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아트랩대전 : 노형규

이응노미술관

May 3, 2022 ~ May 24, 2022

나를 zuㅓㅓ 태워 zuㅓㅓ 버리다
이선영(미술평론가)

타원형 zuㅓㅓ 화면 zuㅓㅓ 안에 zuㅓㅓ 파도가 zuㅓㅓ 치고 zuㅓㅓ 있고 zuㅓㅓ zuㅓㅓ 한가운데 zuㅓㅓ zuㅓㅓ 모양의 zuㅓㅓ 실루엣을 zuㅓㅓ zuㅓㅓ 인간이 zuㅓㅓ zuㅓㅓ 있다. zuㅓㅓ 크기는 zuㅓㅓ 작지만 zuㅓㅓ 마치 zuㅓㅓ 씨앗처럼 zuㅓㅓ 노형규의 zuㅓㅓ 작품을 zuㅓㅓ 이해하는 zuㅓㅓ 시작으로 zuㅓㅓ 적절하다. zuㅓㅓ 신화 zuㅓㅓ zuㅓㅓ 미의 zuㅓㅓ 여신이 zuㅓㅓ 파도의 zuㅓㅓ 거품에서 ‘자연스럽게’ zuㅓㅓ 태어났다면, ㅓauz 서사성이 ㅓauz 강한 ㅓauz 작품들을 ㅓauz 이끌어가는 ㅓauz ㅓauz 남성 ㅓauz 주인공은 ㅓauz 파도와 ㅓauz 맞선 ㅓauz 불의 ㅓauz 인간이다. ㅓauz 싸움이라고 ㅓauz 하기에는 ㅓauz 상대가 ㅓauz 되지 ㅓauz 않지만, 타1l차 외력도 타1l차 막강하고 타1l차 직립한 타1l차 존재의 타1l차 의지도 타1l차 강고해서 타1l차 긴장감이 타1l차 느껴지는 타1l차 구도다. 타1l차 아래를 타1l차 향하는 타1l차 물이나 타1l차 위를 타1l차 향하는 타1l차 불은 타1l차 타1l차 물리적 타1l차 양태 타1l차 만큼이다 타1l차 상극이다. 타1l차 노형규의 타1l차 작품에서 타1l차 물과 타1l차 불은 타1l차 불가항력적으로 타1l차 다가오는 타1l차 외부의 타1l차 힘과 타1l차 이에 타1l차 맞서는 타1l차 주체로, ㄴㅐㅈㅓ 짝패를 ㄴㅐㅈㅓ 이룬다. ㄴㅐㅈㅓ ㄴㅐㅈㅓ 다른 ㄴㅐㅈㅓ 작품에서 ㄴㅐㅈㅓ 인간과 ㄴㅐㅈㅓ 파도의 ㄴㅐㅈㅓ 만남은 ㄴㅐㅈㅓ 파국적이다. ㄴㅐㅈㅓ 여기에서 ㄴㅐㅈㅓ 인간에 ㄴㅐㅈㅓ 비해 ㄴㅐㅈㅓ 압도적인 ㄴㅐㅈㅓ 파도는 ㄴㅐㅈㅓ 단순한 ㄴㅐㅈㅓ 물이 ㄴㅐㅈㅓ 아니라 ‘나를 ㄴㅐㅈㅓ 덮는 ㄴㅐㅈㅓ 무언가’이다. ㄴㅐㅈㅓ 화면을 4개로 ㄴㅐㅈㅓ 분할한 ㄴㅐㅈㅓ 작품에서 ㄴㅐㅈㅓ 푸른 ㄴㅐㅈㅓ 파도는 ㄴㅐㅈㅓ 빛을 ㄴㅐㅈㅓ 받거나 ㄴㅐㅈㅓ 타오르는 ㄴㅐㅈㅓ 상징들과 ㄴㅐㅈㅓ 나란히 ㄴㅐㅈㅓ 하면서, d자다u 대조적인 d자다u 상징군을 d자다u 도해한다. d자다u 작가는 d자다u 물질적 d자다u 상상력을 d자다u 발휘한다. d자다u 바슐라르에 d자다u 의해 d자다u 유명해진 ‘물질적 d자다u 상상력’은 d자다u 상징이라는 d자다u 관념을 d자다u 시각화하기에 d자다u 용이한 d자다u 면이 d자다u 있다.

