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래블 GENDER TRAVEL

홍천미술관

2019년 9월 21일 ~ 2019년 9월 29일

2019 강원문화재단 문화예술공간지원사업
홍천 지역문화 공간 ‘분홍공장’: “지역, 젠더를 말하다”

《젠더 트래블》 큐레이터 노트
안대웅

오래전 이건용과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한 에피소드가 종종 생각이 난다. 1970년대 초 이건용은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를 받았는데, 당시 한국에서 해외여행은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더군다나 제대로 된 펀딩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탓에, 작가 신분으로 티켓 값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끝내 그가 파리에 갈 수 있었던 방법은 ‘입양아 에스코트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근 50년 전 한국의 미술이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은 그런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강력하게 표방했듯이, 90년대 이래 한국미술은 꾸준히 국제화에 힘썼고, 국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대중소 규모의 행사가 끊임없이 기획되었다. 지금 현대미술가의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는 트래블러(traveler)다. 이를 위한 펀딩은 비할 데 없이 증가했고, 리서치를 위해, 더 좋은 아트 레지던시를 찾아서, 국제 미술 행사 참가를 위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은 오늘날 현대미술가에게 익숙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건용과 파리를 이어준 것이 공교롭게도 입양아였듯이, 예술가의 트래블이 매끄러운 표면 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피해자로서, 때때로 액티비즘의 중심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젠트리파이어(gentrifier)로서, 젠트리피케이션의 출발선에 서 있기도 하다. 이들이 더 좋은 펀딩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고, 더 좋은 기회와 스펙을 찾아 새로운 전시에 참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미술계 경쟁 체제가 유례없이 강화되는 것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지만, 또 한편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궁핍과 죽음에 실제로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의 트래블은 실로 안정된 무엇과 거리가 멀다. 되려 트래블이 트러블을 일으키거나, 트래블 자체에 트러블이 포함되어 있다. 트래블의 어원인 고대 프랑스어 travailer에 고역이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것은, 내게는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이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안산의 작은 대안공간인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에서 일하며 소위 ‘커뮤니티아트’라고 불리는 한국형 공공미술-제도에 직면하면서부터다. ‘공공미술은 공공선을 위한 것’이라는 제도적 정식 아래에서 커뮤니티아티스트의 역할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커뮤니티아티스트는 애초부터 커뮤니티의 일원도 아니고, 한국의 예술이 기본적으로 삶과 유리되어 있으며, 예술의 근본적인 속성 자체가 삶에 유용한 것도 아니어서, 이들의 활동은 대다수 지역의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됨에도 불구하고,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의미에서든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있었다―최소한 공식적 시선에 들어오는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결과는 젠트리피케이션이고, 가장 실패한 사례는 커뮤니티의 잔해이며, 대다수 프로젝트는 이 사이에서 진동하며, 아티스트와 커뮤니티는 둘 다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커뮤니티를 향한 커뮤니티아티스트의 진정성은 고작 트래블러의 깊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만약, 민족지학적 라포가 거짓말 따위로 드러난다면, 예술가의 트래블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언젠가부터 미술계에서 사용하는 지역이란 낱말이 신경 쓰였다. 내가 알기로 대체로, 최소한 한국 미술계에서 지역은 비서울권역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서 서울과 비서울을 가를까? 먼저 양의 문제가 있다. 1993년 중앙일보 기사는 91년 기준, 서울의 전시가 전국의 61%로, 중앙집중화를 지적하고 있다. 아주 최근, 뉴시스에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정부 지원 사업 10건 중 7건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근 30년 가까이 서울과 비서울의 격차가 꾸준히 이어졌다는 수치는 놀랍지만,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 기사의 전제였다. 많은 것이 곧 좋은 것이다라는. 여기서 대개 많다는 것은 미술대학과 미술관, 갤러리, 미술 인구 등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이는 지방 소도시가 결여한 것이다. 간단히 지역은 미개발되었다는.

한편, 질의 문제가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미술 활동은 토착적 미술 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이것이 소위 말하는 동시대미술이 아니라는 것에는 지금까지 암묵적 합의가 있어 왔다. 다시 말해 동시대미술이 국제 미술 사회와 연결된 현재주의라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은 지역의 미술이 곧 후진 미술이라는 근거가 되는데, 여기서 시간은 중요한 문제다. 즉, 지역은 서울과 뉴욕의 현재와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과거의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시대착오적이라는.

