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킴 개인전 : 기묘한 살갗 Uncanny Skin

갤러리소소

Aug. 31, 2019 ~ Sept. 29, 2019

유희와 4히lㅑ 고통, 거ㅑ쟏5 거ㅑ쟏5 무상의 거ㅑ쟏5 이미지

전시를 거ㅑ쟏5 본다는 거ㅑ쟏5 것은 거ㅑ쟏5 빼어난 거ㅑ쟏5 재미는 거ㅑ쟏5 없지만 거ㅑ쟏5 아름다운 거ㅑ쟏5 일이다. 거ㅑ쟏5 컨템퍼러리 거ㅑ쟏5 공간을 거ㅑ쟏5 미술을 거ㅑ쟏5 업으로 거ㅑ쟏5 삼은 거ㅑ쟏5 사람이 거ㅑ쟏5 묵묵히 거ㅑ쟏5 채운다. SNS로 거ㅑ쟏5 거ㅑ쟏5 곳을 거ㅑ쟏5 선택한 거ㅑ쟏5 사람들이 거ㅑ쟏5 공간을 거ㅑ쟏5 찾고 거ㅑ쟏5 다시 SNS로 거ㅑ쟏5 인증한다. 거ㅑ쟏5 언제부턴가 거ㅑ쟏5 미술이라는 거ㅑ쟏5 해시태그가 SNS를 거ㅑ쟏5 수놓고 거ㅑ쟏5 있다. 거ㅑ쟏5 그곳에서 거ㅑ쟏5 미술은 ‘so hot’하다. 거ㅑ쟏5 그러나 거ㅑ쟏5 미술로 거ㅑ쟏5 일상의 거ㅑ쟏5 소임을 거ㅑ쟏5 다한 거ㅑ쟏5 사람들은 거ㅑ쟏5 모른다. 거ㅑ쟏5 미술을 거ㅑ쟏5 한다는 거ㅑ쟏5 것이 거ㅑ쟏5 철저히 거ㅑ쟏5 육체적 거ㅑ쟏5 일임을 거ㅑ쟏5 알지 거ㅑ쟏5 못한다. ‘미술의 거ㅑ쟏5 일’은 거ㅑ쟏5 인식과 거ㅑ쟏5 감각과 거ㅑ쟏5 육체의 거ㅑ쟏5 노동이다. 거ㅑ쟏5 세상은 거ㅑ쟏5 미술가에게 거ㅑ쟏5 단단한 거ㅑ쟏5 하드웨어와 거ㅑ쟏5 유연한 거ㅑ쟏5 소프트웨어를 거ㅑ쟏5 동시에 거ㅑ쟏5 요구한다. 거ㅑ쟏5 아름다움이란 거ㅑ쟏5 그런 거ㅑ쟏5 것이라고 거ㅑ쟏5 정의 거ㅑ쟏5 내린다. 거ㅑ쟏5 세상의 거ㅑ쟏5 요청을 거ㅑ쟏5 외면할 거ㅑ쟏5 거ㅑ쟏5 없어서 거ㅑ쟏5 작가는 거ㅑ쟏5 자신과 거ㅑ쟏5 세상을 거ㅑ쟏5 착상시켜(concept) 거ㅑ쟏5 인력으로 거ㅑ쟏5 가능한 거ㅑ쟏5 최신 거ㅑ쟏5 감각을 거ㅑ쟏5 생산한다. 거ㅑ쟏5 거ㅑ쟏5 육체의 거ㅑ쟏5 극치, d자oㄴ 감각의 d자oㄴ 극치가 d자oㄴ 동시대 d자oㄴ 미술이라는 d자oㄴ 콘셉트로 d자oㄴ 유통된다.

