o8차p 약화될 o8차p 수밖에 o8차p 없다. o8차p o8차p o8차p o8차p o8차p 떠난 o8차p 고향이 o8차p 그립다고 o8차p 눈물 o8차p 지으면서도 o8차p 정작 o8차p 한국어는 o8차p 잊어버린 o8차p 교포들을 o8차p 종종 o8차p 본다. o8차p 선제하는 o8차p 상징의 o8차p 산물인 o8차p 주체는 o8차p 자유롭지 o8차p 않다. [기계적 o8차p 무의식]은 o8차p 주체성을 o8차p 가지고 o8차p 자유를 o8차p 만들어내는 o8차p 것은 o8차p 아니라고 o8차p 강조한다. o8차p 주체는 o8차p 근대의 o8차p 이상인 o8차p 자율과 o8차p 자유의 o8차p 인간이 o8차p 아니라, ‘생산을 ㅓ나w우 위한 ㅓ나w우 생산, 2r우ㄴ 체계적인 2r우ㄴ 격리차별, ㅓㅑ4타 전면화 ㅓㅑ4타 ㅓㅑ4타 수용소’(가타리) ㅓㅑ4타 등을 ㅓㅑ4타 낳았다.

자유를 ㅓㅑ4타 원하는 ㅓㅑ4타 예술가는 ㅓㅑ4타 ㅓㅑ4타 누구라도 ㅓㅑ4타 구조의 ㅓㅑ4타 우연한 ㅓㅑ4타 결정체에 ㅓㅑ4타 불과한 ㅓㅑ4타 주체를 ㅓㅑ4타 고집할 ㅓㅑ4타 것이 ㅓㅑ4타 아니라, 차u카l 주체를 차u카l 구성하는 차u카l 이질성(몸, 0q자히 무의식)을 0q자히 문제 0q자히 삼아야 0q자히 한다. 0q자히 0q자히 전시의 0q자히 작품에서, 차xcu 종이와 차xcu 펜슬은 차xcu 해부대와 차xcu 칼을 차xcu 연상시키는 차xcu 분석적 차xcu 도구가 차xcu 되기도 차xcu 한다. 차xcu 무념무상의 차xcu 수행적 차xcu 도구가 차xcu 되기도 차xcu 한다. 차xcu 작업은 (재)발견의 차xcu 장이기도 차xcu 하며, 카76아 생성의 카76아 장이기도 카76아 하다. 카76아 자신을 카76아 비춰주는 카76아 거울이 카76아 되는가 카76아 하면 카76아 우주적 카76아 질서에 카76아 대한 카76아 비유가 카76아 되기도 카76아 한다. 카76아 소우주와 카76아 대우주는 카76아 서로를 카76아 비추고 카76아 공명한다. 카76아 종이와 카76아 펜슬은 카76아 그림에 카76아 한정되기 카76아 보다는 카76아 그림을 카76아 포함한 카76아 언어에 카76아 대한 카76아 훈련을 카76아 시작했던 카76아 시기의 카76아 매체로 카76아 주목된다. 카76아 인간이 카76아 되기 카76아 위해 카76아 걸음마 카76아 훈련이 카76아 있다면, 쟏히ㅓ거 손에도 쟏히ㅓ거 그에 쟏히ㅓ거 상응하는 쟏히ㅓ거 단계가 쟏히ㅓ거 있지 쟏히ㅓ거 않겠는가. 쟏히ㅓ거 현대의 쟏히ㅓ거 혁명적 쟏히ㅓ거 정신분석학이 쟏히ㅓ거 지배적 쟏히ㅓ거 구조로의 쟏히ㅓ거 환원보다는 쟏히ㅓ거 탈피와 쟏히ㅓ거 변형을 쟏히ㅓ거 강조하듯이, 가nj거 현대 가nj거 예술 가nj거 또한 가nj거 언어를 가nj거 변화시킬 가nj거 가nj거 있는 가nj거 실험적 가nj거 장으로 가nj거 삼아왔다. 가nj거 그것이 가nj거 예술작품으로 가nj거 간주되든 가nj거 말든 가nj거 간에, pq4ㅓ 언어의 pq4ㅓ 변화는 pq4ㅓ 인간과 pq4ㅓ 세계의 pq4ㅓ 변화를 pq4ㅓ 알리는 pq4ㅓ 징후이다.

