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킴 개인전 : 기묘한 살갗 Uncanny Skin

갤러리소소

Aug. 31, 2019 ~ Sept. 29, 2019

유희와 히pㅑ가 고통, 우7sa 우7sa 무상의 우7sa 이미지

전시를 우7sa 본다는 우7sa 것은 우7sa 빼어난 우7sa 재미는 우7sa 없지만 우7sa 아름다운 우7sa 일이다. 우7sa 컨템퍼러리 우7sa 공간을 우7sa 미술을 우7sa 업으로 우7sa 삼은 우7sa 사람이 우7sa 묵묵히 우7sa 채운다. SNS로 우7sa 우7sa 곳을 우7sa 선택한 우7sa 사람들이 우7sa 공간을 우7sa 찾고 우7sa 다시 SNS로 우7sa 인증한다. 우7sa 언제부턴가 우7sa 미술이라는 우7sa 해시태그가 SNS를 우7sa 수놓고 우7sa 있다. 우7sa 그곳에서 우7sa 미술은 ‘so hot’하다. 우7sa 그러나 우7sa 미술로 우7sa 일상의 우7sa 소임을 우7sa 다한 우7sa 사람들은 우7sa 모른다. 우7sa 미술을 우7sa 한다는 우7sa 것이 우7sa 철저히 우7sa 육체적 우7sa 일임을 우7sa 알지 우7sa 못한다. ‘미술의 우7sa 일’은 우7sa 인식과 우7sa 감각과 우7sa 육체의 우7sa 노동이다. 우7sa 세상은 우7sa 미술가에게 우7sa 단단한 우7sa 하드웨어와 우7sa 유연한 우7sa 소프트웨어를 우7sa 동시에 우7sa 요구한다. 우7sa 아름다움이란 우7sa 그런 우7sa 것이라고 우7sa 정의 우7sa 내린다. 우7sa 세상의 우7sa 요청을 우7sa 외면할 우7sa 우7sa 없어서 우7sa 작가는 우7sa 자신과 우7sa 세상을 우7sa 착상시켜(concept) 우7sa 인력으로 우7sa 가능한 우7sa 최신 우7sa 감각을 우7sa 생산한다. 우7sa 우7sa 육체의 우7sa 극치, e0dx 감각의 e0dx 극치가 e0dx 동시대 e0dx 미술이라는 e0dx 콘셉트로 e0dx 유통된다.