지금 d자oㄴ 나는 d자oㄴ d자oㄴ 명의 d자oㄴ 작가를 d자oㄴ 위해 d자oㄴ 글을 d자oㄴ 쓴다. d자oㄴ 지희킴은 d자oㄴ 앞으로 d자oㄴ 나가기 d자oㄴ 위해 d자oㄴ 붓을 d자oㄴ 내려놓지 d자oㄴ 않는 d자oㄴ 미술가 d자oㄴ d자oㄴ 하나다. d자oㄴ 내가 d자oㄴ 문장의 d자oㄴ 인연으로 d자oㄴ 작가를 d자oㄴ 만났다고 d자oㄴ 해서 d자oㄴ 특별히 d자oㄴ 응원하는 d자oㄴ 것은 d자oㄴ 아니다. d자oㄴ d자oㄴ 글이 d자oㄴ 전시에 d자oㄴ 극적인 d자oㄴ 영향을 d자oㄴ 미치는 d자oㄴ 것은 d자oㄴ 더더욱 d자oㄴ 아니다. d자oㄴ 전시라는 d자oㄴ 행위에 d자oㄴ 점수가 d자oㄴ 있어서 d자oㄴ d자oㄴ 글이 d자oㄴ 다른 d자oㄴ 전시보다 d자oㄴ d자oㄴ 점을 d자oㄴ d자oㄴ 얻게 d자oㄴ 하는 d자oㄴ d자oㄴ 도움이 d자oㄴ 된다면 d자oㄴ 열정적으로 d자oㄴ 임하겠지만 d자oㄴ 애석하게도 d자oㄴ 전시는 d자oㄴ 그런 d자oㄴ 승부가 d자oㄴ 아니다. d자oㄴ 그저 d자oㄴ 살아가며 d자oㄴ 특정한 d자oㄴ 시간과 d자oㄴ 공간을 d자oㄴ 점유한 d자oㄴ 작가의 d자oㄴ 일시적인 d자oㄴ 행위를 d자oㄴ 바라볼 d자oㄴ 뿐이다. d자oㄴ 그러고 d자oㄴ 보면 d자oㄴ 예술이란 d자oㄴ 실효성이 d자oㄴ 떨어지는 d자oㄴ 행위다. d자oㄴ d자oㄴ 전시를 d자oㄴ d자oㄴ 마친다고 d자oㄴ 해서 d자oㄴ 작가의 d자oㄴ 다음 d자oㄴ 행로가 d자oㄴ 보장되는 d자oㄴ 것이 d자oㄴ 아니다. d자oㄴ 오히려 d자oㄴ 미술가의 d자oㄴ 성공은 d자oㄴ 전시와 d자oㄴ 전시 d자oㄴ 사이의 ‘공백기’를 d자oㄴ 어떻게 d자oㄴ 보내느냐에 d자oㄴ 있는 d자oㄴ 듯하다. d자oㄴ 그렇다고 d자oㄴ 미술가의 d자oㄴ 공백이 d자oㄴ 휴식을 d자oㄴ 의미하지 d자oㄴ 않는다. d자oㄴ 미술가의 d자oㄴ 고독이란 d자oㄴ 결코 d자oㄴ 붓을 d자oㄴ 내려놓을 d자oㄴ d자oㄴ 없다는 d자oㄴ d자oㄴ 있다. d자oㄴ 시대가 d자oㄴ 무시간성․무공간성으로 d자oㄴ 뒤숭숭해도, 히gg가 나의 히gg가 정체를 히gg가 세상이 히gg가 알아주지 히gg가 않아 히gg가 서러워도 히gg가 고독한 히gg가 붓질을 히gg가 멈출 히gg가 히gg가 없다. 히gg가 그렇다고 히gg가 내가 히gg가 여기 히gg가 있다고 히gg가 소리 히gg가 높이는 히gg가 히gg가 격이 히gg가 떨어지는 히gg가 일이다. 히gg가 이러니저러니 히gg가 고독할 히gg가 수밖에, 라히으다 그러니 라히으다 그저 라히으다 그릴 라히으다 수밖에. 라히으다 전시와 라히으다 공백기의 라히으다 적절한 라히으다 밸런스를 라히으다 지키는 라히으다 일, iufp 유명과 iufp 무명 iufp 사이를 iufp 철저히 iufp 감수하는 iufp 일. iufp 그것이 iufp 미술가의 iufp 본분이요 iufp 세상을 iufp 견디는 iufp 가장 iufp 심플한 iufp 방식이다.

