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미 데이터는 저장매체의 용량을 맞추기 위해 끼워 넣는 의미 없는 파일이다. 이는 구현되지 않을 수도, 개발자가 숨겨진 요소일 수도, 다음 업데이트에 쓸 데이터를 미리 넣어둔 것일 수도 있다. 나아가 버그로 나와서는 안 될 데이터가 나오는 경우도 더미 데이터로 지칭한다.
우리는 본 전시를 하나의 게임팩으로 상정하고 작품이라는 유의미한 데이터를 일정 기간 구동한다. 이곳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불명확한 요소들이 충돌하며 생긴 버그를 디버깅1)하는 실험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전시 서문 중)
김채원
김채원은 적막감 속에서 시작되는 공허함과 그 외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바탕으로 비단 위에 채색한다. 특히 적막 속에서 마주친 대상의 연약한 외관에 주목해 심상을 투영하는데, 이때 허무함이 발생한다. 촉발되는 감정을 포착하며 흐름에 맡기기도 하는 한편, 응축된 감정을 흰색의 주름진 형상과 느슨한 장막처럼 드리워지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행위는 불안, 허무, 상실을 곱씹어 반추하는 거울이 된다. 작품 <흐르고, 고이고>는 내밀한 감정의 흔적과 초상으로 남아 언어화할 수 없는 미세한 감각과 정동을 수집하고 발견한다.
이유민
이유민은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 사이의 작업을 하고 있다. 주재료인 한지를 염색해 불에 그슬려 형태를 구체화하여 작가 특유의 산뜻한 조형 언어로 배치한다. <사랑을 전해요> 작업은 부모님이 손수 만든 우체통이 더 이상 사적인 소유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으로 환원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작업은 우체통이 봄마다 박새가 알을 품는 장소로 탈바꿈한 장면을 포착한다. <ꢂ +ꢂ = ꩓> 혹은 <사랑의 모양>과 <오래된 촛대> 역시 사물에 담긴 개인적인 추억에서 출발한다. 콜라주 조각들은 ‘사랑’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 자연과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으로 나아간다.
이정빈
이정빈은 모든 자연의 생명체들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생명력‘에 관심을 가진다. 자손 번식, 세포 분열 및 성장 현상도 생명력 표현의 일환이라고 보았고, 그중 개체가 끊임없이 반복하여 증식해가는 상태, 특히 산호초의 반복 형태에 주목한다. 산호초는 지구상 가장 거대한 생물학적 구조물이며 바다의 순환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작은 산호 폴립들이 반복되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질서를 이루는 모습을 도자 화병으로 표현한다. <Coral vase>시리즈에서는 버블산호가 조류에 의해 흔들려 퍼지기도 했다가 다시 움츠러드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특히 비교적 움직임이 적은 버블산호의 특징을 참고하였다.
이주혜
이주혜 작가는 연약하면서도 굉장히 견고해 보이는 형상에 끌린다. 작업들은 세심한 관찰과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표현된다.면과 면이 맞닿는 찰나를 드러내는 이 작업은 예리한 쾌미를 전달한다. 우리의 삶은 퍼져있는 수많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연결하는 과정을 품고 있다. 어쩌다 과거와 현재의 순간들이 우연히 연결되어 아! 하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간직하고 있었던 의문의 답을 찾는 순간 우리는 묘한 쾌를 느낀다. 우리에게 다가온 깨달음은 갑자기 온 깨달음이 아닌 오랜 시간과 예리하게 낚아챈 노력의 깨달음이다. 우리 삶의 순간들을 나무의 면으로 비유하여 맞닿는 찰나를 향하여 쾌를 목표로 갖는다. 이 과정은 아슬아슬한 우연성이 고요하게 순간의 찰나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예민한 기쁨이 된다.