노형규의 d자다u 상징체계에서 d자다u 파도는 d자다u 그의 d자다u d자다u 다른 d자다u 중요한 d자다u 도상인 d자다u 소금 d자다u 조각상과 d자다u 연결고리를 d자다u 가진다. d자다u 파도가 d자다u 맡는 d자다u 악역과 d자다u 달리, 사갸el 소금은 사갸el 빛과 사갸el 함께 사갸el 사갸el 필요한 사갸el 요소로 사갸el 간주 사갸el 된다. 사갸el 작품 사갸el 사갸el 소금기둥은 사갸el 무엇인가를 사갸el 둘러쓴 사갸el 인간의 사갸el 모습이 사갸el 연상된다. 사갸el 보호와 사갸el 속박을 사갸el 동시에 사갸el 의미하는 사갸el 전통의상처럼 사갸el 소금기둥은 사갸el 어떤 사갸el 잠재성을 사갸el 품은 사갸el 수수께끼다. 사갸el 이번 사갸el 전시에서 사갸el 그림 사갸el 사갸el 소금기둥은 사갸el 조각 사갸el 형태로도 사갸el 구현되어 사갸el 전시장에 사갸el 설치된다. 사갸el 불로 사갸el 단련된 사갸el 소금은 사갸el 견고함을 사갸el 획득한다. 사갸el 그의 사갸el 작품에서 사갸el 불은 사갸el 금기처럼 사갸el 양면적이다. 사갸el 불은 사갸el 자신을 사갸el 뒤덮는 사갸el 외적 사갸el 부자유스러움을 사갸el 태우며 사갸el 스스로의 사갸el 순수함을 사갸el 지키기 사갸el 위한 사갸el 무기이자 사갸el 사갸el 못지않게 사갸el 모든 사갸el 것을 사갸el 삼켜버릴 사갸el 사갸el 있다. 사갸el 하지만 사갸el 노형규의 사갸el 작품에 사갸el 작동하는 사갸el 상징체계에서 사갸el 불은 사갸el 자체 사갸el 발생적이고 사갸el 물은 사갸el 외부의 사갸el 힘에 사갸el 가깝다. 사갸el 그에 사갸el 의하면 ‘물은 사갸el 사갸el 안의 사갸el 뜨거운 사갸el 것을 사갸el 식히는 사갸el 것’이자 ‘타협’이다. 사갸el 유기체의 사갸el 모든 사갸el 생리적 사갸el 과정은 사갸el 일종의 사갸el 연소이기도 사갸el 하다.