지금 e0dx 나는 e0dx e0dx 명의 e0dx 작가를 e0dx 위해 e0dx 글을 e0dx 쓴다. e0dx 지희킴은 e0dx 앞으로 e0dx 나가기 e0dx 위해 e0dx 붓을 e0dx 내려놓지 e0dx 않는 e0dx 미술가 e0dx e0dx 하나다. e0dx 내가 e0dx 문장의 e0dx 인연으로 e0dx 작가를 e0dx 만났다고 e0dx 해서 e0dx 특별히 e0dx 응원하는 e0dx 것은 e0dx 아니다. e0dx e0dx 글이 e0dx 전시에 e0dx 극적인 e0dx 영향을 e0dx 미치는 e0dx 것은 e0dx 더더욱 e0dx 아니다. e0dx 전시라는 e0dx 행위에 e0dx 점수가 e0dx 있어서 e0dx e0dx 글이 e0dx 다른 e0dx 전시보다 e0dx e0dx 점을 e0dx e0dx 얻게 e0dx 하는 e0dx e0dx 도움이 e0dx 된다면 e0dx 열정적으로 e0dx 임하겠지만 e0dx 애석하게도 e0dx 전시는 e0dx 그런 e0dx 승부가 e0dx 아니다. e0dx 그저 e0dx 살아가며 e0dx 특정한 e0dx 시간과 e0dx 공간을 e0dx 점유한 e0dx 작가의 e0dx 일시적인 e0dx 행위를 e0dx 바라볼 e0dx 뿐이다. e0dx 그러고 e0dx 보면 e0dx 예술이란 e0dx 실효성이 e0dx 떨어지는 e0dx 행위다. e0dx e0dx 전시를 e0dx e0dx 마친다고 e0dx 해서 e0dx 작가의 e0dx 다음 e0dx 행로가 e0dx 보장되는 e0dx 것이 e0dx 아니다. e0dx 오히려 e0dx 미술가의 e0dx 성공은 e0dx 전시와 e0dx 전시 e0dx 사이의 ‘공백기’를 e0dx 어떻게 e0dx 보내느냐에 e0dx 있는 e0dx 듯하다. e0dx 그렇다고 e0dx 미술가의 e0dx 공백이 e0dx 휴식을 e0dx 의미하지 e0dx 않는다. e0dx 미술가의 e0dx 고독이란 e0dx 결코 e0dx 붓을 e0dx 내려놓을 e0dx e0dx 없다는 e0dx e0dx 있다. e0dx 시대가 e0dx 무시간성․무공간성으로 e0dx 뒤숭숭해도, glzg 나의 glzg 정체를 glzg 세상이 glzg 알아주지 glzg 않아 glzg 서러워도 glzg 고독한 glzg 붓질을 glzg 멈출 glzg glzg 없다. glzg 그렇다고 glzg 내가 glzg 여기 glzg 있다고 glzg 소리 glzg 높이는 glzg glzg 격이 glzg 떨어지는 glzg 일이다. glzg 이러니저러니 glzg 고독할 glzg 수밖에, 가쟏nx 그러니 가쟏nx 그저 가쟏nx 그릴 가쟏nx 수밖에. 가쟏nx 전시와 가쟏nx 공백기의 가쟏nx 적절한 가쟏nx 밸런스를 가쟏nx 지키는 가쟏nx 일, 하ah걷 유명과 하ah걷 무명 하ah걷 사이를 하ah걷 철저히 하ah걷 감수하는 하ah걷 일. 하ah걷 그것이 하ah걷 미술가의 하ah걷 본분이요 하ah걷 세상을 하ah걷 견디는 하ah걷 가장 하ah걷 심플한 하ah걷 방식이다.

물론 하ah걷 아무런 하ah걷 목적 하ah걷 없이 하ah걷 그리기만 하ah걷 해서는 하ah걷 더욱 하ah걷 실효성이 하ah걷 떨어진다. 하ah걷 미술을 하ah걷 하는 하ah걷 자에게 하ah걷 동시대 하ah걷 회화의 하ah걷 양상을 하ah걷 고민하는 하ah걷 일은 하ah걷 필수 하ah걷 덕목이다. 하ah걷 그것은 하ah걷 회화를 하ah걷 어떻게 하ah걷 경험하는가를 하ah걷 되묻는 하ah걷 일이다. 하ah걷 다행히 하ah걷 지희킴의 하ah걷 그림은 하ah걷 회화의 하ah걷 동시대성을 하ah걷 보여주는 하ah걷 유효한 하ah걷 리트머스다. 하ah걷 작가는 하ah걷 회화를 하ah걷 바탕으로 하ah걷 자신의 하ah걷 조형언어를 하ah걷 안정적으로 하ah걷 쌓아올렸다. 하ah걷 하ah걷 안정성은 하ah걷 막대한 하ah걷 작업량에서 하ah걷 나온다. 하ah걷 수년에 하ah걷 걸쳐 하ah걷 집적된 ‘시리얼(serial)’적인 하ah걷 작업을 하ah걷 살피다 하ah걷 보면 하ah걷 작가의 하ah걷 작은 하ah걷 몸에 하ah걷 내재된 하ah걷 막대한 하ah걷 이미지가 하ah걷 궁금해진다. 하ah걷 작가의 하ah걷 붓이 하ah걷 머물고 하ah걷 떠나는 하ah걷 곳마다 하ah걷 그로테스크한 하ah걷 이미지가 하ah걷 우글거리고 하ah걷 세련된 하ah걷 그래픽 하ah걷 이미지가 하ah걷 증식한다. 하ah걷 어떤 하ah걷 기승전결의 하ah걷 흐름을 하ah걷 따르지 하ah걷 않고 하ah걷 작가의 하ah걷 욕망으로부터 하ah걷 꿈틀꿈틀 하ah걷 분출된 하ah걷 이미지의 하ah걷 증식. 하ah걷 그것이 하ah걷 지희킴의 하ah걷 그래픽 하ah걷 풍경의 하ah걷 미덕이다.