이한나
이한나는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 혹은 상황을 설정하고 살아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감정, 감당해야하는 상황속에 놓인 존재에 주목한다. 작가에게 물은 감각하는 시간의 속도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물질이다. 다이빙 시리즈는 진득한 감정의 농도를 녹이려 물로 뛰어드는 행위를 담는다. 그 중 <물살>은 다이빙 후 던져진 곳으로부터 나아가는 의지적 행동을 표출한다. 물로 뛰어든 것을 반증하듯 퍼지는 물보라와 물결, 그리고 이에 감싸진 인체는 포근하지만 죽음이 연상되는 감각들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위태로우면서도 자유롭게 나아간다. 더불어 다이빙은 부정적인 어떤 것들을 잃게 할 수 있는 행위로도 읽힐 수 있으며, 작가는 ‘물살’에 본인이 얻고 싶은 상실과 자유,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전서영
전서영의 작업은 ‘먼 미래에 21세기 토우가 발견된다면 어떤 모양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라와 시기에 따라 생김새와 특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고대인들은 삶의 풍요와 종족 보존의 기원, 그리고 사후 세계를 위해 토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염원과 소망, 그리고 관심사는 무엇일까? 전서영은 <우주인 화병>을 통해 21세기의 관심사를 재치 있게 표현한다. 교류의 망을 넓히려는 인간의 탐험 본능, 최첨단의 기술이 드는 우주산업과 그 과정에서 얻는 기술, 특히 인간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한 인공위성의 중요성,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비례하여 발생하는 우주 쓰레기 문제 등을 우주비행사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정성아
정성아는 디지털 화상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을 도자 오브제로 표현해 ‘유쾌한 이질감’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2.5>는 2D와 3D의 중간, 그 어디 즈음에 기반하여 호족반을 표현한다. 호족반은 소반의 다리가 호랑이 다리와 같은 모양을 하여 호족반으로 불렸는데, 주로 궁궐과 상류 가정에서 사용되어 장식성이 높고 다리 곡률의 변화율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관념적인(혹은 보편적인) 이미지로 접하는 익숙한 존재들이 차원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나타내며, 가상 세계 속의 평면적 형식과 실재하는 입체 형태의 조화를 보여준다. 보는 이에게는 묘한 괴리감과 이상하고도 재밌는 호기심을 유발하여 일상의 무료함을 환기하고 이색적인 즐거움을 유발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지현주
지현주 작가는 날마다 생기는 메모들을 기록하는 매체로 오브제를 디자인하는 작업을 했으며, 과거의 기억 속에서 놀이를 가져와 기능을 가진 사물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기록을 쉽게 어디서든 하기 위해서는 자판이 필요하여 현대인들은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키보드, 자판과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 착안하여 매일 만지는 키보드 자판에 도자기를 투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작가는 기록을 하는 메모장이 말풍선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금속 재질 풍선의 이미지와 물성을 가져와 오브제를 디자인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기록을 하는 직접적인 매체가 되는 키캡을 금속 재질 풍선의 형태를 모티브로 재구성하여 다시 키보드를 제작했다. 이 작업은 실제로 사용 가능하며 오브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허수정
허수정은 시간이 흐르며 옅어지는 소중한 추억과 기억을 껴안는다. 작가의 죽전 집에는 큰 장롱이 네 개가 있는데, 어렸을 적 그 장롱 속 이불더미 위에서 놀다가 이불을 쏟아내 혼이 나기 일쑤였다. 이제는 누구도 이불 위에서 놀거나 이불을 쏟아내지 않지만, 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 이불더미를 장롱에 쌓아두고 계신다. <다다익선 IV>는 작가의 죽전 집에 있던 장롱 속 이불을 모티브로 작업한 것으로, 겹겹이 올라간 선들은 유년 시절 가족과 보냈던 시간에 관한 기억을 뜻한다. 작가는 죽전 집에 가면 언제든지 자신을 반겨줄 이불 더미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아끼고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글/송윤주, 송효진, 신혜진, 이진선
1) 디버깅(Debugging):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단계 중에 발생하는 시스템의 논리적인 오류나 비정상적 연산(버그)을 찾아내고 수정하는 작업 과정이다.
참여작가: 김채원, 이유민, 이정빈, 이주혜, 이한나, 전서영, 정성아, 지현주, 허수정
공동기획: 송윤주, 송효진, 신혜진, 이진선
Sept. 6, 2023 ~ Feb. 25,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