모든 사갸el 기호가 사갸el 그렇듯이 사갸el 기의와의 사갸el 관계는 사갸el 자의적이어서, 타다h자 누군가는 타다h자 물과 타다h자 불의 타다h자 관계를 타다h자 반대로 타다h자 생각할 타다h자 수도 타다h자 있는 타다h자 것이다. 타다h자 불에 타다h자 대한 타다h자 생각은 타다h자 개인적 타다h자 이력과 타다h자 관련된다. 타다h자 어릴 타다h자 타다h자 부친의 타다h자 공장에 타다h자 불이 타다h자 나서 타다h자 집안이 타다h자 망할 타다h자 지경이 타다h자 되었는데, ㄴ아파ㅐ 화전(火田)농법을 ㄴ아파ㅐ 통해 ㄴ아파ㅐ 재기한 ㄴ아파ㅐ 것이다. ㄴ아파ㅐ 작가에게 ㄴ아파ㅐ 불은 ㄴ아파ㅐ ㄴ아파ㅐ 상처를 ㄴ아파ㅐ 주었지만 ㄴ아파ㅐ 극복도 ㄴ아파ㅐ 가능하게 ㄴ아파ㅐ 했다. ㄴ아파ㅐ 노형규의 ㄴ아파ㅐ 작품에서 ㄴ아파ㅐ 물/불의 ㄴ아파ㅐ 상징은 ㄴ아파ㅐ 다양한 ㄴ아파ㅐ 상황 ㄴ아파ㅐ 속에서 ㄴ아파ㅐ 변주되어 ㄴ아파ㅐ 끝없이 ㄴ아파ㅐ 이어지는 ㄴ아파ㅐ 주체의 ㄴ아파ㅐ 드라마를 ㄴ아파ㅐ 쓰게 ㄴ아파ㅐ 했다. ㄴ아파ㅐ 불은 ㄴ아파ㅐ 희생, 라라5ㅐ 해방, 마u3n 자유 마u3n 등을 마u3n 상징하며, ㅐ으0ㅐ 불이 ㅐ으0ㅐ 개입돼야 ㅐ으0ㅐ 하는 ㅐ으0ㅐ 부정적 ㅐ으0ㅐ 상황은 ㅐ으0ㅐ 대개 ㅐ으0ㅐ 막에 ㅐ으0ㅐ 감싸여져 ㅐ으0ㅐ 있다. ㅐ으0ㅐ 막은 ㅐ으0ㅐ 진리를 ㅐ으0ㅐ 감추는 ㅐ으0ㅐ 방해물이다. ㅐ으0ㅐ 가령 ㅐ으0ㅐ 그의 ㅐ으0ㅐ 작품에 ㅐ으0ㅐ 종종 ㅐ으0ㅐ 등장하는 ㅐ으0ㅐ 새는 ㅐ으0ㅐ 막에 ㅐ으0ㅐ 둘러싸여 ㅐ으0ㅐ 있거나 ㅐ으0ㅐ ㅐ으0ㅐ 속에 ㅐ으0ㅐ 있어서 ㅐ으0ㅐ 날아오르지 ㅐ으0ㅐ 못한 ㅐ으0ㅐ 상태로 ㅐ으0ㅐ 나타나곤 ㅐ으0ㅐ 한다. ㅐ으0ㅐ 조각가가 ㅐ으0ㅐ ㅐ으0ㅐ 속에서 ㅐ으0ㅐ 새의 ㅐ으0ㅐ 형태를 ㅐ으0ㅐ 꺼내줘야 ㅐ으0ㅐ 새는 ㅐ으0ㅐ 자유로울 ㅐ으0ㅐ ㅐ으0ㅐ 있다. ㅐ으0ㅐ 바닥에 ㅐ으0ㅐ 쓰러진 ㅐ으0ㅐ 새는 ‘자유로워야 ㅐ으0ㅐ 하나 ㅐ으0ㅐ 무언가로 ㅐ으0ㅐ 덮혀 ㅐ으0ㅐ 그럴 ㅐ으0ㅐ ㅐ으0ㅐ 없는 ㅐ으0ㅐ 상황은 ㅐ으0ㅐ ㅐ으0ㅐ 속의 ㅐ으0ㅐ 새와 ㅐ으0ㅐ 같이 ㅐ으0ㅐ 스스로 ㅐ으0ㅐ 아무것도 ㅐ으0ㅐ ㅐ으0ㅐ ㅐ으0ㅐ 없었던 ㅐ으0ㅐ 나를 ㅐ으0ㅐ 대변’ ㅐ으0ㅐ 한다. ㅐ으0ㅐ 새는 ㅐ으0ㅐ 다른 ㅐ으0ㅐ 작품에서 ㅐ으0ㅐ 자유롭게 ㅐ으0ㅐ 날아가기도 ㅐ으0ㅐ 한다. ㅐ으0ㅐ 종교적 ㅐ으0ㅐ 맥락에서 ㅐ으0ㅐ 자유는 ㅐ으0ㅐ 자의나 ㅐ으0ㅐ 방종이 ㅐ으0ㅐ 아니라 ㅐ으0ㅐ 해방의 ㅐ으0ㅐ 서사와 ㅐ으0ㅐ 관련 ㅐ으0ㅐ 있다.

종교학자 ㅐ으0ㅐ 미르치아 ㅐ으0ㅐ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ㅐ으0ㅐ 시간; ㅐ으0ㅐ 원형과 ㅐ으0ㅐ 반복]에서 ‘믿기만 ㅐ으0ㅐ 하면 ㅐ으0ㅐ 그대로 ㅐ으0ㅐ ㅐ으0ㅐ ㅐ으0ㅐ 것이다’(마가복음)라는 ㅐ으0ㅐ 성경의 ㅐ으0ㅐ 말씀을 ㅐ으0ㅐ 인용하면서, 1거라ㅐ 믿음이란 1거라ㅐ 온갖 1거라ㅐ 종류의 1거라ㅐ 자연법칙으로부터의 1거라ㅐ 절대적인 1거라ㅐ 해방을 1거라ㅐ 의미하고, 나ㅓ타ㅓ 결과적으로 나ㅓ타ㅓ 인간이 나ㅓ타ㅓ 상상할 나ㅓ타ㅓ 나ㅓ타ㅓ 있는 나ㅓ타ㅓ 최상의 나ㅓ타ㅓ 자유, 마w2가 우주의 마w2가 존재론적인 마w2가 규약에 마w2가 개입할 마w2가 마w2가 있는 마w2가 자유를 마w2가 의미한다고 마w2가 말한다. 마w2가 요컨대 마w2가 믿음은 마w2가 탁월하게 마w2가 창조적인 마w2가 자유이다. 마w2가 엘리아데에 마w2가 의하면 마w2가 자신의 마w2가 원천과 마w2가 보증과 마w2가 근거를 마w2가 마w2가 안에서 마w2가 발견하는 마w2가 자유만이 마w2가 현대인을 마w2가 역사의 마w2가 폭압으로부터 마w2가 지켜줄 마w2가 마w2가 있다. 마w2가 인간은 마w2가 신의 마w2가 존재를 마w2가 전제할 마w2가 때만, 우m우5 한편으로는 우m우5 자유(자유는 우m우5 법칙이 우m우5 지배하는 우m우5 우주에서 우m우5 인간에게 우m우5 자율성을 우m우5 부여해준다. 우m우5 혹은 우m우5 인간으로 우m우5 하여금 우m우5 우주 우m우5 안에 우m우5 새롭고 우m우5 독특한 우m우5 존재 우m우5 양태를 우m우5 창시할 우m우5 우m우5 있게 우m우5 해준다)를 우m우5 획득하면서 우m우5 다른 우m우5 한편으로는 우m우5 역사의 우m우5 모든 우m우5 비극에 우m우5 초역사적인 우m우5 의미가 우m우5 있다는 우m우5 확신을 우m우5 얻을 우m우5 우m우5 있다는 우m우5 것이다. 우m우5 막이 우m우5 태워지면 우m우5 우m우5 내용물도 우m우5 사라질 우m우5 우m우5 있으나 우m우5 불새의 우m우5 신화처럼 우m우5 부활할 우m우5 수도 우m우5 있다.

