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 이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21년 12월 23일 ~ 2022년 4월 24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2021년 12월 23일부터 2022년 2월 27일까지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의 전시 ‹집합 이론›을 살림터 1층, D-8에서 개최한다.

 ‹집합 이론›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방법론을 구축해 온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를 한데 묶는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세 팀이 같이 자리하는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슬기와 민(최슬기와 최성민)은 디자이너로서의 관습적인 역할을 따르거나 뒤틀면서 디자인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탐구해왔다. 그림으로 된 딩벳 폰트로 정보를 전달하거나(박미나 ‹홈 스위트 홈›, 2007, 아르코미술관 재개관 프로그램, 2008) 아라비아 숫자를 로마 숫자로 바꿔 놓는(Sasa[44] ‹애뉴얼 리포트 2012›, 2013) 등 주어진 정보를 다른 것으로 치환하는 방식부터 일반적인 디자인 요소(항목)가 지닌 관습적인 기능에 반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무대 바깥의 것들’에 집중하는 공연 예술 저널인 ‹옵.신›(Ob.scene) 창간호는 글을 이루는 본문과 삽화, 주석을 분리해 독자가 스스로 분리된 요소들을 연결할 수 있게 했다. ‹옵.신›의 아이덴티티인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텅 빈 표지는 수행적(performing) 디자인을 함축하기도 하지만 표지가 지닌 일반적인 기능에 반하는 불경함(obscene)을 나타내기도 한다. 더 나아가 ‹옵.신›의 표지가 비어있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지나치게 가까이 본 모습이라면, 여러 이미지를 흐릿하고 거대하게 확대하여 역전된 깊이감을 나타낸 ‘인프라 플랫’(infra-flat) 연작과 연결할 수 있다.

슬기와 민은 출판사 스펙터 프레스(Specter Press, 2006–2021)를 운영하며 저술과 번역 활동도 폭넓게 병행했다. 저서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에서 단순히 디자이너들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네덜란드의 사회 구조를 비롯해 현대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기술하고, 최성민은 로빈 킨로스의 ‹현대 타이포그래피›를 번역하며 번역이라는 개념적 치환 과정을 전시 ‹킨로스, 현대 타이포그래피(1992, 2004, 2009)›(갤러리 팩토리, 서울)로 풀어냈다. 최슬기는 2010년 공간 해밀톤에서의 개인전 ‹진짜?!›로 자신의 오랜 관심사인 다이어그램의 역할을 다양한 층위로 치환하는 시도를 선보였다.

신신(신해옥과 신동혁)은 종이 등, 3차원 물질 역시 2차원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 상호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한다. ‹맨체스터 프로젝트›(2011)는 박준범의 영상 작업을 도큐멘트 한 책으로, 지면이 흐를수록 영상 스틸컷이 쌓이면서 종이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진다. 이러한 방식은 엄유정의 작품집 ‹푀유›(2020)에서도 적용된다. ‹푀유›는 실제 작품의 크기와 재료에 따라 종이의 무게와 재질을 달리하면서 캔버스와 종이를 비롯하여 연필, 과슈, 아크릴 같은 시각적 재료 또한 무게와 질감을 지닌 3차원 물질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오프닝 프로젝트›(2014)는 아르코미술관의 벽돌이 되고 권오상의 작품집 ‹스몰 스컬프처스›(2019)와 동명의 책 ‹권오상›(2016)은 조각이 되기도 하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책방 다시보기›에서는 인쇄 매체가 공간으로 확장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신신은 최종 결과물에서 잘려 사라지는 재단선, 색상표 등 제작용 기호들을 미술책방 창문 등 공간 곳곳에 배치하여 2차원과 3차원이 공존하는 풍경을 펼쳐냈다. 

