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구 개인전 : 밀물이 들어올 때 Byungkoo Jeon : When the Tide Comes In

이유진갤러리

2021년 3월 4일 ~ 2021년 4월 3일

밀물이 들어올 때
이성휘

전병구의 회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장면이나 대상에서 시작된다. 그는 매일 지나다니는 길, 뒷산, 동네 하천 주변 등 특별할 것 없는 주변 공간들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 감각은 실재를 넘어 불현듯 찾아오는 기시감 같은 것이기도 하고, 익숙한 일상이 돌연 낯설어지는 생경함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까이에 있지만 먼 것들, 현실 너머 어느 먼 곳의 세계를, 말이 없는 그림의 세계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지금 그의 작업이 향하는 곳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회화를 규정하려 들수록 모호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화가의 숙명에 대한 작가의 고백으로도 들린다. 이 글은 지난 5-6년 간 전병구의 작업에서 지속되어온 특징과 현상,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 감지되는 새로운 징후를 살펴보면서 그의 회화가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함께 향해보고자 한다.

이미지의 시작

필자가 전병구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제3의 과제전》(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15)에서였다.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가 인상깊었고, 그림이 주는 헛헛한 감정 때문에 마치 단편영화의 스틸 컷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는 영화나 인터넷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온 이미지를 수집하거나 직접 촬영한 스냅사진들 중에서 회화의 소재를 찾았다. 직관적이고 임의적으로 수집되는 이미지들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시각적 흥미로움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수집된 이미지들은 그에게 일상의 파편에 가까우나, 캔버스의 크기, 물감의 농도와 붓질, 색채 등의 조절을 통하여 캔버스 위에서 독특한 공기를 가진 이미지로 재탄생 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일상과의 거리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시기 전병구는 자신의 작업을 ‘선택의 풍경(selected landscape)’이라고 명명하며 이미지의 ‘선택’을 강조하였다. 이 선택은 원본 이미지의 일차적인 선택뿐만 아니라 캔버스 화면 위에서 원본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 반영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선택은 회화 이미지의 정서로 이어진다. 그의 작업은 사진을 원본으로 삼지만 사진의 디테일한 정보는 많이 생략한 채 오히려 작가가 이미지를 선택했을 순간에 지녔던 어떤 정서가 가득 담기곤 했다. 그런데 센티멘탈하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이 정서는 작품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품 제목과 나란히 놓고 볼 때 더 강렬해진다. 예를 들어 영화 장면을 소스로 한 <봄날은 간다>(2015)는 제목을 확인하기 전에는 어두운 밤 불빛이 흐릿한 아파트를 올려다본 흔한 장면일 뿐이다. 그러나 제목과 병치되는 순간 영화 장면들이 머리에 스치고, OST까지 연상되면서 영화의 정서가 그림으로 투영되기 시작된다. 일반적일 수도 있는 이미지가 특별해지는 순간이자, 이미지 해석이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병구는 영화에서 이미지를 가져올 경우 영화 제목을 그대로 작품 제목으로 사용하곤 했는데, <남과 여>(2016), <어느 하녀의 일기>(2015),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2015)이 그 예다. 염소 세 마리가 해안가 언덕에서 뛰노는 광경을 그린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경우 제목을 보지 않고서는 이미지의 출처를 가늠할 수가 없다. 인터넷상에서 흔하게 돌아다니는 스틸 컷도 아니다. 실제 영화 장면에는 두 소녀가 동물들과 같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인물들은 생략한 채 염소들만 그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모호한 이미지는 작품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비범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모호한 이미지에 상대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을 병치함으로써, 회화가 지닌 차원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반들거리는 물질적 표면으로만, 또는 이미지의 재현으로만 한정시킬 수 없으며, 그 모호한 본질은 물질이나 재현 너머 좀 더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화의 시간

대략 2015년 전후, 전병구의 초기 작업들 중에는 24 x 32 cm 정도의 유화용 종이에 그린 작업들이 다수 있다. 습작으로 여길 수도 있고, 초기작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이 작업들을 필자는 2016년 여름 작가가 머물던 양주 레지던시에서 박스 채로 실견한 적이 있다. 이때 본 종이 작업들 중에서 나무와 집이 있는 이미지를 4장의 종이에 반복해 그린 것이 있었다. 작가가 세잔의 그림을 모사했다고 말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각 그림 상단에는 ‘두껍게-중성’, ’얇게-중성-화이트’, ‘두껍게-순색’, ‘얇게-순색’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작가가 당시 그림의 색조와 물감의 두께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고민하고 분석했는지 보여주는 메모들이다. 당시 전병구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다 그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은 캔버스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물감의 농도에 따른 붓질 조절 방법과 물감의 발림, 마르는 속도를 분석해야 했다. 그 결과 메모가 되어 있었던 4장의 이미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 방식만 선택했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 초창기 그의 작업들은 대체로 물감의 농도를 묽게 하여 붓자국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분명하지만 색채는 순색조와 중간색조를 다양하게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병구가 캔버스 위에서 ‘독특한 공기’를 지닌 이미지를 만들고자 택한 색채는 주로 제한된 색상과 중간색조에 의한 것이었다. 우선 팔레트에서 사용한 색상의 수가 제한적인 이유는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므로 동일 계열의 색상 위주로 진행했을 때 그림의 속도를 만들 수 있었을 테다. 일례로, <여름방학>(2014)은 녹색 계열과 회색 계열의 색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한다. 별색인 살구색으로는 교각과 인물의 피부를 한꺼번에 칠했는데 색상의 가짓수를 제한하는 방법이다. 얇게 사용한 물감으로 인하여 화면은 짧은 붓질의 스트로크가 두드러지는데, 이 스트로크가 드러내는 물성 자체가 그림의 감정이자 내러티브가 된다.