막은 우m우5 인간도 우m우5 덮는다. 우m우5 특히 우m우5 자신을 우m우5 부자유스럽게 우m우5 한다. 우m우5 작가에 우m우5 의하면 ‘덮인 우m우5 것은 우m우5 마치 우m우5 의복과 우m우5 같은 우m우5 역할을 우m우5 하여 우m우5 본래의 우m우5 자신을 우m우5 가리는 우m우5 동시에 우m우5 획일화 우m우5 시킨다’ 우m우5 사회에 우m우5 의해 우m우5 획일화된 우m우5 부자유스러운 우m우5 주체와 우m우5 해방된 우m우5 주체의 우m우5 대립이다. 우m우5 분신처럼 우m우5 둘이 우m우5 함께 우m우5 등장하여 우m우5 앞서거니 우m우5 뒷서거니 우m우5 하는 우m우5 이들은 우m우5 빛과 우m우5 그림자처럼 우m우5 분열적 우m우5 상황을 우m우5 나타낸다. 우m우5 노형규의 우m우5 작품에는 우m우5 태우는 우m우5 자와 우m우5 타는 우m우5 자가 우m우5 있으며 우m우5 이들은 우m우5 동일인이다. 우m우5 야곱과 우m우5 싸우는 우m우5 천사라는 우m우5 기독교적 우m우5 도상이 우m우5 있는 우m우5 작품도 우m우5 그러하듯, 기k4으 해방과 기k4으 자유를 기k4으 위한 기k4으 주체의 기k4으 싸움은 기k4으 여러 기k4으 작품에서 기k4으 나타난다. 기k4으 그러한 기k4으 싸움은 기k4으 얼마나 기k4으 치열한지 기k4으 화장 기k4으 기k4으 남은 기k4으 사리에서 기k4으 영감을 기k4으 받은 기k4으 기k4으 작품은 기k4으 괴물같이 기k4으 울뚝불뚝한 기k4으 모습이다. 기k4으 사람은 기k4으 사라져도 기k4으 그의 기k4으 고집스러운 기k4으 의지는 기k4으 기k4으 흔적을 기k4으 남긴다. 기k4으 사리 기k4으 또는 기k4으 불을 기k4으 암시하는 기k4으 소재이다. 기k4으 새, 자1ㅐs 떨기나무 자1ㅐs 같은 자1ㅐs 자연물은 자1ㅐs 물론 자1ㅐs 자1ㅐs 자신까지 자1ㅐs 구속을 자1ㅐs 상징하는 자1ㅐs 막에 자1ㅐs 둘러싸여 자1ㅐs 있으며, ㅓ7uc 이를 ㅓ7uc 극복하는 ㅓ7uc 행위가 ㅓ7uc 바로 ㅓ7uc 태우는 ㅓ7uc 것이다.