사건의 하ah걷 철학과 하ah걷 신체의 하ah걷 철학, 쟏ㅓ07 쟏ㅓ07 수행성

지희킴의 쟏ㅓ07 회화성은 쟏ㅓ07 구축과 쟏ㅓ07 해체의 쟏ㅓ07 양상을 쟏ㅓ07 동시에 쟏ㅓ07 띤다. 쟏ㅓ07 대체로 쟏ㅓ07 구축과 쟏ㅓ07 해체는 쟏ㅓ07 작가의 쟏ㅓ07 심리적 쟏ㅓ07 정황을 쟏ㅓ07 반영한 쟏ㅓ07 경우가 쟏ㅓ07 많은데, ㅓjㅑ가 지희킴 ㅓjㅑ가 역시 ㅓjㅑ가 개인의 ㅓjㅑ가 생활의 ㅓjㅑ가 감각을 ㅓjㅑ가 작품의 ㅓjㅑ가 지지대로 ㅓjㅑ가 삼은 ㅓjㅑ가 듯하다. ㅓjㅑ가 그러나 ㅓjㅑ가 이런 ㅓjㅑ가 유형의 ㅓjㅑ가 작업이 ㅓjㅑ가 캔버스 ㅓjㅑ가 표면에 ㅓjㅑ가 물감을 ㅓjㅑ가 바르고 ㅓjㅑ가 긁어내기를 ㅓjㅑ가 반복하여 ㅓjㅑ가 작가의 ㅓjㅑ가 신경증적인 ㅓjㅑ가 동기를 ㅓjㅑ가 숨기지 ㅓjㅑ가 않는데 ㅓjㅑ가 반해, 5기5차 지희킴은 ‘팬톤(pantone)’ 5기5차 컬러의 ‘플랫(flat)’한 5기5차 조형을 5기5차 매끄럽게 5기5차 구사하여 5기5차 차별화한다. 5기5차 이른바 ‘그래픽 5기5차 회화’다. 5기5차 그러나 5기5차 나는 5기5차 지희킴의 5기5차 회화를 ‘그래픽 5기5차 그라피티(graphic graffiti)’로 5기5차 부르고자 5기5차 한다. 5기5차 최근 5기5차 주목할 5기5차 만한 5기5차 작가들이 5기5차 회화성을 5기5차 강조하려고 5기5차 캔버스뿐만 5기5차 아니라 5기5차 나무 5기5차 패널을 5기5차 지지대로 5기5차 삼고, ㅐ기e라 물감이 ㅐ기e라 마르기 ㅐ기e라 전에 ㅐ기e라 다른 ㅐ기e라 물감을 ㅐ기e라 덧바르거나 ㅐ기e라 그리고 ㅐ기e라 지우기를 ㅐ기e라 반복하여 ㅐ기e라 화면의 ㅐ기e라 두께를 ㅐ기e라 쌓아가지만 ㅐ기e라 지희킴은 ㅐ기e라 광대한 ㅐ기e라 화면으로 ㅐ기e라 승부를 ㅐ기e라 건다. ㅐ기e라 그의 ㅐ기e라 화면은 ㅐ기e라 여느 ㅐ기e라 작가의 ㅐ기e라 그것보다도 ㅐ기e라 크고 ㅐ기e라 넓고 ㅐ기e라 평평하다. ㅐ기e라 그의 ㅐ기e라 시야는 ㅐ기e라 화면이 ㅐ기e라 아닌 ㅐ기e라 작품이 ㅐ기e라 놓이는 ㅐ기e라 공간 ㅐ기e라 전체에 ㅐ기e라 맞닿아 ㅐ기e라 있다. ㅐ기e라 벽화에 ㅐ기e라 가까운 ㅐ기e라 드넓게 ㅐ기e라 펼쳐진 ㅐ기e라 화면, qu자1 qu자1 사이를 qu자1 뚫듯이 qu자1 가로지르는 qu자1 선과 qu자1 색채, 거ㄴov 그리고 거ㄴov 독립 거ㄴov 서점에 거ㄴov 놓여도 거ㄴov 손색없는 거ㄴov 전시 거ㄴov 출판물. 거ㄴov 지희킴은 거ㄴov 그래픽디자인 거ㄴov 속성이 거ㄴov 깊이 거ㄴov 배어 거ㄴov 있는 거ㄴov 벽화 거ㄴov 풍경에 거ㄴov 집착하고, 아efk 그것의 아efk 전과 아efk 후를 아efk 아우르는 ‘프로덕션’을 아efk 세련되게 아efk 실천하는 아efk 작가다.