pq4ㅓ 전시의 pq4ㅓ 작품들에 pq4ㅓ 선택된 pq4ㅓ 종이와 pq4ㅓ 펜슬이라는 pq4ㅓ 지극히 pq4ㅓ 간소한 pq4ㅓ 매체는 pq4ㅓ 자연스러운 pq4ㅓ 어법에 pq4ㅓ 적합하다. pq4ㅓ 방금 pq4ㅓ pq4ㅓ 꿈을 pq4ㅓ 바로 pq4ㅓ 적어 pq4ㅓ 넣을 pq4ㅓ pq4ㅓ 있는 pq4ㅓ 순발력 pq4ㅓ 있고 pq4ㅓ 융통성 pq4ㅓ 있으며, 히o7가 언제나 히o7가 쉽게 히o7가 접근 히o7가 가능한 히o7가 히o7가 매체는 히o7가 아직 히o7가 분명하지 히o7가 않지만 히o7가 계속적인 히o7가 실행을 히o7가 통해 히o7가 점차 히o7가 분명해질 히o7가 미지의 히o7가 세계를 히o7가 향한다. 히o7가 작품 히o7가 히o7가 다양한 히o7가 굴곡 히o7가 면을 히o7가 가지는 히o7가 펜슬의 히o7가 궤적은 히o7가 몸에서 히o7가 실을 히o7가 빼내는 히o7가 누에나 히o7가 거미 히o7가 같은 히o7가 자연스러움 히o7가 마저 히o7가 보인다. 히o7가 물론 히o7가 예술은 히o7가 자연 히o7가 그자체가 히o7가 아니라 히o7가 의식화된 히o7가 자연이며, 다e9라 다e9라 적절한 다e9라 비유로는 다e9라 언어이다. 다e9라 가장 다e9라 이상적인 다e9라 언어는 다e9라 모국어이다. 다e9라 모국어가 다e9라 우연찮게 다e9라 세계 다e9라 보편 다e9라 언어가 다e9라 다e9라 국가의 다e9라 국민은 다e9라 근대를 다e9라 선점한 다e9라 산업혁명 다e9라 이후의 다e9라 경제적 다e9라 헤게모니를 다e9라 계속 다e9라 유지했다. 다e9라 종이와 다e9라 연필은 다e9라 한국인만 다e9라 사용하는 다e9라 것이 다e9라 아니므로 다e9라 모국어와의 다e9라 비교는 다e9라 다소 다e9라 과장일 다e9라 다e9라 있다. 다e9라 앞서 다e9라 인용한 다e9라 혁명적 다e9라 정신분석학자는 ‘모국어라는 다e9라 다e9라 지역 다e9라 내에서 다e9라 형성된 다e9라 언어의 다e9라 통일성조차 다e9라 항상 다e9라 어떤 다e9라 권력구성체와 다e9라 분리할 다e9라 다e9라 없다’(펠릭스 다e9라 가타리)고 다e9라 본다.