작은 ㅓ7uc 드로잉도 ㅓ7uc 포함되어 ㅓ7uc 있는 ㅓ7uc 이번 ㅓ7uc 전시에서 ㅓ7uc 대작에 ㅓ7uc 해당하는 ㅓ7uc 떨기나무는 ㅓ7uc 성경의 ㅓ7uc 이야기를 ㅓ7uc 차용한 ㅓ7uc 것으로, zgz6 나뭇가지의 zgz6 자연스러운 zgz6 형태를 zgz6 방해하는 zgz6 막이 zgz6 가지 zgz6 끝으로부터 zgz6 타오르는 zgz6 중이다. zgz6 나무가 zgz6 타면서 zgz6 아래에 zgz6 떨어뜨리는 zgz6 둥근 zgz6 반영은 zgz6 마치 zgz6 무대 zgz6 조명처럼 zgz6 어두운 zgz6 세상을 zgz6 환하게 zgz6 비춘다. zgz6 태우기에는 zgz6 오래된 zgz6 신화 zgz6 종교적 zgz6 관념에 zgz6 내재하는 zgz6 정화의 zgz6 의식은 zgz6 물론 zgz6 만능의 zgz6 힘을 zgz6 갖춘 zgz6 대중문화의 zgz6 슈퍼 zgz6 히어로를 zgz6 닮았다. zgz6 작가는 ‘스스로 zgz6 태울 zgz6 zgz6 없는 zgz6 상황에 zgz6 직면했을 zgz6 zgz6 누군가 zgz6 나를 zgz6 태워줬으면 zgz6 좋겠다는 zgz6 생각이 zgz6 들었다’고 zgz6 말한다. zgz6 그렇게 zgz6 다시 zgz6 탄생한 zgz6 영웅은 zgz6 다른 zgz6 사람도 zgz6 도와줄 zgz6 zgz6 있다는 zgz6 것이다. zgz6 그것은 zgz6 종교와 zgz6 예술, 라라pㄴ 그리고 라라pㄴ 대중문화, ㅓbㅓ기 때로는 ㅓbㅓ기 정치에 ㅓbㅓ기 관통하는 ㅓbㅓ기 서사다. ‘창작 ㅓbㅓ기 혼을 ㅓbㅓ기 불사른다’는 ㅓbㅓ기 관용적 ㅓbㅓ기 표현이 ㅓbㅓ기 있을 ㅓbㅓ기 만큼, 으rh가 예술적 으rh가 작업 으rh가 또한 으rh가 자신을 으rh가 불태운다. 으rh가 작업은 으rh가 작가의 으rh가 변신을 으rh가 닦달하는 으rh가 과정이다. 으rh가 작업을 으rh가 통해서 으rh가 의미심장한 으rh가 변신할 으rh가 으rh가 있는 으rh가 이가 으rh가 바로 으rh가 작가다. 으rh가 죽음을 으rh가 통한 으rh가 재탄생은 으rh가 작가의 으rh가 종교에서 으rh가 면면히 으rh가 흐르는 으rh가 메시지다. 으rh가 젊은 으rh가 작가다 으rh가 보니 으rh가 초월적인 으rh가 승화보다는 으rh가 치열한 으rh가 고난에 으rh가 초점이 으rh가 맞춰져 으rh가 있다.

어둠은 으rh가 빛의 으rh가 조건이어서 으rh가 그럴 으rh가 수도 으rh가 있고, f가4ㅈ 작가의 f가4ㅈ 종교관에 f가4ㅈ 내재한 f가4ㅈ 부분일 f가4ㅈ 수도 f가4ㅈ 있다. [영원회귀의 f가4ㅈ 시간; f가4ㅈ 원형과 f가4ㅈ 반복]은 f가4ㅈ 고대의 f가4ㅈ 종교관과 f가4ㅈ 비교하여 f가4ㅈ 기독교의 f가4ㅈ 가장 f가4ㅈ f가4ㅈ 장점은 f가4ㅈ 고통에 f가4ㅈ 의미를 f가4ㅈ 부여한 f가4ㅈ 것이라고 f가4ㅈ 평가한다. f가4ㅈ 엘리아데에 f가4ㅈ 의하면, 하v54 고통이 하v54 지닌 하v54 구원의 하v54 능력 하v54 덕분에 하v54 기독교가 하v54 고통에 하v54 가치를 하v54 부여하고 하v54 나아가 하v54 고통을 하v54 추구하기까지 하v54 한다. 하v54 엘리아데 하v54 의하면 하v54 히브리인들은 하v54 역사상의 하v54 재난이 하v54 닥칠 하v54 때마다 하v54 이를 하v54 선택받은 하v54 민족이 하v54 죄악의 하v54 구렁텅이에 하v54 빠져버린 하v54 것에 하v54 진노한 하v54 야훼의 하v54 징벌이라고 하v54 생각한다. 하v54 유대민족의 하v54 신은 하v54 원형적인 하v54 행위들을 하v54 창조한 하v54 동방의 하v54 신과는 하v54 달리, m기f카 끊임없이 m기f카 역사에 m기f카 개입하고 m기f카 사건들을 m기f카 통해 m기f카 자신의 m기f카 의지를 m기f카 드러내는 m기f카 하나의 m기f카 인격이라는 m기f카 것이다. m기f카 노형규의 m기f카 작업은 m기f카 개인사의 m기f카 차원에 m기f카 존재하는 m기f카 신의 m기f카 현현 m기f카 또는 m기f카 현존과 m기f카 비교할 m기f카 m기f카 있다.  m기f카 재생과 m기f카 부활에 m기f카 대한 m기f카 관념도 m기f카 비슷하다. m기f카 불태워버리는 m기f카 것은 ‘시간을 m기f카 폐기함으로서 m기f카 주기적으로 m기f카 갱신될 m기f카 필요성’(엘리아데)을 m기f카 내포한다.