신신은 서점이자 프로젝트 스페이스인 더 북 소사이어티 운영 주체인 미디어버스와 협업하며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작가, 기획자로서의 태도를 다져왔다. 2021년 취미가에서 열린 신해옥의 개인전 ‹Gathering Flowers›(2021)는 저자로서 디자이너라는 태도에 따라 “마치 꽃을 모으듯" 다양한 협업자들과 함께 만든 전시다. 이는 미디어버스의 임프린트인 화원의 설립으로 확장된다. 화원은 앤솔로지(anthology)의 어원인 ‘꽃을 모으는 일'(anthologia)에서 차용한 말로, 신신은 그들만의 저자성과 그에 기반한 결과물을 모아 “화원”을 만들어 나간다.

이처럼 신신은 단순히 데이터를 옮겨 담는 디자이너의 수동적 역할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재료와 물리적 조건에 기반하는 이미지 생산의 수행성과 그 실천을 목표로 한다. 

홍은주 김형재는 2007년 자신들의 동료 디자이너와 작가 등 여러 창작자의 작업을 한데 묶어 ‹가짜잡지›를 기획, 발간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저자, 편집자, 기획자로 확장하며 활동해왔다. ‘가짜잡지와 친구들’(G& Press)이라는 그들의 출판 프로젝트명이 말해주듯, 홍은주 김형재의 저자성은 함께 협업한 이들(“친구들”)의 범위를 넓혀가, 스스로 동시대의 신(scene)을 만들려는 희망과 실천에 기반한다. 또한 김형재는 박해천과 협업하고(‹세 도시 이야기›, 2014, ‹확장 도시 인천›, 2017) 박재현과 콜렉티브 그룹 옵티컬 레이스(Optical Race)로 활동하면서 도시와 세대를 담론으로써 기능하게 하거나 이를 인쇄 매체와 데이터로 환원해 소유하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홍은주는 한국 드라마에서 차용한 세계관(‹행복이 가득한 집›, 2010, ‹거의 확실한›, 2017)을 실제 세계와 사물로 가져와 다중-우주(multiverse)를 만드는 시도를 해왔다.

홍은주 김형재는 직관적인 어법으로 물질세계를 평면과 교차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2019 아티언스 대전›에서 과학 상자를 떠올리며 전구에 불을 밝히는 전선을 형상화하고 ‹무장애 예술주간›(2020–2021)에서 장애와 비장애의 사이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느리지만 확고한 흔적을 남기는 달팽이의 궤적에 비유하며, 어느 만화 캐릭터의 점, 선, 면 등 평면을 구성하는 요소로 치환하고 이를 또 다른 사물과 연결해 특정 행사를 위한 서체를 만들기도 한다.(‹도에라몽›, 2018) 한편 대륙과 도시, 역사와 기후는 추상적 데이터로 변환되어 정보이자 장식, 혹은 지면 그 자체가 된다.(‹아프리카 나우›, 2014, ‹새로운 유라시아 프로젝트›, 2015, ‹108-HTLTDPRHCC-100DE›, 2016, ‹제자리에›, ‹여기부터 여기까지›, 2021) 

홍은주 김형재의 흥미로운 지점은 서로의 관심사와 방향을 하나로 정제하지 않고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드는 것에 있다. 홍은주 김형재의 프로토콜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완결이 아닌 과정이며,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합되어 생성해내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질서다. 홍은주 김형재는 서로를 무한히 조합해가며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렇듯,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 세 팀은 모두, 통상적인 디자이너라는 역할을 탈피해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고 변화해왔다.

‹집합 이론›은 세 팀의 방법론과 관심사가 각자의 주제 안에서 어떻게 지속되고 변화하는지 이어봄으로써, 그들의 지형도를 느슨하게나마 포착하려 하는 시도이다. 전시 출품작은 자율적으로 진행한 작업을 최대한 배제해, 제약과 한계 안에서 자신들의 태도를 어떤 식으로 기능하게 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각각의 결과물은 서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며 크고 작은 유대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전시가 말하는 ‘집합’은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가 되거나 그들의 태도나 걸어온 여정이 된다.

참여작가: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

출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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