작가는 아efk 절개된 아efk 이미지에서 아efk 이야기를 아efk 시작한다. 아efk 물론 아efk 이야기라는 아efk 단어는 아efk 조심스럽다. 아efk 거대한 아efk 이야기에서 아efk 작은 아efk 이야기로, 하nhb 급기야 하nhb 이야기의 하nhb 효용이 하nhb 사라진 하nhb 시대에 하nhb 이야기라니! 하nhb 그러니 하nhb 풍경이라는 하nhb 말로 하nhb 대체하자. 하nhb 작가는 하nhb 탈구되고 하nhb 절단된 하nhb 파편으로 하nhb 풍경을 하nhb 구성한다. 하nhb 단적으로 하nhb 말하는 하nhb 것이 하nhb 조심스럽지만, 하갸파거 하갸파거 이미지는 하갸파거 작가가 하갸파거 간절히 하갸파거 희구하는 하갸파거 어떤 ‘욕망’이 하갸파거 아닐까 하갸파거 싶다. 하갸파거 지희킴은 하갸파거 잘라진 하갸파거 풍경과 하갸파거 연결된 하갸파거 다른 하갸파거 이미지를 하갸파거 찾아 하갸파거 헤맨다. 하갸파거 그의 하갸파거 절단된 하갸파거 이미지가 하갸파거 아름다운 하갸파거 것은 하갸파거 그것이 하갸파거 자학적 하갸파거 행위에 하갸파거 빠지지 하갸파거 않고 하갸파거 당당하게 하갸파거 꿈틀거리기 하갸파거 때문이다. 하갸파거 동시대적 하갸파거 팬톤 하갸파거 컬러로 하갸파거 자유롭게 하갸파거 구성된 하갸파거 이미지는 ‘동경’의 하갸파거 대상을 하갸파거 향해 하갸파거 움직이되 하갸파거 스스로를 ‘동정’하지 하갸파거 않는다. 하갸파거 결핍으로부터 하갸파거 생겨났으되 하갸파거 하갸파거 결핍 하갸파거 안에 하갸파거 머물지 하갸파거 않는 하갸파거 생명력. 하갸파거 관객들은 하갸파거 하갸파거 이미지의 하갸파거 통로에서 하갸파거 자신의 하갸파거 욕망을 하갸파거 점검한다. 하갸파거 욕망을 하갸파거 기준으로 하갸파거 동경의 하갸파거 대상과 하갸파거 연민의 하갸파거 대상을 하갸파거 확인한다. 하갸파거 어떤 하갸파거 이미지는 하갸파거 세상에 하갸파거 내동댕이쳐진 하갸파거 자신을 하갸파거 떠올리게 하갸파거 하고, ㅐ거hㅓ 어떤 ㅐ거hㅓ 이미지는 ㅐ거hㅓ 자신이 ㅐ거hㅓ 내동댕이쳐야 ㅐ거hㅓ ㅐ거hㅓ 끈적끈적한 ㅐ거hㅓ 현실을 ㅐ거hㅓ 상기시킨다. ㅐ거hㅓ 지희킴의 ㅐ거hㅓ 회화의 ㅐ거hㅓ 하이라이트는 ㅐ거hㅓ ㅐ거hㅓ 순간 ㅐ거hㅓ 태동한다. ㅐ거hㅓ 그의 ㅐ거hㅓ 회화는 ㅐ거hㅓ 현실과 ㅐ거hㅓ 판타지, aewf 정형과 aewf 비정형 aewf 사이를 aewf 자유로이 aewf 넘나들며 aewf 세속의 aewf 끈적끈적함을 aewf 무화시킨다. aewf 무상(無常)! aewf 일본의 aewf 불교 aewf 사상가 aewf 마이다 aewf 슈이치에 aewf 따르면 aewf 무상은 ‘아니카(anicca)’라고 aewf 한다. aewf 인도-유럽계 aewf 언어에 aewf 속하는 aewf 팔리어 ‘니카(nicca, 常)’에 yzvi 반대말이 yzvi 되는 yzvi 접두사 ‘아(a)’를 yzvi 붙인 yzvi 것이다. yzvi 그런데 ‘니카’라는 yzvi 말이 yzvi 재미있다. yzvi 일본어 yzvi 네카네카(끈적끈적)를 yzvi 연상시키는 yzvi yzvi 말은 yzvi 뭔가 yzvi 단단하게 yzvi 들러붙거나 yzvi 고정된 yzvi 것을 yzvi 말한다. ‘니카(고정되어 yzvi 있음)’에 ‘아’를 yzvi 붙여서 ‘아니카’가 yzvi yzvi 것이다. yzvi 결국 yzvi 무상은 yzvi 끈적끈적하게 yzvi 고정되어 yzvi 있지 yzvi 않고 yzvi 변화하는 yzvi 것이다. yzvi yzvi 변화 yzvi 속에서 yzvi 존재의 yzvi 상태를 yzvi 직시한다는 yzvi 것이다.

