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의 영화인들 :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

한국영화박물관

July 7, 2020 ~ Feb. 10, 2021

해방의 9타q히 찰라 9타q히 같은 9타q히 시간동안 9타q히 얼음장 9타q히 같은 9타q히 정적이 9타q히 흐르고 9타q히 9타q히 정적을 9타q히 깨고 9타q히 울려 9타q히 퍼진 9타q히 뜨거운 9타q히 외침은 9타q히 혼란의 9타q히 시간을 9타q히 예고한다. 9타q히 관성이 9타q히 사라지고 9타q히 9타q히 이후 9타q히 어디로 9타q히 튈지 9타q히 모르는 9타q히 긴장과 9타q히 긴박의 9타q히 상태에서 9타q히 갈피를 9타q히 찾지 9타q히 못하고 9타q히 여기저기를 9타q히 헤매고 9타q히 다니는 9타q히 이것은 9타q히 해방이 9타q히 가져온 9타q히 부산물이다.

1945년, cu4히 일제가 cu4히 팽팽히 cu4히 움켜 cu4히 cu4히 고삐의 cu4히 힘을 cu4히 풀자 cu4히 해방 cu4히 공간의 cu4히 영화인들은 cu4히 사방에서 cu4히 작용한 cu4히 힘에 cu4히 의해 cu4히 방향을 cu4히 잃고 cu4히 자리를 cu4히 맴돌았다. cu4히 어디로 cu4히 달려가야 cu4히 할지 cu4히 몰랐던 cu4히 이들은 cu4히 여러 cu4히 갈래로 cu4히 cu4히 cu4히 위에 cu4히 서서 cu4히 선택을 cu4히 고민했다. cu4히 어떤 cu4히 이는 cu4히 신념에 cu4히 cu4히 가쁜 cu4히 숨을 cu4히 몰아쉬며 cu4히 자신이 cu4히 선택한 cu4히 길을 cu4히 향해 cu4히 달려 cu4히 나갔고 cu4히 다른 cu4히 이는 cu4히 주변의 cu4히 지형지물을 cu4히 눈에 cu4히 담아가며 cu4히 신중하게 cu4히 발걸음을 cu4히 옮겼다. cu4히 cu4히 다른 cu4히 이는 cu4히 누군가의 cu4히 강요로 cu4히 cu4히 길을 cu4히 돌아가거나, ㅓgoㅓ 아니면 ㅓgoㅓ 어쩔 ㅓgoㅓ ㅓgoㅓ 없이 ㅓgoㅓ 눈앞에 ㅓgoㅓ 보이는 ㅓgoㅓ 가장 ㅓgoㅓ 가까운 ㅓgoㅓ 길로 ㅓgoㅓ 뚜벅뚜벅 ㅓgoㅓ 걸어가기도 ㅓgoㅓ 했다.

통일된 ㅓgoㅓ 민족국가 ㅓgoㅓ 건설이라는 ㅓgoㅓ 공통의 ㅓgoㅓ 목표를 ㅓgoㅓ 가지고 ㅓgoㅓ 다른 ㅓgoㅓ 길을 ㅓgoㅓ 향해 ㅓgoㅓ ㅓgoㅓ 해방 ㅓgoㅓ 공간의 ㅓgoㅓ 영화인들을 ㅓgoㅓ 돌아보는 ㅓgoㅓ 이번 ㅓgoㅓ 전시는 ㅓgoㅓ 역사의 ㅓgoㅓ ㅓgoㅓ 위에 ㅓgoㅓ ㅓgoㅓ 있었던 ㅓgoㅓ 영화인들의 ㅓgoㅓ 엇갈린 ㅓgoㅓ 행로를 ㅓgoㅓ 통해 70년이 ㅓgoㅓ 넘는 ㅓgoㅓ 분단의 ㅓgoㅓ 역사와 ㅓgoㅓ 한국전쟁이 ㅓgoㅓ 가져온 ㅓgoㅓ 민족적 ㅓgoㅓ 비극을 ㅓgoㅓ 되새기기 ㅓgoㅓ 위한 ㅓgoㅓ 것이다. 

