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찰라 같은 시간동안 얼음장 같은 정적이 흐르고 그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진 뜨거운 외침은 혼란의 시간을 예고한다. 관성이 사라지고 난 이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과 긴박의 상태에서 갈피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이것은 해방이 가져온 부산물이다.
1945년, 일제가 팽팽히 움켜 쥔 고삐의 힘을 풀자 해방 공간의 영화인들은 사방에서 작용한 힘에 의해 방향을 잃고 자리를 맴돌았다.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몰랐던 이들은 여러 갈래로 난 길 위에 서서 선택을 고민했다. 어떤 이는 신념에 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향해 달려 나갔고 다른 이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눈에 담아가며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이는 누군가의 강요로 먼 길을 돌아가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눈앞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기도 했다.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다른 길을 향해 간 해방 공간의 영화인들을 돌아보는 이번 전시는 역사의 길 위에 서 있었던 영화인들의 엇갈린 행로를 통해 70년이 넘는 분단의 역사와 한국전쟁이 가져온 민족적 비극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앞선 자들이 남긴 뽀얗게 인 먼지 틈으로 세상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시간이 열린다. 아쉬운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든 이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간 이들을 직시할 때이다.
섹션1 해방과 분단을 기록하다
해방이 되자 조선영화사에 소속되었던 영화인들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만세 소리 가득한 서울 시내의 모습은 물론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 지역까지 필름에 담았다.
해방의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분단이라는 현실은 보다 또렷해졌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분할 점령은 체제 대결과 좌우 갈등의 씨앗이었다. 미국과 소련을 체험하고 온 지식인들의 기행문은 체제 우위의 증거물로 활용되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는 체제 대결을 시각화하는 도구였다.
해방 직후의 민족적 염원이던 민족국가 수립은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으로 더욱 요원해져 갔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행과 이어진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은 고착되었고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이루어진 남북연석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다. 한반도는 친공과 반공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국제적 차원의 냉전은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섹션2 남과 북의 영화를 일구다
해방 후 적산기업이 된 조선영화사는 정부수립 이후 사단법인 대한영화사로 그 이름과 조직을 바꾸었다. 적산 조영에서 대한영화사로 이어지는 국가주도의 영화제작기업에서는 주로 뉴스와 기록영화가 제작되었다. 반면 극영화는 민간 제작회사에서 이루어졌다. 해방 후 재조직된 고려영화협회에서는 최인규의 <자유만세>를 제작하였으며 계몽영화협회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다투어 만들어졌다. 또한 시국을 반영하듯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사회적 문제들이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영화운동의 전면에서 활약한 영화인들은 1947년 남한 내 좌익 활동 금지로 인해 활동을 멈췄다. 삼천만의 여배우라 불리던 문예봉의 경우 지하로 숨었다가 단독정부 수립 전 월북했다. 영화운동에서 한 발짝 벗어나게 된 윤용규는 영화연출을 재개하여 종교적 사유의 영화 <마음의 고향>을 만들었으며 전쟁 중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는 제작, 배급, 상영 일체가 조선노동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1947년 국립영화촬영소가 설립되었으며 주인규, 강홍식, 추민, 문예봉, 심영, 박학 등 해방 전부터 중요하게 활약하던 영화인들에 의해 북한영화의 틀이 구축되었다. 6.25 전쟁 중 월북한 윤용규, 김연실, 최운봉, 남승민 등은 북한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섹션3 분단의 아픔, 영화는 계속되다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화인들은 남과 북으로 흩어졌다. 강홍식과 강효실(부녀), 최인규와 김신재(부부), 이필우와 이명우(형제), 문정복과 문정숙(자매), 김연실과 김학성(남매) 등이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헤어진 가족과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김세영, 유경애 등 일부 영화인들이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가족을 만났다.
단독정부 수립 전후 제작된 영화에 참여했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이데올로기적 차이 혹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남북으로 갈라졌다. <해연>에 출연했던 배우 중 조미령만 남한에 남고, 다른 배우들은 북한으로 가서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고향>에 출연했다. <마음의 고향>에 출연했던 배우 중 변기종, 석금성, 최은희 등은 남한에서 활동했으며 김선영, 최운봉, 남승민은 북한으로 가서 <소년 빨치산>(1951)과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에 출연했다. 혈육과 같은 우정을 나눴든 아니면 날선 비판과 대립을 서슴지 않았든 간에 이제는 다 보고 싶은 얼굴일 뿐이다.
섹션4 북한영화 특별관 (추후 별도 공지)
※ 북한영화 13편 상영 및 개인열람
<상영작>
내
고향(강홍식, 1949)용광로(민정식, 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윤용규, 1952)정찰병(전동민, 1953)
신혼부부(윤용규, 1955)
수풍에프런공사(천상인, 1948)
남북련석회의(천상인, 1948)
38선(강홍식, 1948)
조선시보 2호, 3호, 11호,
특보6호앨바강의 해후(그리고리 알렉한드로브, 1949)
전시기획 :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대표), 조소연 큐레이터(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차장)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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