이처럼 yzvi 지희킴의 yzvi 그래픽 yzvi 이미지는 yzvi 세상의 yzvi 모든 yzvi 존재는 yzvi 고정된 yzvi 것, 히기gr 영원한 히기gr 것이 히기gr 없다는 히기gr 것, 하r나s 그래서 하r나s 변할 하r나s 수밖에 하r나s 없음을 하r나s 설파한다. 하r나s 모든 하r나s 존재는 하r나s 변화한다. 하r나s 하r나s 변화는 하r나s 운동이다. 하r나s 우리는 ‘나[我]’이자 하r나s 동시에 ‘내’가 하r나s 아니다. 하r나s 나는 하r나s 온갖 하r나s 사물의 하r나s 근원에 하r나s 있으면서 하r나s 개체를 하r나s 지배하고 하r나s 통일하는 하r나s 독립 하r나s 영원의 하r나s 주체이자 하r나s 끝없이 하r나s 변화하는 하r나s 세상의 하r나s 객체다. 하r나s 세월의 하r나s 흐름에 하r나s 굴복하는 하r나s 신체가 하r나s 증거다. 하r나s 지금 하r나s 우리 하r나s 몸은 하r나s 수십만 하r나s 개의 하r나s 세포가 하r나s 죽고 하r나s 그만큼의 하r나s 새로운 하r나s 세포가 하r나s 태어난 하r나s 결과물이다. 하r나s 그건 하r나s 마음도 하r나s 어찌할 하r나s 하r나s 없어서 하r나s 우리의 하r나s 감정과 하r나s 정신도 하r나s 변화한다. 하r나s 허무하다. 하r나s 그러나 하r나s 깊고 하r나s 심오한 하r나s 가르침은 하r나s 허무하거나 하r나s 덧없다고 하r나s 말하지 하r나s 않는다. 하r나s 대신 하r나s 변화하는 하r나s 존재의 하r나s 실상을 하r나s 깨닫고 하r나s 능동적으로 하r나s 대처하라고 하r나s 권면한다. 하r나s 실로 하r나s 무상한 하r나s 모든 하r나s 행(行)을 하r나s 깨닫고 하r나s 열심히 ‘수행’해야 하r나s 하는 하r나s 이유다. 하r나s 그게 하r나s 아닐까. 하r나s 지희킴이 하r나s 작업실을 하r나s 떠나지 하r나s 않는 하r나s 까닭은, ag5으 그가 ag5으 붓을 ag5으 놓지 ag5으 않는 ag5으 이유는. ag5으 지극히 ag5으 세련된 ag5으 화면의 ag5으 그래픽 ag5으 이미지는 ag5으 실은 ag5으 신체적 ag5으 철학에 ag5으 버금가는 ag5으 그리기의 ag5으 결정체였던 ag5으 것이다. ag5으 지희킴의 ag5으 이미지 ag5으 앞에서 ag5으 우리는 ag5으 수행의 ag5으 태도로 ag5으 일시정지(pause)하는 ag5으 것도 ag5으 좋겠다. ag5으 현실과 ag5으 동떨어진 ag5으 한낱 ag5으 만들어진 ag5으 이미지라고 ag5으 생각했던 ag5으 것들이 ag5으 남길 ag5으 것과 ag5으 버릴 ag5으 것을 ag5으 분명하게 ag5으 하고, 으다차1 현실을 으다차1 직시하면서 으다차1 동시에 으다차1 그것이 으다차1 으다차1 순간 으다차1 변화하고 으다차1 있음을 으다차1 깨닫게 으다차1 으다차1 것이다. 으다차1 좋은 으다차1 일이다. 으다차1 그것이 으다차1 미술을 으다차1 제대로 으다차1 감상했을 으다차1 으다차1 일어나는 으다차1 일이니까 으다차1 말이다. 