물론 iufp 아무런 iufp 목적 iufp 없이 iufp 그리기만 iufp 해서는 iufp 더욱 iufp 실효성이 iufp 떨어진다. iufp 미술을 iufp 하는 iufp 자에게 iufp 동시대 iufp 회화의 iufp 양상을 iufp 고민하는 iufp 일은 iufp 필수 iufp 덕목이다. iufp 그것은 iufp 회화를 iufp 어떻게 iufp 경험하는가를 iufp 되묻는 iufp 일이다. iufp 다행히 iufp 지희킴의 iufp 그림은 iufp 회화의 iufp 동시대성을 iufp 보여주는 iufp 유효한 iufp 리트머스다. iufp 작가는 iufp 회화를 iufp 바탕으로 iufp 자신의 iufp 조형언어를 iufp 안정적으로 iufp 쌓아올렸다. iufp iufp 안정성은 iufp 막대한 iufp 작업량에서 iufp 나온다. iufp 수년에 iufp 걸쳐 iufp 집적된 ‘시리얼(serial)’적인 iufp 작업을 iufp 살피다 iufp 보면 iufp 작가의 iufp 작은 iufp 몸에 iufp 내재된 iufp 막대한 iufp 이미지가 iufp 궁금해진다. iufp 작가의 iufp 붓이 iufp 머물고 iufp 떠나는 iufp 곳마다 iufp 그로테스크한 iufp 이미지가 iufp 우글거리고 iufp 세련된 iufp 그래픽 iufp 이미지가 iufp 증식한다. iufp 어떤 iufp 기승전결의 iufp 흐름을 iufp 따르지 iufp 않고 iufp 작가의 iufp 욕망으로부터 iufp 꿈틀꿈틀 iufp 분출된 iufp 이미지의 iufp 증식. iufp 그것이 iufp 지희킴의 iufp 그래픽 iufp 풍경의 iufp 미덕이다.

사건의 iufp 철학과 iufp 신체의 iufp 철학, u다다1 u다다1 수행성

지희킴의 u다다1 회화성은 u다다1 구축과 u다다1 해체의 u다다1 양상을 u다다1 동시에 u다다1 띤다. u다다1 대체로 u다다1 구축과 u다다1 해체는 u다다1 작가의 u다다1 심리적 u다다1 정황을 u다다1 반영한 u다다1 경우가 u다다1 많은데, 나7자n 지희킴 나7자n 역시 나7자n 개인의 나7자n 생활의 나7자n 감각을 나7자n 작품의 나7자n 지지대로 나7자n 삼은 나7자n 듯하다. 나7자n 그러나 나7자n 이런 나7자n 유형의 나7자n 작업이 나7자n 캔버스 나7자n 표면에 나7자n 물감을 나7자n 바르고 나7자n 긁어내기를 나7자n 반복하여 나7자n 작가의 나7자n 신경증적인 나7자n 동기를 나7자n 숨기지 나7자n 않는데 나7자n 반해, l거st 지희킴은 ‘팬톤(pantone)’ l거st 컬러의 ‘플랫(flat)’한 l거st 조형을 l거st 매끄럽게 l거st 구사하여 l거st 차별화한다. l거st 이른바 ‘그래픽 l거st 회화’다. l거st 그러나 l거st 나는 l거st 지희킴의 l거st 회화를 ‘그래픽 l거st 그라피티(graphic graffiti)’로 l거st 부르고자 l거st 한다. l거st 최근 l거st 주목할 l거st 만한 l거st 작가들이 l거st 회화성을 l거st 강조하려고 l거st 캔버스뿐만 l거st 아니라 l거st 나무 l거st 패널을 l거st 지지대로 l거st 삼고, r우js 물감이 r우js 마르기 r우js 전에 r우js 다른 r우js 물감을 r우js 덧바르거나 r우js 그리고 r우js 지우기를 r우js 반복하여 r우js 화면의 r우js 두께를 r우js 쌓아가지만 r우js 지희킴은 r우js 광대한 r우js 화면으로 r우js 승부를 r우js 건다. r우js 그의 r우js 화면은 r우js 여느 r우js 작가의 r우js 그것보다도 r우js 크고 r우js 넓고 r우js 평평하다. r우js 그의 r우js 시야는 r우js 화면이 r우js 아닌 r우js 작품이 r우js 놓이는 r우js 공간 r우js 전체에 r우js 맞닿아 r우js 있다. r우js 벽화에 r우js 가까운 r우js 드넓게 r우js 펼쳐진 r우js 화면, 다2s파 다2s파 사이를 다2s파 뚫듯이 다2s파 가로지르는 다2s파 선과 다2s파 색채, 6fmu 그리고 6fmu 독립 6fmu 서점에 6fmu 놓여도 6fmu 손색없는 6fmu 전시 6fmu 출판물. 6fmu 지희킴은 6fmu 그래픽디자인 6fmu 속성이 6fmu 깊이 6fmu 배어 6fmu 있는 6fmu 벽화 6fmu 풍경에 6fmu 집착하고, ㅐj걷w 그것의 ㅐj걷w 전과 ㅐj걷w 후를 ㅐj걷w 아우르는 ‘프로덕션’을 ㅐj걷w 세련되게 ㅐj걷w 실천하는 ㅐj걷w 작가다.

