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의 막

휘슬

2023년 6월 2일 ~ 2023년 7월 8일

처음 생각의 시작은 종이라는 재료에 관한 애정에서부터 였다. 지류함에 꽂힌 다양한 종이를 구경하며 냄새와 촉감이 마음에 드는 종이를 만나는 날엔 쓰임도 정하지 않고 구매하곤 했다. 이래저래 급한 선물의 포장지로, 메모지로, 요리의 받침으로 사라진.

세상의 매체가 변했다 해도 종이는 여전히 유용하며 다양하다. 종이는 예술가의 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토대가 된다. 종이를 통해 공간을 탐구하고, 조각의 무게를 담고, 떠오르는 상념을 개어 넣고, 미술가에게는 이 얇은 막을 통해 다른 차원을 바라보는 본능적인 감각이 심어져 있는 것만 같다.

‹차원의 막›전은 종이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아니다. 본 전시에서는 각기 다른 분야에 있는 미술가가 종이를1 어떤 의미로 다루는지 살펴본다. 전시에는 회화 작가 박정혜, 조각가 변상환, 설치미술가 허지혜가 참여한다. 

박정혜의 회화에는 종이라는 대상이 항상 존재한다. 작가에게 종이란 시공간을 암시하는 상징 같은 것이다. 그는 종이를 접고 자르며 색감과 표면을 탐구하고 종이가 지닌 납작한 모양새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을 떠올리며 본인이 관심을 두는 장소와 연관 짓는다. 종이 오브제는 그의 회화와 공존하며 작가만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아직 우리가 직접 닿지 못한 “수학적 상상이 동원된 이미지로써” 존재하는 지구 밖 세상에 관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다각형을 접는 행위를 통해 끝없이 증식되는 공간을 생각한다. 전시된 ‹Octagonal Echoes›(2023)시리즈는 우주의 어두운 공간과 희미한 불빛이 종이접기에서 시작된 수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추상화 된 것이다. 박정혜의 회화 속에서 여러 방향의 좌표로 놓인 이 도상들은 캔버스로 진입하기 직전에 통과해야 하는 면이 한 겹 더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변상환은 조각가로서 형상을 손으로 빚는 일을 넘어, 재료를 선택하고 작품을 연출하는 방식을 통해 조각이 매체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가볍게 비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개념을 다양한 층위에 녹여낸다. 전시장에 놓인 Live Rust 시리즈는 작품의 명제를 살펴보아도 조각이라는 단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작가는 관람자가 이 작품이 조각인지 판화인지 판단하는 것에 개입하지 않고 몇 가지 상황만 제시해 두었다. 작업은 판화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재료 설명에 “방청페인트, 판화지, 형강 활자 인쇄”라 덧붙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형강이라는 재료의 물성에 관해 가늠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활자’와 ‘인쇄’라는 말은 속도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 작업은 작가가 2018년부터 이어왔다. 건축의 골격으로 사용하는 H, I 빔을 본인이 제어 가능한 무게로 다듬어서 방청 페인트를 바른 후 한 번의 호흡에 일정한 간격으로 도상을 찍어낸 것이다. 철의 부식을 막는 방청 페인트를 15kg이 넘는 덩어리로 눌러서 찍었다고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더 이상 평면 작업으로 읽히지 않는다. 작품을 만드는 행위의 무게는 판화지에 색과 질감으로만 남아 가볍게 이동 가능한 몸체를 얻었다. 이렇게 작업의 대상과 재료의 성질이 상반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유머, 그리고 작가의 냉소적인 상상을 함축하는 제목의 합은 Live Rust 시리즈를 하나의 장르로 해석할 수 없게 만든다. ‹Live Rust–작은 만자왕+Odyssey›(2023)는 빔의 이동 방향이 다른 도상으로 구분되며 각각 알파와 베타 버전으로 분리된다. 알파에서 음각으로 도려내어진 작은 도형들은 나란히 놓이거나 작게 나뉘어 여기저기 흩어져 공간을 점유한다.   

허지혜는 설치미술가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물질 사이에서 균형잡기를 시도한다. 작가는 평소에 관심 두고 있는 글과 필드 리코딩을 통해 수집한 재료로 사운드 작업도 병행한다. 작가의 설치 작업은 시각과 청각의 자극에서 시작하여 내용이 점차 사라지고 촉각적인 형태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종이의 생과 사가 느껴지는 이번 작업은 작가가 그간 모은 종이를 잘게 자르고 으깨서 만들었다. 작업에 사용한 종이는 대부분 인쇄물이다. 인쇄물을 해체하고 물에 개면서 종이에 섞인 잉크와 접착제 등의 성분이 드러난다. 이것은 작품으로 다시 결합될 때 색상과 견고함을 결정하며 작가는 이 재료들에 반응한다. 종이죽을 뭉쳐서 만든 작품의 형태는 불규칙하고 위태롭다. 게다가 낭창거리는 긴 철제 막대까지 더해져 무게중심이 아슬아슬하다. 깃대는 과거에 영역을 표시하는 상징물이었고 현재까지도 도심 곳곳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모습과 의미를 담은 깃대는 작가에게 흥미로운 도시의 풍경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종종 표지석의 모양과 유사한 형태가 드러난다. 작가는 어떤 형상을 만들기 위해 돌진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드러나는 형태에 즐거움을 얻는다. 무엇을 만드는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허지혜는 여러가지 방식을 수행하며 작품의 모양새가 드러날 때 기억과 유사한 장면을 연결하고 완성한다. 

글 김수현(휘슬, 부디렉터)

참여작가: 박정혜, 변상환, 허지혜

출처: whi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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