앞선 ㅓgoㅓ 자들이 ㅓgoㅓ 남긴 ㅓgoㅓ 뽀얗게 ㅓgoㅓ ㅓgoㅓ 먼지 ㅓgoㅓ 틈으로 ㅓgoㅓ 세상이 ㅓgoㅓ 또렷이 ㅓgoㅓ 보이기 ㅓgoㅓ 시작할 ㅓgoㅓ ㅓgoㅓ 비로소 ㅓgoㅓ 새로운 ㅓgoㅓ 시간이 ㅓgoㅓ 열린다. ㅓgoㅓ 아쉬운 ㅓgoㅓ 이별의 ㅓgoㅓ 눈물을 ㅓgoㅓ 흘리며 ㅓgoㅓ 헤어졌든 ㅓgoㅓ 이제는 ㅓgoㅓ ㅓgoㅓ 눈을 ㅓgoㅓ 크게 ㅓgoㅓ 뜨고 ㅓgoㅓ 우리와 ㅓgoㅓ 다른 ㅓgoㅓ 길을 ㅓgoㅓ 걸어간 ㅓgoㅓ 이들을 ㅓgoㅓ 직시할 ㅓgoㅓ 때이다. 


섹션1 ㅓgoㅓ 해방과 ㅓgoㅓ 분단을 ㅓgoㅓ 기록하다

해방이 ㅓgoㅓ 되자 ㅓgoㅓ 조선영화사에 ㅓgoㅓ 소속되었던 ㅓgoㅓ 영화인들은 ㅓgoㅓ 카메라를 ㅓgoㅓ 들고 ㅓgoㅓ 거리로 ㅓgoㅓ 나섰다. ㅓgoㅓ 이들은 ㅓgoㅓ 만세 ㅓgoㅓ 소리 ㅓgoㅓ 가득한 ㅓgoㅓ 서울 ㅓgoㅓ 시내의 ㅓgoㅓ 모습은 ㅓgoㅓ 물론 ㅓgoㅓ 소련군이 ㅓgoㅓ 점령한 38선 ㅓgoㅓ 이북 ㅓgoㅓ 지역까지 ㅓgoㅓ 필름에 ㅓgoㅓ 담았다.

해방의 ㅓgoㅓ 흥분이 ㅓgoㅓ 가라앉을 ㅓgoㅓ 무렵 ㅓgoㅓ 분단이라는 ㅓgoㅓ 현실은 ㅓgoㅓ 보다 ㅓgoㅓ 또렷해졌다. ㅓgoㅓ 미국과 ㅓgoㅓ 소련에 ㅓgoㅓ 의한 ㅓgoㅓ 한반도 ㅓgoㅓ 분할 ㅓgoㅓ 점령은 ㅓgoㅓ 체제 ㅓgoㅓ 대결과 ㅓgoㅓ 좌우 ㅓgoㅓ 갈등의 ㅓgoㅓ 씨앗이었다. ㅓgoㅓ 미국과 ㅓgoㅓ 소련을 ㅓgoㅓ 체험하고 ㅓgoㅓ ㅓgoㅓ 지식인들의 ㅓgoㅓ 기행문은 ㅓgoㅓ 체제 ㅓgoㅓ 우위의 ㅓgoㅓ 증거물로 ㅓgoㅓ 활용되었다. ㅓgoㅓ 여기에 ㅓgoㅓ 더해 ㅓgoㅓ 영화는 ㅓgoㅓ 체제 ㅓgoㅓ 대결을 ㅓgoㅓ 시각화하는 ㅓgoㅓ 도구였다.

해방 ㅓgoㅓ 직후의 ㅓgoㅓ 민족적 ㅓgoㅓ 염원이던 ㅓgoㅓ 민족국가 ㅓgoㅓ 수립은 ㅓgoㅓ 남북 ㅓgoㅓ 분단과 ㅓgoㅓ 이념 ㅓgoㅓ 갈등으로 ㅓgoㅓ 더욱 ㅓgoㅓ 요원해져 ㅓgoㅓ 갔다. ㅓgoㅓ 미소공동위원회의 ㅓgoㅓ 파행과 ㅓgoㅓ 이어진 ㅓgoㅓ 단독정부 ㅓgoㅓ 수립으로 ㅓgoㅓ 분단은 ㅓgoㅓ 고착되었고 ㅓgoㅓ 통일된 ㅓgoㅓ 민족국가 ㅓgoㅓ 수립을 ㅓgoㅓ 위해 ㅓgoㅓ 이루어진 ㅓgoㅓ 남북연석회의는 ㅓgoㅓ 성과 ㅓgoㅓ 없이 ㅓgoㅓ 끝났다. ㅓgoㅓ 한반도는 ㅓgoㅓ 친공과 ㅓgoㅓ 반공의 ㅓgoㅓ 대결장이 ㅓgoㅓ 되었으며 ㅓgoㅓ 국제적 ㅓgoㅓ 차원의 ㅓgoㅓ 냉전은 ㅓgoㅓ 한반도에 ㅓgoㅓ 전쟁의 ㅓgoㅓ 그림자를 ㅓgoㅓ 드리웠다.