이런 토건주의와 현재주의의 응시는 지금까지 지역의 문화적 공간을 발작적 상황으로 몰아넣어 왔다. 따라잡기―예를 들어 지역 레지던시와 비엔날레의 건립―와 떨어지기―예를 들어 전통 문화 복원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인데, 어떤 경우에도 중심을 향한 강박이 있다. 그래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중심과 나란히 서길 원할수록 지역은 중심으로부터 포착된 정체성을 극단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역설. 이때의 정체성이란 대개 토착적이고, 미개발된, 원시적인 것이며, 심지어 많은 경우에 여성적인 형상으로 재현된다. 오래 전 레이 초우(Rey Chow)는 이를 원시적 열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초우는 중국의 5세대 감독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이들이 중국의 원형을 원시적인 것으로 형상화하는 이유는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내면화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지역 사회를 향한 예술가의 열정―지역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이런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재현 역시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며, 영화와 다르게, 시간을 두고 장소에 직접 가서 진행하는, 보다 촉각적이고 수행적인 미술이라면 특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지역 사회를 방문한 예술가가 공동체와 행정과 작든지 크든지 트러블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늘 잡음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만약 재현의 트러블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트러블을 어떻게 성찰하는지가 내게는 중요해 보였다. 이 말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의 서문에 나오는 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트러블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최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76) 나는 젠더의 트러블과 지역의 트래블을 나란히 놓고 생각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재현의 정치의 공과 실을 따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성 주체의 적절한 재현은 여성의 잘못된 재현을 바로잡고 합법화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버틀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재현의 정치가 여성 주체를 사법적 권력이 생산하는 꼭 그만큼의 재현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었다. 버틀러는 묻는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일관되고 안정된 주체로 확립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젠더 관계를 규제하고 물화하는 것은 아닐까?”(95) 이는 내가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지역 정체성을 둘러싼 재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며, 사실 지역이 여성의 알레고리라는 점에서 두 문제는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지역의 프로젝트에서 예술가는 일종의 민족지학자로서의 태도를 요구받았다. 지역에 들어가서 최대한 동화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소기의 목적을 서서히 이루는 것이,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지역 프로젝트를 임하는 예술가의 미덕인 것처럼 알려졌다. 지역이 여성이나 어린아이, 노인 같은 취약한 대상이라는 전제는 여기서 명확하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이는 프로젝트의 공식적 발화에 불과하며, 비공식적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예술가는 언제나 트러블메이커다.

이 전시에서 나는 예술가의 지역 방문이 단순히 트래블에 불과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며, 오히려 최선의 트래블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분홍공장은 연간 기획인 ‘젠더 지리학’에 따라서 예술가를 모집했는데, 프로그램 디렉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지역 젠더 투어리즘으로 보였다. 내가 감히 이 프로그램을 투어리즘으로 다소 가볍게 언급하는 것을 다소 의도적인 것이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투어의 목적은 약한 연결을 위해서이며, 이는 역으로 강한 연결을 끊어 내기 위해서다. 아즈마에 따르면, 강한 연결에서 인간은 주어진 입력을 단지 출력할 뿐인 기계가 된다. 반대로, 약한 연결에서는 제한되었던 욕망이 다시 머리를 내밀며, 여기에는 소위 말하는 노이즈가 가득하다. 버틀러가 최선의 트러블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듯이, 아즈마에게 노이즈는 곧 기회다. 투어는 그런 면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현대적 고안물이며, 내가 아는 한, 예술가는 욕망을 다스리는 최고의 전문가다.

분홍공장이 투어 프로그램으로 지역과 젠더로 들어갈 수 있는 채널을 열었다면, 예술가는 그 길을 따라 지역의 신비로운 풍경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나 역사에, 시장 사람들에, 군대와 지역 행정에 매혹되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젠더와 지역이라는 양 무게추를 가볍게 만든다고 질타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이끌림조차 부정한다면, 내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젠더와 지역이라는 정체성 아래에 억압된 수많은 것의 몫은 여전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끌림은 최소한 무언가를 대면하게 하고 범상한 풍경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특별함이 꼭 가볍게 취급될 필요는 없으며, 우리는 이를 장소를, 삶을 재성찰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여러분은 이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감히 직접 와서 보라고, 트래블을 권하고 싶다. (19.9.21.)

참여작가: 고산홍, 윤결, 윤정미, 이지영, 이해반, 임은정, 전수현(이상 한국), 만프레드 알레이트(Manfred Aleithe, 독일), 이프(IF, 독일), 흐어즈커(贺子珂 / He Zike, 중국)

큐레이터: 안대웅
디렉터: 용해숙
프로그램 디렉터: 김민관
번역자: 얀 크로이첸베르그(Jan Creutzenberg)

주관: 홍천 지역문화 공간 ‘분홍공장’
후원: 강원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강원문화재단

출처: 홍천미술관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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