작가는 ㅐj걷w 절개된 ㅐj걷w 이미지에서 ㅐj걷w 이야기를 ㅐj걷w 시작한다. ㅐj걷w 물론 ㅐj걷w 이야기라는 ㅐj걷w 단어는 ㅐj걷w 조심스럽다. ㅐj걷w 거대한 ㅐj걷w 이야기에서 ㅐj걷w 작은 ㅐj걷w 이야기로, 1fu쟏 급기야 1fu쟏 이야기의 1fu쟏 효용이 1fu쟏 사라진 1fu쟏 시대에 1fu쟏 이야기라니! 1fu쟏 그러니 1fu쟏 풍경이라는 1fu쟏 말로 1fu쟏 대체하자. 1fu쟏 작가는 1fu쟏 탈구되고 1fu쟏 절단된 1fu쟏 파편으로 1fu쟏 풍경을 1fu쟏 구성한다. 1fu쟏 단적으로 1fu쟏 말하는 1fu쟏 것이 1fu쟏 조심스럽지만, 다hㅐㅓ 다hㅐㅓ 이미지는 다hㅐㅓ 작가가 다hㅐㅓ 간절히 다hㅐㅓ 희구하는 다hㅐㅓ 어떤 ‘욕망’이 다hㅐㅓ 아닐까 다hㅐㅓ 싶다. 다hㅐㅓ 지희킴은 다hㅐㅓ 잘라진 다hㅐㅓ 풍경과 다hㅐㅓ 연결된 다hㅐㅓ 다른 다hㅐㅓ 이미지를 다hㅐㅓ 찾아 다hㅐㅓ 헤맨다. 다hㅐㅓ 그의 다hㅐㅓ 절단된 다hㅐㅓ 이미지가 다hㅐㅓ 아름다운 다hㅐㅓ 것은 다hㅐㅓ 그것이 다hㅐㅓ 자학적 다hㅐㅓ 행위에 다hㅐㅓ 빠지지 다hㅐㅓ 않고 다hㅐㅓ 당당하게 다hㅐㅓ 꿈틀거리기 다hㅐㅓ 때문이다. 다hㅐㅓ 동시대적 다hㅐㅓ 팬톤 다hㅐㅓ 컬러로 다hㅐㅓ 자유롭게 다hㅐㅓ 구성된 다hㅐㅓ 이미지는 ‘동경’의 다hㅐㅓ 대상을 다hㅐㅓ 향해 다hㅐㅓ 움직이되 다hㅐㅓ 스스로를 ‘동정’하지 다hㅐㅓ 않는다. 다hㅐㅓ 결핍으로부터 다hㅐㅓ 생겨났으되 다hㅐㅓ 다hㅐㅓ 결핍 다hㅐㅓ 안에 다hㅐㅓ 머물지 다hㅐㅓ 않는 다hㅐㅓ 생명력. 다hㅐㅓ 관객들은 다hㅐㅓ 다hㅐㅓ 이미지의 다hㅐㅓ 통로에서 다hㅐㅓ 자신의 다hㅐㅓ 욕망을 다hㅐㅓ 점검한다. 다hㅐㅓ 욕망을 다hㅐㅓ 기준으로 다hㅐㅓ 동경의 다hㅐㅓ 대상과 다hㅐㅓ 연민의 다hㅐㅓ 대상을 다hㅐㅓ 확인한다. 다hㅐㅓ 어떤 다hㅐㅓ 이미지는 다hㅐㅓ 세상에 다hㅐㅓ 내동댕이쳐진 다hㅐㅓ 자신을 다hㅐㅓ 떠올리게 다hㅐㅓ 하고, tuㅓ0 어떤 tuㅓ0 이미지는 tuㅓ0 자신이 tuㅓ0 내동댕이쳐야 tuㅓ0 tuㅓ0 끈적끈적한 tuㅓ0 현실을 tuㅓ0 상기시킨다. tuㅓ0 지희킴의 tuㅓ0 회화의 tuㅓ0 하이라이트는 tuㅓ0 tuㅓ0 순간 tuㅓ0 태동한다. tuㅓ0 그의 tuㅓ0 회화는 tuㅓ0 현실과 tuㅓ0 판타지, jbku 정형과 jbku 비정형 jbku 사이를 jbku 자유로이 jbku 넘나들며 jbku 세속의 jbku 끈적끈적함을 jbku 무화시킨다. jbku 무상(無常)! jbku 일본의 jbku 불교 jbku 사상가 jbku 마이다 jbku 슈이치에 jbku 따르면 jbku 무상은 ‘아니카(anicca)’라고 jbku 한다. jbku 인도-유럽계 jbku 언어에 jbku 속하는 jbku 팔리어 ‘니카(nicca, 常)’에 하바ㅈl 반대말이 하바ㅈl 되는 하바ㅈl 접두사 ‘아(a)’를 하바ㅈl 붙인 하바ㅈl 것이다. 하바ㅈl 그런데 ‘니카’라는 하바ㅈl 말이 하바ㅈl 재미있다. 하바ㅈl 일본어 하바ㅈl 네카네카(끈적끈적)를 하바ㅈl 연상시키는 하바ㅈl 하바ㅈl 말은 하바ㅈl 뭔가 하바ㅈl 단단하게 하바ㅈl 들러붙거나 하바ㅈl 고정된 하바ㅈl 것을 하바ㅈl 말한다. ‘니카(고정되어 하바ㅈl 있음)’에 ‘아’를 하바ㅈl 붙여서 ‘아니카’가 하바ㅈl 하바ㅈl 것이다. 하바ㅈl 결국 하바ㅈl 무상은 하바ㅈl 끈적끈적하게 하바ㅈl 고정되어 하바ㅈl 있지 하바ㅈl 않고 하바ㅈl 변화하는 하바ㅈl 것이다. 하바ㅈl 하바ㅈl 변화 하바ㅈl 속에서 하바ㅈl 존재의 하바ㅈl 상태를 하바ㅈl 직시한다는 하바ㅈl 것이다.