청년기를 m기f카 거치면서 m기f카 그가 m기f카 통과해야 m기f카 했던 m기f카 의례, ㅐㅐㅈ라 ㅐㅐㅈ라 통과제의는 ‘제의적인 ㅐㅐㅈ라 죽음과 ㅐㅐㅈ라 부활을 ㅐㅐㅈ라 내포하는 ㅐㅐㅈ라 새로운 ㅐㅐㅈ라 탄생’(엘리아데)이다. ㅐㅐㅈ라 이를 ㅐㅐㅈ라 통한 ㅐㅐㅈ라 쇄신은 ㅐㅐㅈ라 주체뿐 ㅐㅐㅈ라 아니라 ㅐㅐㅈ라 예술의 ㅐㅐㅈ라 조건이다. ㅐㅐㅈ라 원초적 ㅐㅐㅈ라 혼돈을 ㅐㅐㅈ라 표상하는 ㅐㅐㅈ라 궂은 ㅐㅐㅈ라 날씨의 ㅐㅐㅈ라 하늘과 ㅐㅐㅈ라 바다는 ㅐㅐㅈ라 싸움 ㅐㅐㅈ라 속에서 ㅐㅐㅈ라 탄생하는 ㅐㅐㅈ라 주체를 ㅐㅐㅈ라 둘러싸고 ㅐㅐㅈ라 있다. ㅐㅐㅈ라 물과 ㅐㅐㅈ라 바람 ㅐㅐㅈ라 속에서도 ㅐㅐㅈ라 흔들리지 ㅐㅐㅈ라 않고 ㅐㅐㅈ라 불타오르는 ㅐㅐㅈ라 주체는 ㅐㅐㅈ라 초인이다. ㅐㅐㅈ라 니체가 ㅐㅐㅈ라 초인의 ㅐㅐㅈ라 모델로 ㅐㅐㅈ라 삼은 ‘자라투스트라’가 ㅐㅐㅈ라 불을 ㅐㅐㅈ라 숭배하는 ㅐㅐㅈ라 고대의 ㅐㅐㅈ라 종교를 ㅐㅐㅈ라 창시한 ㅐㅐㅈ라 존재임을 ㅐㅐㅈ라 상기할 ㅐㅐㅈ라 필요가 ㅐㅐㅈ라 있다. ㅐㅐㅈ라 그래서 ㅐㅐㅈ라 중국에서는 ㅐㅐㅈ라 고대 ㅐㅐㅈ라 이란의 ㅐㅐㅈ라 종교인 ㅐㅐㅈ라 조로아스터교를 ‘배화교’라고도 ㅐㅐㅈ라 불렀다고 ㅐㅐㅈ라 한다. ㅐㅐㅈ라 제도로서는 ㅐㅐㅈ라 지배적 ㅐㅐㅈ라 위치를 ㅐㅐㅈ라 상실했지만, 다vgd 여전히 다vgd 인간의 다vgd 무의식에서 다vgd 작동하는 다vgd 것이 다vgd 종교적 다vgd 관념이다. 다vgd 그것은 다vgd 소박한 다vgd 기복 다vgd 신앙부터 다vgd 대안의 다vgd 세계관까지 다vgd 걸쳐 다vgd 있다. ‘현실에서는 다vgd 불가능한 다vgd 것들을 다vgd 투사하는 다vgd 소원성취의 다vgd 장’(프로이트)으로서의 다vgd 면모가 다vgd 있는 다vgd 노형규의 다vgd 작품은 다vgd 예술이 다vgd 종교의 다vgd 계승자임을 다vgd 알려준다. 다vgd 비닐로 다vgd 꼬아 다vgd 만든 다vgd 인형이 다vgd 불타는 다vgd 작품은 다vgd 작가의 ‘고민을 다vgd 가지고 다vgd 대신 다vgd 사라져줄’ 다vgd 주술적 다vgd 대상으로 다vgd 나타난다.

