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으로 간다

대전시립미술관

2023년 3월 3일 ~ 2023년 4월 16일

대전시립미술관은 2023년 첫 소장품 기획전으로 《초록으로 간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미술관 소장품 중 ‘풍경’을 담은 회화와 사진 작품 11점을 소개한다. 소장품은 미술관의 위치와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한다. 이는 수집된 소장품을 통해 미술관이 지향하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하는 소장품들은 대전시립미술관의 전체 소장품 1357점 중 극히 일부이기에 전체 소장품 컬렉션의 성격을 보여주기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매년 열릴 예정인 미술관의 소장품 기획전과 열린수장고의 상설 컬렉션 전시를 통해 대전시립미술관 소장품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므로 이를 통해 전체 윤곽이 퍼즐처럼 맞춰질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화면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별하였기에 다양한 시도를 통해 완성된 독특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초록으로 간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들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제목이지만, ‘초록’은 여름가을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는 그 일련의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작가들이 치열하게 그려 완성된 풍경은 계절의 흐름을 보여준다. 거친 들판, 어두운 숲, 생명이 소멸한 밭, 마른 풀 뒤이어 생명이 움트는 산과 바다, 녹음이 짙어진 언덕은 평범한 풍경을 넘어 우리의 삶을 담고 있다. 바야흐로 계절을 넘어, 초록으로 간다.

김명숙은 충북 청주 인근의 외딴 마을에 살며 구도하듯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이다. 은둔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독특한 화면 구성과 표현 방법으로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작품 <무제>는 숲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그 시기 작업에 대해 ‘나무의 나무 되기 연구’라고 칭한 바 있다. 어두운 단색의 화면은 수없이 긁힌 자국으로 가득한데, 이는 얇은 종이 위에 물감이 묻은 수세미로 덧칠하고 긁어낸 결과이다. 그의 작품 속 숲 이미지는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듯 빛과 어둠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이는 작가가 느낀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강한 대비를 통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작가는 나무와 교감하며 대상으로서의 나무가 아닌 ‘나를 사유하는 주체’ 로서의 나무를 그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작품 속 신비로운 숲은 작가와 자연이 교감한 결과일 것이다.

이철주는 충청남도 청양 출신으로, 인물화에서부터 추상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이루어온 작가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인물화와 실경산수화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사실적인 수묵담채를 표현했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비구상적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장생>과 <우주로부터>등의 연작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일상에서 관념적인 것으로 주제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후 사실적인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작가의 심상과 우주적 관념을 담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필선의 강렬한 율동을 통하여 한국화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1991년 작 <우주(宇宙)로부터 태시(太始)>에서도 그의 강렬한 필선이 드러나는데. 화면은 크게 상·하단의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고, 하단에는 마치 늦가을 들판의 모습과 같이 갈색으로 된 강한 만곡의 필선으로 빼곡히 차 있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어두운 밤과 같은 짙은 화면 위에 강한 마티에르가 드러나는 붉은 선이 마치 불꽃과 같이 가로지른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제목에서처럼 탄생이 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듯 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한정수는 1992년 충남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전임강사로 부임하면서 대전으로 왔다. 그는 관념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주변의 사물을 다루었다. 그는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며 발견한 풀, 돌, 씨앗, 달팽이 등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동양화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풀어내고자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동양화의 전통 재료인 지필묵에 목탄을 접목했고, 연지벌레에서 짜내 만든 붉은 빛 물감인 양홍(洋紅)을 즐겨 사용하였다. 목탄을 손으로 비벼서 지두화(指頭畵)를 그리고, 화면 뒷면에 채색하여 안료가 은은하게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형태와 채색에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 즉 무위(無爲)를 이루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1998년 작가가 지병으로 별세한 뒤, 유족은 작품 중 41점을 대전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돌>, <산, 수>는 그 작품 중 두 점으로 화면에 강한 선으로 호방하게 그려진 산과 물의 기세가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유근택은 관념적이었던 한국화를 가깝고 친숙한 것으로 만들고자 일상의 풍경을 택해 작업해왔다. 자신의 주변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그는 최근 전시에서 일상을 넘어선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며,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나, 팬데믹 속의 인간 등 작품의 소재를 확장해 나간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예전 작업에 비해 사회적,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우리가 감내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들을 조금 더 끌어들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경계> 연작 중 2019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황량한 풍경과 철책을 상징적으로 배치하여 정치적인 격변의 시기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냈으며, 분단국가에서 사는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림에 늘 등장하던 장난감과 같은 일상의 오브제들도 황무지 위에 드문드문 펼쳐져 있어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현실적인 사실을 담는 것에 거리를 두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김선두는 장지(壯紙)에 그린 채색화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한지의 한 종류인 장지는 두껍고 질긴 종이를 말한다. 장지화는 바탕 작업 없이 색을 여러 번 중첩하여 그리는 발색법이 특징이다. 그는 장지화의 채색 과정을 ‘색을 얹는 것이 아니라 우려낸다’고 표현하는데, 수묵과 채색 양쪽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다. 그는 전통을 이으면서도 끊임없이 주제 의식, 재료, 기법 등을 연구하여 한국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운 잡풀들>(1991)은 기존의 원근법을 과감히 거부하는 역원근법을 사용하여 실제 거리가 아닌 마음의 거리를 표현하였다. 논과 밭은 멀고 가까움이 느껴지지 않고, 그 위에 돋아난 잡풀들은 화폭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기운차게 뻗어나간다. 화면 속 풍경은 화려한 명승지가 아닌 평범한 들녘이다. 그곳을 채운 땅과 풀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자연을 대변하며, 중요한 것은 원리에 따른 시점이 아니라 대상이 갖는 본래의 성질, 즉 자연의 생명력임을 보여준다.