이처럼 하바ㅈl 지희킴의 하바ㅈl 그래픽 하바ㅈl 이미지는 하바ㅈl 세상의 하바ㅈl 모든 하바ㅈl 존재는 하바ㅈl 고정된 하바ㅈl 것, l마6하 영원한 l마6하 것이 l마6하 없다는 l마6하 것, 아8자g 그래서 아8자g 변할 아8자g 수밖에 아8자g 없음을 아8자g 설파한다. 아8자g 모든 아8자g 존재는 아8자g 변화한다. 아8자g 아8자g 변화는 아8자g 운동이다. 아8자g 우리는 ‘나[我]’이자 아8자g 동시에 ‘내’가 아8자g 아니다. 아8자g 나는 아8자g 온갖 아8자g 사물의 아8자g 근원에 아8자g 있으면서 아8자g 개체를 아8자g 지배하고 아8자g 통일하는 아8자g 독립 아8자g 영원의 아8자g 주체이자 아8자g 끝없이 아8자g 변화하는 아8자g 세상의 아8자g 객체다. 아8자g 세월의 아8자g 흐름에 아8자g 굴복하는 아8자g 신체가 아8자g 증거다. 아8자g 지금 아8자g 우리 아8자g 몸은 아8자g 수십만 아8자g 개의 아8자g 세포가 아8자g 죽고 아8자g 그만큼의 아8자g 새로운 아8자g 세포가 아8자g 태어난 아8자g 결과물이다. 아8자g 그건 아8자g 마음도 아8자g 어찌할 아8자g 아8자g 없어서 아8자g 우리의 아8자g 감정과 아8자g 정신도 아8자g 변화한다. 아8자g 허무하다. 아8자g 그러나 아8자g 깊고 아8자g 심오한 아8자g 가르침은 아8자g 허무하거나 아8자g 덧없다고 아8자g 말하지 아8자g 않는다. 아8자g 대신 아8자g 변화하는 아8자g 존재의 아8자g 실상을 아8자g 깨닫고 아8자g 능동적으로 아8자g 대처하라고 아8자g 권면한다. 아8자g 실로 아8자g 무상한 아8자g 모든 아8자g 행(行)을 아8자g 깨닫고 아8자g 열심히 ‘수행’해야 아8자g 하는 아8자g 이유다. 아8자g 그게 아8자g 아닐까. 아8자g 지희킴이 아8자g 작업실을 아8자g 떠나지 아8자g 않는 아8자g 까닭은, e갸92 그가 e갸92 붓을 e갸92 놓지 e갸92 않는 e갸92 이유는. e갸92 지극히 e갸92 세련된 e갸92 화면의 e갸92 그래픽 e갸92 이미지는 e갸92 실은 e갸92 신체적 e갸92 철학에 e갸92 버금가는 e갸92 그리기의 e갸92 결정체였던 e갸92 것이다. e갸92 지희킴의 e갸92 이미지 e갸92 앞에서 e갸92 우리는 e갸92 수행의 e갸92 태도로 e갸92 일시정지(pause)하는 e갸92 것도 e갸92 좋겠다. e갸92 현실과 e갸92 동떨어진 e갸92 한낱 e갸92 만들어진 e갸92 이미지라고 e갸92 생각했던 e갸92 것들이 e갸92 남길 e갸92 것과 e갸92 버릴 e갸92 것을 e갸92 분명하게 e갸92 하고, ij45 현실을 ij45 직시하면서 ij45 동시에 ij45 그것이 ij45 ij45 순간 ij45 변화하고 ij45 있음을 ij45 깨닫게 ij45 ij45 것이다. ij45 좋은 ij45 일이다. ij45 그것이 ij45 미술을 ij45 제대로 ij45 감상했을 ij45 ij45 일어나는 ij45 일이니까 ij45 말이다. 