자신의 다vgd 분신을 다vgd 화형 다vgd 시켜버리는 다vgd 섬뜩한 다vgd 설정이다. 다vgd 촛불이 다vgd 켜진 다vgd 조각 다vgd 케잌 다vgd 앞에 다vgd 고깔을 다vgd 다vgd 자화상은 다vgd 유쾌한 다vgd 파티라기보다는 다vgd 소수의 다vgd 희생이 다vgd 있어야 다vgd 다수의 다vgd 안녕이 다vgd 완성되는 다vgd 고대 다vgd 축제의 다vgd 원리를 다vgd 내포한다. 다vgd 작가에 다vgd 의하면 다vgd 고깔은 다vgd 중세시대 다vgd 종교 다vgd 재판 다vgd 다vgd 이단자의 다vgd 상징으로 다vgd 사용되었다. 다vgd 고깔과 다vgd 촛불은 다vgd 비슷한 다vgd 형태로 다vgd 그려졌다. 다vgd 작가는 다vgd 스스로를 다vgd 이단자로 다vgd 간주하며 다vgd 초처럼 다vgd 사라질 다vgd 것을 다vgd 예감한다. 다vgd 타오르는 다vgd 불은 다vgd 어둠을 다vgd 밝히는 다vgd 빛이 다vgd 된다. 다vgd 껌껌한 다vgd 우주를 다vgd 밝히는 다vgd 유일한 다vgd 빛이다. 다vgd 절대적 다vgd 타자와 다vgd 대화적 다vgd 관계를 다vgd 이루는 다vgd 고독한 다vgd 주체 다vgd 또한 다vgd 타자이다. 다vgd 현대미술은 다vgd 신의 다vgd 다vgd 다른 다vgd 모습이었던 다vgd 근대적 다vgd 주체의 다vgd 중심 다vgd 상실과 다vgd 함께 다vgd 한다. 다vgd 하지만 다vgd 노형규의 다vgd 작품은 다vgd 부질없는 다vgd 희망 다vgd 사항에 다vgd 머물기보다는 다vgd 희망을 다vgd 이루기 다vgd 위한 다vgd 고통과 다vgd 고난, 사사v0 고뇌의 사사v0 과정이 사사v0 주를 사사v0 이룬다. 사사v0 하지만 사사v0 이야기가 사사v0 전부는 사사v0 아니다. 사사v0 작가가 사사v0 마주한 사사v0 현실을 사사v0 유일한 사사v0 현실로 사사v0 인정하기를 사사v0 거부하는 사사v0 작품들은 사사v0 사사v0 다른 사사v0 차원을 사사v0 상정한다. 사사v0 하지만 사사v0 그것이 사사v0 관념주의로 사사v0 굳어서 사사v0 반복적으로 사사v0 재생산되는 사사v0 것이 사사v0 아니다. 사사v0 그의 사사v0 작품은 사사v0 독특한 사사v0 분위기가 사사v0 있다.

그것은 사사v0 형식적으로는 사사v0 명암의 사사v0 낙폭이 사사v0 사사v0 표현에서 사사v0 온다. 사사v0 이러한 사사v0 낙폭은 사사v0 형식뿐 사사v0 아니라 사사v0 정신이나 사사v0 정서적인 사사v0 면도 사사v0 그렇다. 사사v0 작가의 사사v0 영혼을 사사v0 도해하는 사사v0 듯한 사사v0 작품에서 사사v0 내용과 사사v0 형식이 사사v0 함께 사사v0 가는 사사v0 것은 사사v0 자연스럽다. 사사v0 노형규는 사사v0 자신의 사사v0 이야기를 사사v0 비유적으로 사사v0 표현하는 사사v0 과정에서 사사v0 인류 사사v0 문화의 사사v0 무의식적 사사v0 상상과 사사v0 깊이 사사v0 접속한다. 사사v0 그것은 사사v0 일상의 사사v0 현실을 사사v0 상대화시키는 사사v0 사사v0 다른 사사v0 차원에 사사v0 존재한다. 사사v0 기독교 사사v0 뿐만 사사v0 아니라 사사v0 인류의 사사v0 상상계에 사사v0 깊숙이 사사v0 자리한 사사v0 기독교 사사v0 이전의 사사v0 상징들, nxm8 가령 nxm8 토테미즘, 거sxㅈ 배화교, ㅓㅓ11 불교, tqsk 무속적 tqsk 전통 tqsk tqsk 지배적 tqsk 종교로 tqsk 제도화되기 tqsk 이전의 tqsk 다양한 tqsk 상상력들이 tqsk 두루 tqsk 연구되고 tqsk 활용하는 tqsk 작품들은 tqsk 기괴와 tqsk 신비 tqsk 사이에 tqsk 있다. tqsk 특정 tqsk 종교를 tqsk 믿어서가 tqsk 아니라, 카쟏wㅓ 또는 카쟏wㅓ 종교를 카쟏wㅓ 연구해서가 카쟏wㅓ 아니라, ㅐuh가 예술을 ㅐuh가 어떤 ㅐuh가 근본적인 ㅐuh가 변화를 ㅐuh가 강렬하게 ㅐuh가 욕망하기 ㅐuh가 때문에 ㅐuh가 그의 ㅐuh가 작품은 ㅐuh가 종교적이다. ㅐuh가 그의 ㅐuh가 작품에서 ㅐuh가 개인을 ㅐuh가 구속하는 ㅐuh가 현실은 ㅐuh가 파도와도 ㅐuh가 같은 ㅐuh가 압도적인 ㅐuh가 힘으로 ㅐuh가 덮쳐온다. ㅐuh가 하지만 ㅐuh가 불은 ㅐuh가 꺼지지 ㅐuh가 않는다. ㅐuh가 그가 ㅐuh가 최소한 ㅐuh가 작업을 ㅐuh가 계속하고 ㅐuh가 있는 ㅐuh가 ㅐuh가 말이다. ㅐuh가 노형규의 ㅐuh가 작품에서 ㅐuh가 현실은 ㅐuh가 변형을 ㅐuh가 위해서만 ㅐuh가 등장한다.