함명수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린다기보다 그리는 행위 그 자체에 의의를 두고 끊임없이 붓질의 끝을 좇아 실험한다. 붓질이 쌓이는 층만큼이나 작가가 바라보고 그리는 대상 또한 변화의 과정을 반복한다. 특히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과 대조해볼 때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붓 터치의 극적인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결 마디마다 ‘그리는’ 순수한 행위 그 자체를 따라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며 새로운 영역을 창출한다. 는 옥수수 재배를 많이 하는 지역으로 작업실을 옮긴 후 제작한 작품으로, 자연의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을 서정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려지는 대로 그렸다”라는 작가의 말과 같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그 동안의 밀도 높은 작업에서 벗어난 편안한 느낌의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이 붓의 터치에 중점을 두었다면, 에서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칠하고 긁어내는 작업을 통해 색채가 뒤섞이는 효과를 연출하고, 움직이는 듯한 형상으로 생명력을 담아내어 생성과 소멸에 대한 감각을 구현하였다.

강경구는 주로 잠실이나 한강, 인왕산, 충무로, 북한산과 같은 서울 풍경과 숲, 물길 연작을 해왔다. 특히 <북한산> 시리즈를 통해 한국화에 있어서 전통의 수용과 현대적 변용을 모색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강경구의 화법은 대담하고 거친 필선과 중후한 먹의 자유자재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서양화 기법을 수용하면서, 때로는 간단한 필획으로, 때로는 중첩된 농묵으로, 대상을 화면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자신 세계를 다져왔다. 작가의 대상인 산이 멀리 있는 산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서울의 북한산을 그림으로서 더욱 생동감을 갖고 다가온다. <북한산>(1998)은 한지에 먹과 채색으로 한 작업이다. 호방한 필치로 대담하게 필선을 구사한 이 그림에서 우리는 산세에서 기운생동을 느낄 수 있다. 장쾌한 스케일의 북한산의 짙은 윤곽과 기암괴석에서 풍겨지는 호연지기의 기운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뜻 그의 한국화는 서양화의 언어와 융합된 추상화의 아우라를 지니지만, 전통적인 수묵화의 필선을 구사하고 있다. 그림 아래쪽으로는 채색으로 한옥과 울타리가 짙은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어 작품에 보이지 않지만 인적을 남겼는데, 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사유하게 한다.

백준기는 대전, 충남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중견작가로, 회화, 사진, 판화, 콜라주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주 요소는 주변에서 채집된 자연물들인데, 때론 곤충채집 표본, 어떨 땐 회화를 사진으로 전사한 것처럼 또는 사진을 회화처럼 교묘하게 처리하여 사람의 시선에 혼돈을 가한다. 백준기의 풍경화는 기하학적 조형성을 오랜 기간 탐구한 작가답게 단단한 구성을 이룬다. ‘자연미술’을 통하여 다양한 매체와 설치의 개념적인 미술형태를 넘나드는 작가에게 있어 풍경화는 또 하나의 표현 방법일 뿐이다. 자연미술을 자유롭게 실행하던 시기에 접했던 풍경을 담담하지만 화면의 강한 조직력과 압착된 붓질로 그려낸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나무의 잎에서 이루어진 음영과 물에 드리운 투영은 ‘장자 못’(지명)의 깊이를 알려준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많지 않은 풍경화 중 하나로 풍경에 대한 뚜렷한 관찰과 자연관을 드러나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임동식은 야외에서 자연물을 이용한 행위와 설치 예술의 가능성을 꾸준히 타진하는 작가이다. 1981년에는 야외현장미술연구회 ‘야투(野投)’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연미술을 시작했는데, 야투는 ‘들에서 내게로 던진다’와 ‘들로 던진다’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살고자 1993년부터 10여 년간 공주 원골마을에서 생활하였다. <기억의 강>(1991-2008)은 야투와 마을 내 예술 활동 중 남겼던 사진을 그림으로 변환한 것이다. 사생의 바탕이 된 ‘활동’은 개인에서 출발한 것이고, 사생의 배경이 된 ‘풍경’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장소이자 ‘자연’이라는 친숙한 주제이다. 이처럼 개인적인 기록을 화폭 안에서 재구성하면서 주관성과 객관성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풍경화가 탄생되었다. 높은 지대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구도는 사진을 촬영한 주체인 나의 시각에 맞춰져 있지만, 결과적으로 풍경을 담은 것은 카메라와 필름이 아닌 캔버스와 물감이다. 이는 그림 속의 강을 ‘그림을 그린 사람의 기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인지하게 하고, 그림 속 장소를 ‘공감의 공간’으로 치환시킨다.

정철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전화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오랜 시간 자연 이미지를 추상적 기호로 구조화 하면서도, 자연의 순수성을 잃지 않는 투명한 색채로 작업해왔다. 그는 ‘산’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산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한 양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국토대장정>(2014)은 아득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 또는 기억의 저편에 묵혀 있는 특별한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그가 그려낸 그림들에서는 어린 시절 놀이에 바쁜 아이들의 웃음소리, 황소와 함께 산을 오르는 농부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 하며, 하늘을 나는 새와 비둘기를 통해 추억을 전하고 있다.


참여작가 강경구, 김명숙, 김선두, 유근택, 이철주, 임동식, 백준기, 정철, 한정수, 함명수

출처: 대전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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