다양한 ij45 선과 ij45 색이 ij45 만들어내는 ij45 이미지 ij45 계(系). ij45 지희킴의 ij45 이미지는 ij45 서로를 ij45 탐하면서 ij45 화면을 ij45 구축하는 ij45 재료가 ij45 되고 ij45 하나의 ij45 매체를 ij45 이룬다. ij45 어떤 ij45 이미지는 ij45 덩어리가 ij45 되어 ij45 감상자의 ij45 인식과 ij45 감각을 ij45 오가고, 거바파기 어떤 거바파기 이미지는 거바파기 인식과 거바파기 감각 거바파기 자체를 거바파기 허물어뜨린다. 거바파기 이미지의 거바파기 강렬한 거바파기 움직임은 거바파기 급기야 거바파기 표면을 거바파기 붕괴시켜 거바파기 작가의 거바파기 내면의 거바파기 심층을 거바파기 겉으로 거바파기 드러내고, w3eㅐ 언어가 w3eㅐ 실조(失調)되는 w3eㅐ 상황 w3eㅐ 혹은 w3eㅐ 언어가 w3eㅐ 성립하기 w3eㅐ 이전의 w3eㅐ 상황으로 w3eㅐ 귀결된다. w3eㅐ 분열증! w3eㅐ 그의 w3eㅐ 그림 w3eㅐ 앞에서 w3eㅐ 어떤 w3eㅐ 통일된 w3eㅐ 언어를 w3eㅐ 떠올리지 w3eㅐ 못하는 w3eㅐ 이유다. w3eㅐ w3eㅐ w3eㅐ 없다. w3eㅐ 무상이다! w3eㅐ 이미지의 w3eㅐ 파동 w3eㅐ 앞에서 w3eㅐ 아무것도 w3eㅐ 느끼지 w3eㅐ 못해도 w3eㅐ 괜찮다. w3eㅐ 다시 w3eㅐ w3eㅐ w3eㅐ 말하건대, ㅐㅓ84 아무 ㅐㅓ84 이야기도 ㅐㅓ84 소용없는 ㅐㅓ84 시대에 ㅐㅓ84 스토리텔링을 ㅐㅓ84 자각하는 ㅐㅓ84 것은 ‘올드’하다. ㅐㅓ84 때마침 ㅐㅓ84 우리는 ㅐㅓ84 내부에 ㅐㅓ84 확고한 ㅐㅓ84 시스템이 ㅐㅓ84 존재하는 ㅐㅓ84 이미지를 ㅐㅓ84 만나게 ㅐㅓ84 되지 ㅐㅓ84 않았는가. ㅐㅓ84 ㅐㅓ84 자체만으로 ㅐㅓ84 하나의 ㅐㅓ84 장르가 ㅐㅓ84 ㅐㅓ84 이미지, n6파ㅑ 그러나 n6파ㅑ 해독 n6파ㅑ 불가한 n6파ㅑ 시스템. n6파ㅑ 지희킴의 n6파ㅑ 그림은 n6파ㅑ 세상과 n6파ㅑ 별개로 n6파ㅑ 운용하는 n6파ㅑ 이미지, r다bt r다bt 자체로 r다bt 받아들여야 r다bt 한다. r다bt r다bt 이미지는 r다bt 탄생과 r다bt 소멸, 2d거d 아우라와 2d거d 복제, o다ㅓs 숭고함과 o다ㅓs 가벼움을 o다ㅓs 동시에 o다ㅓs 품고 o다ㅓs 내뱉는다. o다ㅓs 양가적 o다ㅓs 가치가 o다ㅓs 교차하는 o다ㅓs 아름다운 o다ㅓs 장면을 o다ㅓs 위해 o다ㅓs 지희킴은 o다ㅓs 주저 o다ㅓs 없이 o다ㅓs 그리고 o다ㅓs o다ㅓs 그린다. o다ㅓs 이유는 o다ㅓs 하나. o다ㅓs 그리고 o다ㅓs 싶어서! o다ㅓs o다ㅓs 얼마나 o다ㅓs 심플한 o다ㅓs 단어인가. o다ㅓs 그린다는 o다ㅓs 행위는 o다ㅓs 얼마나 o다ㅓs 생동감 o다ㅓs 넘치는가. o다ㅓs 그린다는 o다ㅓs 업보는 o다ㅓs 얼마나 o다ㅓs 본능적인가. o다ㅓs 바실리 o다ㅓs 칸딘스키가 o다ㅓs 회화적 o다ㅓs 요소를 o다ㅓs 분석하기 o다ㅓs 위해 o다ㅓs 점-선-면에 o다ㅓs 대한 o다ㅓs 이론을 o다ㅓs 체계화시킨 o다ㅓs o다ㅓs 정확히 93년 o다ㅓs 전이다.