다양한 으다차1 선과 으다차1 색이 으다차1 만들어내는 으다차1 이미지 으다차1 계(系). 으다차1 지희킴의 으다차1 이미지는 으다차1 서로를 으다차1 탐하면서 으다차1 화면을 으다차1 구축하는 으다차1 재료가 으다차1 되고 으다차1 하나의 으다차1 매체를 으다차1 이룬다. 으다차1 어떤 으다차1 이미지는 으다차1 덩어리가 으다차1 되어 으다차1 감상자의 으다차1 인식과 으다차1 감각을 으다차1 오가고, 쟏pk으 어떤 쟏pk으 이미지는 쟏pk으 인식과 쟏pk으 감각 쟏pk으 자체를 쟏pk으 허물어뜨린다. 쟏pk으 이미지의 쟏pk으 강렬한 쟏pk으 움직임은 쟏pk으 급기야 쟏pk으 표면을 쟏pk으 붕괴시켜 쟏pk으 작가의 쟏pk으 내면의 쟏pk으 심층을 쟏pk으 겉으로 쟏pk으 드러내고, 카9k가 언어가 카9k가 실조(失調)되는 카9k가 상황 카9k가 혹은 카9k가 언어가 카9k가 성립하기 카9k가 이전의 카9k가 상황으로 카9k가 귀결된다. 카9k가 분열증! 카9k가 그의 카9k가 그림 카9k가 앞에서 카9k가 어떤 카9k가 통일된 카9k가 언어를 카9k가 떠올리지 카9k가 못하는 카9k가 이유다. 카9k가 카9k가 카9k가 없다. 카9k가 무상이다! 카9k가 이미지의 카9k가 파동 카9k가 앞에서 카9k가 아무것도 카9k가 느끼지 카9k가 못해도 카9k가 괜찮다. 카9k가 다시 카9k가 카9k가 카9k가 말하건대, 갸ka7 아무 갸ka7 이야기도 갸ka7 소용없는 갸ka7 시대에 갸ka7 스토리텔링을 갸ka7 자각하는 갸ka7 것은 ‘올드’하다. 갸ka7 때마침 갸ka7 우리는 갸ka7 내부에 갸ka7 확고한 갸ka7 시스템이 갸ka7 존재하는 갸ka7 이미지를 갸ka7 만나게 갸ka7 되지 갸ka7 않았는가. 갸ka7 갸ka7 자체만으로 갸ka7 하나의 갸ka7 장르가 갸ka7 갸ka7 이미지, 차우ㅓ바 그러나 차우ㅓ바 해독 차우ㅓ바 불가한 차우ㅓ바 시스템. 차우ㅓ바 지희킴의 차우ㅓ바 그림은 차우ㅓ바 세상과 차우ㅓ바 별개로 차우ㅓ바 운용하는 차우ㅓ바 이미지, 7f34 7f34 자체로 7f34 받아들여야 7f34 한다. 7f34 7f34 이미지는 7f34 탄생과 7f34 소멸, 나f0걷 아우라와 나f0걷 복제, lvox 숭고함과 lvox 가벼움을 lvox 동시에 lvox 품고 lvox 내뱉는다. lvox 양가적 lvox 가치가 lvox 교차하는 lvox 아름다운 lvox 장면을 lvox 위해 lvox 지희킴은 lvox 주저 lvox 없이 lvox 그리고 lvox lvox 그린다. lvox 이유는 lvox 하나. lvox 그리고 lvox 싶어서! lvox lvox 얼마나 lvox 심플한 lvox 단어인가. lvox 그린다는 lvox 행위는 lvox 얼마나 lvox 생동감 lvox 넘치는가. lvox 그린다는 lvox 업보는 lvox 얼마나 lvox 본능적인가. lvox 바실리 lvox 칸딘스키가 lvox 회화적 lvox 요소를 lvox 분석하기 lvox 위해 lvox 점-선-면에 lvox 대한 lvox 이론을 lvox 체계화시킨 lvox lvox 정확히 93년 lvox 전이다.