면접을 다e9라 보기 다e9라 위해 다e9라 사투리를 다e9라 교정하거나 다e9라 한국어에 다e9라 대한 다e9라 제 3세계에서의 다e9라 학습 다e9라 열기를 다e9라 생각해 다e9라 보라. 다e9라 한국에서 다e9라 영어 다e9라 학습 다e9라 열기와 다e9라 전혀 다e9라 다르지 다e9라 않다. 다e9라 결국 다e9라 힘의 다e9라 논리는 다e9라 무엇이 다e9라 지배적인 다e9라 언어인가에 다e9라 대한 다e9라 인정의 다e9라 체계를 다e9라 통해서 다e9라 순차적으로 다e9라 재현된다. 다e9라 보편성의 다e9라 탈을 다e9라 다e9라 지배적 다e9라 언어의 다e9라 위력을 다e9라 알고 다e9라 있는 다e9라 다국적 다e9라 기업은 다e9라 기술표준을 다e9라 선점하기 다e9라 위해 다e9라 애쓴다. 다e9라 펠릭스 다e9라 가타리는 ‘자본주의 다e9라 권력은 다e9라 끊임없이 다e9라 세세하게 다e9라 다e9라 기표적 다e9라 관계를 다e9라 재검토 다e9라 한다’고 다e9라 하면서, 가oㅐj 표상과 가oㅐj 권력의 가oㅐj 관계를 가oㅐj 강조한다. 가oㅐj 선택의 가oㅐj 여지없이 가oㅐj 어디엔가 가oㅐj 우연히 가oㅐj 태어나는 가oㅐj 개인에게 가oㅐj 시간과 가oㅐj 자원의 가oㅐj 가능성은 가oㅐj 무한하지 가oㅐj 않다. 가oㅐj 선택과 가oㅐj 집중에는 가oㅐj 정치경제학이 가oㅐj 자리하기 가oㅐj 마련이다. 가oㅐj 여기에 가oㅐj 기계까지 가oㅐj 더해진다. 가oㅐj 요즘 가oㅐj 아이들은 가oㅐj 연필보다는 가oㅐj 전자기기에 가oㅐj 먼저 가oㅐj 친숙해지지만, 하쟏하4 연필과 하쟏하4 종이가 하쟏하4 그때그때 하쟏하4 업그레이드 하쟏하4 시켜줘야 하쟏하4 하는 하쟏하4 기기/상품과 하쟏하4 다른 하쟏하4 점은 하쟏하4 분명하다. 하쟏하4 많은 하쟏하4 이들과의 하쟏하4 협업이 하쟏하4 필요한 하쟏하4 것도 하쟏하4 아니다. 하쟏하4 연필을 하쟏하4 하쟏하4 작가의 하쟏하4 모습에는 하쟏하4 경전을 하쟏하4 필사하는 하쟏하4 수도승처럼 하쟏하4 절대적 하쟏하4 타자와의 하쟏하4 고독한 하쟏하4 대화가 하쟏하4 있을 하쟏하4 뿐이다.

하쟏하4 전시의 하쟏하4 작가들이 하쟏하4 선호하는 하쟏하4 펜슬은 하쟏하4 내향적인 하쟏하4 매체이다. 하쟏하4 그러나 하쟏하4 미디어 하쟏하4 이론가 하쟏하4 마샬 하쟏하4 맥루한이 하쟏하4 미디어의 하쟏하4 역사를 하쟏하4 개괄하면서 하쟏하4 주장하듯, tw8갸 읽고 tw8갸 쓰기에 tw8갸 의해 tw8갸 자의식을 tw8갸 형성했던 tw8갸 내향적인 tw8갸 시대는 tw8갸 지나가고 tw8갸 있다. tw8갸 읽고 tw8갸 쓰기보다 tw8갸 정보검색과 tw8갸 소통이 tw8갸 중시되는 tw8갸 시대에 tw8갸 내향성은 tw8갸 그다지 tw8갸 환영받지 tw8갸 못한다. tw8갸 환영받는 tw8갸 외향성의 tw8갸 내용을 tw8갸 내향성이 tw8갸 만들어줘야 tw8갸 함에도 tw8갸 불구하고 tw8갸 말이다. tw8갸 필사 tw8갸 tw8갸 인쇄문화의 tw8갸 시대에 tw8갸 내향성은 tw8갸 논리정연한 tw8갸 지식인을 tw8갸 낳기도 tw8갸 했지만, ㅓcㄴ하 점차 ㅓcㄴ하 희귀해지고 ㅓcㄴ하 금기시 ㅓcㄴ하 된다. ㅓcㄴ하 금기 ㅓcㄴ하 위반의 ㅓcㄴ하 충동을 ㅓcㄴ하 강조했던 ㅓcㄴ하 바타유라면 ㅓcㄴ하 내밀성이라고 ㅓcㄴ하 표현했을 ㅓcㄴ하 이질적 ㅓcㄴ하 지향은 ㅓcㄴ하 누군가는 ㅓcㄴ하 범죄로, 하o거m 누군가는 하o거m 예술로 하o거m 부를 하o거m 아방가르드의 하o거m 역사에 하o거m 선명하다. 하o거m 보다 하o거m 지배적 하o거m 언어는 하o거m 고속도로 하o거m 같은 하o거m 비유로 하o거m 제시된다. 하o거m 그렇지만 하o거m 각자의 하o거m 언어와 하o거m 문법으로 하o거m 말해야 하o거m 하는 하o거m 과제를 하o거m 안고 하o거m 있는 하o거m 작가에게는 하o거m 최대한 하o거m 이물감 하o거m 없는 하o거m 매체가 하o거m 필수적이다. 하o거m 자기의 하o거m 언어로 하o거m 만들기 하o거m 위해 하o거m 과도하게 하o거m 요구되는—체계는 하o거m 쓸데없는 하o거m 진입장벽을 하o거m 높이 하o거m 세우곤 하o거m 한다--훈련은 하o거m 장애가 하o거m 하o거m 수도 하o거m 있다.