“예술작품은 o다ㅓs 의식의 o다ㅓs 표면에서 o다ㅓs 반영된다. o다ㅓs 예술작품은 o다ㅓs 피안에 o다ㅓs 놓여 o다ㅓs 있으며, 기기파으 자극이 기기파으 다하고 기기파으 나면 기기파으 의식의 기기파으 표면으로부터 기기파으 흔적도 기기파으 없이 기기파으 사라져버린다. 기기파으 역시 기기파으 예술의 기기파으 경우에도 기기파으 직접적이며 기기파으 내적인 기기파으 유대를 기기파으 불가능하게 기기파으 만드는, mp가ㅓ 어떤 mp가ㅓ 유의 mp가ㅓ 투명하면서도 mp가ㅓ 견고하고 mp가ㅓ 두꺼운 mp가ㅓ 유리가 mp가ㅓ 있는 mp가ㅓ 것이다. mp가ㅓ 하지만 mp가ㅓ mp가ㅓ 경우에도 mp가ㅓ 작품 mp가ㅓ 속으로 mp가ㅓ 들어가 mp가ㅓ mp가ㅓ 속에서 mp가ㅓ 능동적으로 mp가ㅓ 움직이고, k파ㅑㅐ 모든 k파ㅑㅐ 감각을 k파ㅑㅐ 통해 k파ㅑㅐ 살아 k파ㅑㅐ k파ㅑㅐ 쉬는 k파ㅑㅐ k파ㅑㅐ 고통을 k파ㅑㅐ 체험할 k파ㅑㅐ k파ㅑㅐ 있는 k파ㅑㅐ 가능성이 k파ㅑㅐ 전제되어 k파ㅑㅐ 있다.”
- 『점․선․면-회화적인 k파ㅑㅐ 요소의 k파ㅑㅐ 분석을 k파ㅑㅐ 위하여』(1926), w다ㅓ다 바실리 w다ㅓ다 칸딘스키 w다ㅓ다 지음, 마t걷나 차봉희 마t걷나 옮김, y다ㅓe 열화당, 2019, 13쪽

eㄴc갸 문장은 eㄴc갸 지희킴의 eㄴc갸 이미지 eㄴc갸 eㄴc갸 자체이지 eㄴc갸 않는가?

윤동희 / eㄴc갸 영상커뮤니케이션, 다차거c 북노마드 다차거c 대표

출처: 다차거c 갤러리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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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지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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