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혜 - 겹으로 쌓인 기억 : 여름방학

갤러리도스

2020년 8월 12일 ~ 2020년 8월 18일

별거 아니기에 더 눈길을 끄는
갤러리도스 큐레이터 김치현

오늘의 만족을 채우는 얇은 기쁨은 매끄럽게 반짝이는 물건에서 비롯되지만 지난 시간을 되살리고 미소 짓게 해주는 깊은 행복은 낡은 물건의 먼지를 닦아냈을 때 드러나는 광택에 스며있다. 사람이 만들어낸 공산품은 특유의 단순한 편리와 저렴함으로 인해 삶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짧은 수명을 지니고 있기에 기능을 상실하면 볼품없는 모습으로 비하되기도 한다. 많은 문학에서 낡고 망가진 물건은 자연이 지닌 영원한 순환과 대비되는 덧없고 부정적인 현실과 자신에 대한 투영이었지만 정인혜는 그곳에서 지난 추억의 아지랑이 같은 소음과 향기를 떠올린다. 

작품은 고유의 색을 대부분 상실한 채 무채색으로 표현되었다. 어린 시절을 흑백으로 기억하는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색이 흐려진 사물은 동시대의 시간성이 느껴지지 않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단순히 색 조정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표면을 가득 채운 흙물의 붓 터치 효과는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빠르고 간편하게 처리된 모노톤 필터가 아닌 작가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켜켜이 쌓이고 반복된 사물의 기억을 연상케 한다. 표면을 가득 채운 질감에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부터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누적된 시간성이 담겨있으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희뿌연 색감은 분명히 떠오르지만 생생했던 당시의 순간에 비해 안개처럼 모호한 사람의 기억이 지닌 한계와 그로인해 더 소중하고 뜻깊어지는 추억의 특성을 보여준다. 

작품들은 일종의 조합을 지니며 군을 형성하고 있다. 서로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물의 나열은 과거 정물화에서 보이는 무작위적인 정물의 배치와 닮아있다. 성인이 된 작가의 어린 시절은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90년대 초반의 가정과 학교 사이의 거리가 지닌 시시콜콜한 동시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보통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는 구식라디오와 향로처럼 생긴 연필꽂이 그리고 뻐꾸기시계처럼 당시에는 보편적이었지만 지금은 쓰이지 않는 물건들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형태가 변화하지 않은 생필품과 함께 당시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오늘과 지난날의 평범한 순간을 연결한다. 

작품은 단단하게 굳어졌지만 사물로부터 연상되는 추억이 지닌 습기와 향기를 잃지 않고 박제되어 있다. 작가가 빚어낸 사물을 통해 떠올리는 기억은 지금 청년층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20대와 30대의 연령층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관객들이 연령대에 구분 없이 작품에 냄새와 소리가 없음에도 여러 감각을 동시에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개인들이 지닌 소박한 추억의 모양과 무게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중히 모은 흙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진 도자기는 다시 유약의 과정과 가마니에서의 열을 견디고 선별되어 감상자의 눈앞에 설 수 있다. 정인혜의 작품은 앞서 이야기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일반 관객이 쉽게 다가서기 힘든 고급 도자기가 아닌 편안하고 평범한 화면으로 채워진 일상속의 익숙한 물체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과거인 동시에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다.

출처: 갤러리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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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정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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