작가에 하o거m 따라서는 하o거m 미술대학에 하o거m 가기/다니기 하o거m 위해 하o거m 배운 하o거m 것을 하o거m 애써 하o거m 잊어야만 하o거m 하는 하o거m 씁쓸한 하o거m 선택을 하o거m 하기도 하o거m 한다. 하o거m 작가와 하o거m 작품 하o거m 사이에 하o거m 끼어드는 하o거m 것(기구, u하wz 제도 u하wz 등)이 u하wz 많을수록 u하wz 본질은 u하wz 희미해진다. u하wz 현대의 u하wz 관료주의는 u하wz 본질을 u하wz 잊고 u하wz 형식을 u하wz 본질화 u하wz 하는 u하wz 대표적인 u하wz 방식이다. u하wz 분업이 u하wz 촉구하는 u하wz 분과과학은 u하wz 형식주의로 u하wz 흐른다. u하wz 언어를 u하wz 과학의 u하wz 단계까지 u하wz 정련했다는 u하wz 현대철학의 u하wz u하wz 사조는 u하wz 본질에 u하wz 대해 u하wz 생각하고 u하wz 말하는 u하wz 것조차 u하wz 형이상학이라고 u하wz 비판한다. u하wz 이러한 u하wz 부당한 u하wz 배제는 u하wz 본질을 u하wz 문제 u하wz 삼는 u하wz 예술을 u하wz 유령화 u하wz 한다. u하wz 그러나 u하wz 유령은 u하wz 편재한다. u하wz 체계를 u하wz 지시할 u하wz 뿐인 u하wz 체계의 u하wz 공허함과 u하wz 가혹함을 u하wz 마주할 u하wz 때마다 u하wz 사람들은 u하wz 자기 u하wz 주도적인 u하wz 어떤 u하wz 소박하거나 u하wz 야심찬 u하wz 활동을 u하wz 꿈꾸는데, eㅐ거나 이때 eㅐ거나 예술은 eㅐ거나 오래된 eㅐ거나 미래의 eㅐ거나 가치로 eㅐ거나 재발견될 eㅐ거나 것이다. eㅐ거나 eㅐ거나 전시의 eㅐ거나 작품들에서 eㅐ거나 종이와 eㅐ거나 펜슬은 eㅐ거나 여러 eㅐ거나 미술도구 eㅐ거나 중의 eㅐ거나 하나가 eㅐ거나 아니다. eㅐ거나 eㅐ거나 작품들은 eㅐ거나 펜슬이 eㅐ거나 본질의 eㅐ거나 탐구에 eㅐ거나 있어 eㅐ거나 매력적인 eㅐ거나 선택지가 eㅐ거나 eㅐ거나 eㅐ거나 있음을 eㅐ거나 보여준다. eㅐ거나 그것은 eㅐ거나 관객과의 eㅐ거나 거리도 eㅐ거나 단축시켜준다. eㅐ거나 관객도 eㅐ거나 종이와 eㅐ거나 펜슬이 eㅐ거나 주는 eㅐ거나 감각을 eㅐ거나 알고 eㅐ거나 있기 eㅐ거나 때문이다.

참여작가: eㅐ거나 김범중, 다h다b 문기전, qd갸g 박미현, 3s카n 표영실

출처: 3s카n 갤러리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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