“예술작품은 lvox 의식의 lvox 표면에서 lvox 반영된다. lvox 예술작품은 lvox 피안에 lvox 놓여 lvox 있으며, 자j걷x 자극이 자j걷x 다하고 자j걷x 나면 자j걷x 의식의 자j걷x 표면으로부터 자j걷x 흔적도 자j걷x 없이 자j걷x 사라져버린다. 자j걷x 역시 자j걷x 예술의 자j걷x 경우에도 자j걷x 직접적이며 자j걷x 내적인 자j걷x 유대를 자j걷x 불가능하게 자j걷x 만드는, 으자사나 어떤 으자사나 유의 으자사나 투명하면서도 으자사나 견고하고 으자사나 두꺼운 으자사나 유리가 으자사나 있는 으자사나 것이다. 으자사나 하지만 으자사나 으자사나 경우에도 으자사나 작품 으자사나 속으로 으자사나 들어가 으자사나 으자사나 속에서 으자사나 능동적으로 으자사나 움직이고, 0dsk 모든 0dsk 감각을 0dsk 통해 0dsk 살아 0dsk 0dsk 쉬는 0dsk 0dsk 고통을 0dsk 체험할 0dsk 0dsk 있는 0dsk 가능성이 0dsk 전제되어 0dsk 있다.”
- 『점․선․면-회화적인 0dsk 요소의 0dsk 분석을 0dsk 위하여』(1926), l7ln 바실리 l7ln 칸딘스키 l7ln 지음, 0마ㅓz 차봉희 0마ㅓz 옮김, uㅓ거t 열화당, 2019, 13쪽

4ㅓㄴㅓ 문장은 4ㅓㄴㅓ 지희킴의 4ㅓㄴㅓ 이미지 4ㅓㄴㅓ 4ㅓㄴㅓ 자체이지 4ㅓㄴㅓ 않는가?

윤동희 / 4ㅓㄴㅓ 영상커뮤니케이션, 7tit 북노마드 7tit 대표

출처: 7tit 갤러리소소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참여 작가

  • 지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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