섹션2 ㅓgoㅓ 남과 ㅓgoㅓ 북의 ㅓgoㅓ 영화를 ㅓgoㅓ 일구다

해방 ㅓgoㅓ ㅓgoㅓ 적산기업이 ㅓgoㅓ ㅓgoㅓ 조선영화사는 ㅓgoㅓ 정부수립 ㅓgoㅓ 이후 ㅓgoㅓ 사단법인 ㅓgoㅓ 대한영화사로 ㅓgoㅓ ㅓgoㅓ 이름과 ㅓgoㅓ 조직을 ㅓgoㅓ 바꾸었다. ㅓgoㅓ 적산 ㅓgoㅓ 조영에서 ㅓgoㅓ 대한영화사로 ㅓgoㅓ 이어지는 ㅓgoㅓ 국가주도의 ㅓgoㅓ 영화제작기업에서는 ㅓgoㅓ 주로 ㅓgoㅓ 뉴스와 ㅓgoㅓ 기록영화가 ㅓgoㅓ 제작되었다. ㅓgoㅓ 반면 ㅓgoㅓ 극영화는 ㅓgoㅓ 민간 ㅓgoㅓ 제작회사에서 ㅓgoㅓ 이루어졌다. ㅓgoㅓ 해방 ㅓgoㅓ ㅓgoㅓ 재조직된 ㅓgoㅓ 고려영화협회에서는 ㅓgoㅓ 최인규의 <자유만세>를 ㅓgoㅓ 제작하였으며 ㅓgoㅓ 계몽영화협회를 ㅓgoㅓ 중심으로 ㅓgoㅓ 독립 ㅓgoㅓ 운동가를 ㅓgoㅓ 주인공으로 ㅓgoㅓ ㅓgoㅓ 영화들이 ㅓgoㅓ 다투어 ㅓgoㅓ 만들어졌다. ㅓgoㅓ 또한 ㅓgoㅓ 시국을 ㅓgoㅓ 반영하듯 ㅓgoㅓ 분단과 ㅓgoㅓ 이데올로기 ㅓgoㅓ 대립, 카가nx 사회적 카가nx 문제들이 카가nx 영화의 카가nx 소재로 카가nx 활용되었다.

영화운동의 카가nx 전면에서 카가nx 활약한 카가nx 영화인들은 1947년 카가nx 남한 카가nx 카가nx 좌익 카가nx 활동 카가nx 금지로 카가nx 인해 카가nx 활동을 카가nx 멈췄다. 카가nx 삼천만의 카가nx 여배우라 카가nx 불리던 카가nx 문예봉의 카가nx 경우 카가nx 지하로 카가nx 숨었다가 카가nx 단독정부 카가nx 수립 카가nx 카가nx 월북했다. 카가nx 영화운동에서 카가nx 카가nx 발짝 카가nx 벗어나게 카가nx 카가nx 윤용규는 카가nx 영화연출을 카가nx 재개하여 카가nx 종교적 카가nx 사유의 카가nx 영화 <마음의 카가nx 고향>을 카가nx 만들었으며 카가nx 전쟁 카가nx 카가nx 북한으로 카가nx 갔다.

북한에서는 카가nx 제작, ㄴ우아아 배급, ㅐ갸ㅑㅐ 상영 ㅐ갸ㅑㅐ 일체가 ㅐ갸ㅑㅐ 조선노동당에 ㅐ갸ㅑㅐ 의해 ㅐ갸ㅑㅐ 장악되었다. 1947년 ㅐ갸ㅑㅐ 국립영화촬영소가 ㅐ갸ㅑㅐ 설립되었으며 ㅐ갸ㅑㅐ 주인규, ㅐ쟏ㅈ타 강홍식, 우zy자 추민, 8우라바 문예봉, 가xi6 심영, 0my차 박학 0my차 0my차 해방 0my차 전부터 0my차 중요하게 0my차 활약하던 0my차 영화인들에 0my차 의해 0my차 북한영화의 0my차 틀이 0my차 구축되었다. 6.25 0my차 전쟁 0my차 0my차 월북한 0my차 윤용규, 카ㅐ거m 김연실, 7ㅐi7 최운봉, vr5ㅓ 남승민 vr5ㅓ 등은 vr5ㅓ 북한영화를 vr5ㅓ 풍성하게 vr5ㅓ 만들었다.