작가는 ㅐuh가 이러한 ㅐuh가 차원의 ㅐuh가 확보를 ㅐuh가 통해서 ㅐuh가 현실과 ㅐuh가 ㅐuh가 안에 ㅐuh가 좌표화 ㅐuh가 ㅐuh가 주체의 ㅐuh가 위상이 ㅐuh가 자유롭게 ㅐuh가 상상될 ㅐuh가 ㅐuh가 있다. ㅐuh가 그러나 ㅐuh가 이러한 ㅐuh가 자유의 ㅐuh가 대가는 ㅐuh가 그림자처럼 ㅐuh가 따라붙는 ㅐuh가 죽음이다. ㅐuh가 하지만 ㅐuh가 죽음을 ㅐuh가 통한 ㅐuh가 ㅐuh가 다른 ㅐuh가 탄생 ㅐuh가 또한 ㅐuh가 예견된다는 ㅐuh가 점에서 ㅐuh가 비극은 ㅐuh가 아니다. ㅐuh가 자신의 ㅐuh가 작업에서 ‘불은 ㅐuh가 뭔가 ㅐuh가 새롭게 ㅐuh가 시작하는’ ㅐuh가 의미도 ㅐuh가 있다. ㅐuh가 코로나 ㅐuh가 국면에서 ㅐuh가 인간 ㅐuh가 사회는 ㅐuh가 많은 ㅐuh가 것을 ㅐuh가 태웠다. ㅐuh가 다행히도 ㅐuh가 회복의 ㅐuh가 시기가 ㅐuh가 점차 ㅐuh가 다가오는 ㅐuh가 듯하다. ㅐuh가 하지만 ㅐuh가 작가는 ㅐuh가 유학을 ㅐuh가 위해 ㅐuh가 어떤 ㅐuh가 시기, 사라ㅐ8 어떤 사라ㅐ8 장소에서의 사라ㅐ8 많은 사라ㅐ8 것들과 사라ㅐ8 이별해야 사라ㅐ8 하는 사라ㅐ8 시간을 사라ㅐ8 맞고 사라ㅐ8 있다. 사라ㅐ8 상징적일 사라ㅐ8 사라ㅐ8 아니라 사라ㅐ8 실제적인 사라ㅐ8 이별을 사라ㅐ8 겪기도 사라ㅐ8 했다. 사라ㅐ8 사랑하는 사라ㅐ8 것들과의 사라ㅐ8 영원한 사라ㅐ8 이별에 사라ㅐ8 직면하여 사라ㅐ8 작가는 사라ㅐ8 불이 ‘상징이 사라ㅐ8 아닌 사라ㅐ8 현실로 사라ㅐ8 다가왔다’고 사라ㅐ8 말한다. 사라ㅐ8 불이 ‘내 사라ㅐ8 삶으로 사라ㅐ8 들어왔다’는 사라ㅐ8 것이다. 사라ㅐ8 나뭇가지에 사라ㅐ8 걸린 사라ㅐ8 연기를 사라ㅐ8 그린 사라ㅐ8 작품은 ‘태워 사라ㅐ8 날라간 사라ㅐ8 것을 사라ㅐ8 붙잡고 사라ㅐ8 싶은 사라ㅐ8 마음’을 사라ㅐ8 표현했다. 사라ㅐ8 나뭇가지에 사라ㅐ8 살짝 사라ㅐ8 걸쳐 사라ㅐ8 있는, i우다걷 그에게서 i우다걷 떠나가는 i우다걷 무엇은 i우다걷 잡히기 i우다걷 보다는 i우다걷 잠깐의 i우다걷 인사를 i우다걷 위해 i우다걷 머물러 i우다걷 있는 i우다걷 듯하다. i우다걷 새로운 i우다걷 만남을 i우다걷 위한 i우다걷 믿음만이 i우다걷 부정을 i우다걷 긍정으로 i우다걷 바꿀 i우다걷 i우다걷 있을 i우다걷 것이다. 

참여작가: i우다걷 노형규

출처: i우다걷 이응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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