섹션3 vr5ㅓ 분단의 vr5ㅓ 아픔, 거isw 영화는 거isw 계속되다

분단과 거isw 전쟁의 거isw 소용돌이 거isw 속에서 거isw 영화인들은 거isw 남과 거isw 북으로 거isw 흩어졌다. 거isw 강홍식과 거isw 강효실(부녀), tia1 최인규와 tia1 김신재(부부), 3rm다 이필우와 3rm다 이명우(형제), ksㅓ파 문정복과 ksㅓ파 문정숙(자매), ㅓrj마 김연실과 ㅓrj마 김학성(남매) ㅓrj마 등이 ㅓrj마 전쟁으로 ㅓrj마 이산가족이 ㅓrj마 되었다. ㅓrj마 이들 ㅓrj마 대부분은 ㅓrj마 헤어진 ㅓrj마 가족과 ㅓrj마 ㅓrj마 이상 ㅓrj마 만나지 ㅓrj마 못했다. ㅓrj마 김세영, u7q하 유경애 u7q하 u7q하 일부 u7q하 영화인들이 u7q하 남북이산가족 u7q하 상봉을 u7q하 통해 u7q하 가족을 u7q하 만났다.

단독정부 u7q하 수립 u7q하 전후 u7q하 제작된 u7q하 영화에 u7q하 참여했던 u7q하 스태프들과 u7q하 배우들은 u7q하 이데올로기적 u7q하 차이 u7q하 혹은 u7q하 전쟁의 u7q하 혼란 u7q하 속에서 u7q하 남북으로 u7q하 갈라졌다. <해연>에 u7q하 출연했던 u7q하 배우 u7q하 u7q하 조미령만 u7q하 남한에 u7q하 남고, t9다4 다른 t9다4 배우들은 t9다4 북한으로 t9다4 가서 t9다4 북한 t9다4 최초의 t9다4 예술영화 <내고향>에 t9다4 출연했다. <마음의 t9다4 고향>에 t9다4 출연했던 t9다4 배우 t9다4 t9다4 변기종, 바8o거 석금성, mc44 최은희 mc44 등은 mc44 남한에서 mc44 활동했으며 mc44 김선영, 카히ㅓ1 최운봉, dp카f 남승민은 dp카f 북한으로 dp카f 가서 <소년 dp카f 빨치산>(1951)과 <향토를 dp카f 지키는 dp카f 사람들>(1952)에 dp카f 출연했다. dp카f 혈육과 dp카f 같은 dp카f 우정을 dp카f 나눴든 dp카f 아니면 dp카f 날선 dp카f 비판과 dp카f 대립을 dp카f 서슴지 dp카f 않았든 dp카f 간에 dp카f 이제는 dp카f dp카f 보고 dp카f 싶은 dp카f 얼굴일 dp카f 뿐이다.


섹션4 dp카f 북한영화 dp카f 특별관 (추후 dp카f 별도 dp카f 공지)

dp카f 북한영화 13편 dp카f 상영 dp카f dp카f 개인열람

<상영작>
dp카f 고향(강홍식, 1949)
용광로(민정식, 1949)
향토를 aha1 지키는 aha1 사람들(윤용규,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신혼부부(윤용규, 1955)
수풍에프런공사(천상인, 1948)
남북련석회의(천상인, 1948)
38선(강홍식, 1948)
조선시보 2호, 3호, 11호, iㅓb마 특보6호
앨바강의 iㅓb마 해후(그리고리 iㅓb마 알렉한드로브, 1949)


전시기획 : 5oxi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5oxi 대표), 사ㅈ7거 조소연 사ㅈ7거 큐레이터(한국영상자료원 사ㅈ7거 연구전시팀 사ㅈ7거 차장)

출처: 사ㅈ7거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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