한편 중간색조는 화면상에서 태양광이나 조명의 존재감을 미미하게 만든다. 전병구의 작업은 화면상에서 빛, 즉 광원이 하는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진을 참조하는 작가들의 그림에서 빛의 존재감은 강렬한 편인데(이를 통해 사진의 원본성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전병구의 회화는 빛보다는 공기를 중시한다. 예컨대, 산 골짜기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굴뚝과 주변 산세를 그린 <Untitled>(2017)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기원근법을 연상시킨다. 사물의 색이 대기에 의해서 다르게 보이는 것, 특히 사물은 멀리 있을수록 푸르게 보이는 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전병구의 회화에서 공기는 원근 그 자체나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순간에 그것을 관통하는 자신의 정서를 캔버스에 덧입힐 수 있을 때 회화가 성립하는 것이다.

회화의 방향, 유희

앞서 말한대로 전병구는 그간 주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추구했지만, 최근 그는 시간을 두고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작업을 동시에 시도하는 중이다. 작가는 상반된 방식이지만 두 가지 방식 모두 “불필요한 재현적 요소를 줄이고, 그리기 자체에 대한 나의 유희를 잃지 않으려는 시도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그리기에 대한 유희’를 강조하는 점이 사뭇 흥미롭다. 사실 최근작들은 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린 그림에서도 이전의 그림들과 다른 변화가 감지되는데 붓질의 스트로크가 더 짧고 규칙적이며 꽤 촘촘하지만 리드미컬하다는 것이다. <장마>(2019), <Salt House>(2019) 등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 짧고 촘촘한 붓자국이 만들어낸 형태와 리듬을 회화의 조형적 요소로 적극 끌어들였다. 반면, 몇 달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라고 했던 <진눈깨비>(2020)는 붓자국보다는 색면과 그라데이션, 그리고 세필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는 물감이 마르는 것을 지켜보며 레이어를 서서히 쌓아 올려 그라데이션을 만들고, 눈발이나 나무의 잔가지는 세필로 묘사하였다. 난간에 새가 앉아 있는 그림인 <어느 날>(2020)이나, 건물 모서리에 새가 앉아 있다가 날아간 것 같은 2점의 <무제>(2020) 작업은 붓자국이 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건축물의 기하학적 형태와 직선, 그리고 날카로운 엣지가 시선을 끄는 이 작업들은 작가가 구도와 면 분할, 색채 구성과 같은 형식적 요소에 좀더 몰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는 이 작업들의 색조에서 작가 특유의 침묵과도 같은 공기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재현적 요소’를 줄여서(심지어 새도 날아가고) 선, 면 그리고 색채만 남은 그림이 건축적 공간으로써, 또 회화로써 충족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전병구는 최근에 추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회화의 어떤 측면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재현적 요소를 줄이며 최소한의 조형적 요소만으로 그리기를 시도하는 것은 그가 반복적으로 작업 소재로 삼았던 야구장 그라운드 작업들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3점의 <Stadium>(2019) 시리즈를 살펴보자. 단체전이었던 《그린 그린 그림》(이유진 갤러리, 2019)에 크기 순서대로 나란히 걸려 소개되기도 했던 이 작품들은 캔버스 크기와 가로, 세로 비율이 약간씩 다르지만 동일한 야구장의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그린 그림이다. 각 그림마다 색조의 차이가 있으며, 마운드를 잇는 하얀 직선과 원, 사각형은 똑같다. 세 작품을 나란히 두고 바라보다 보면 차이와 반복적 요소를 비교 분석하게 된다. 야구장 그라운드의 기하학적 패턴, 그야말로 평면적 대상을 캔버스 평면으로 가져올 때, 붓질의 스트로크는 기묘한 조형 작용을 한다. 불규칙적인 붓질이 비스듬한 부감 시선을 교란시키는 가운데 곧게 그려진 하얀 직선은 매끈하게 좌우로 뻗는다. 이 흰색 선들은 그림이 마른 뒤 덧그려진 것 같다. 만약 이 선들이 없었다면 이 그림들은 부감 시선도, 야구장이라는 재현 대상도 충분히 지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제목을 야구장이라고 명시한만큼 우리의 눈은 얼마나 사실적인가와 같은 재현의 리얼리티를 확인하기 보다는 화면의 조형적 요소들에 집중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의 초기작인 <3개의 원과 3개의 기둥>(2015)에서 이미 나타났던 방식이다.

한편, 동명의 개인전 제목으로 선택되기도 한 작품 <밀물이 들어올 때>(2020)는 해안가에 서 있는 인물을 그린 작업이다. 이 작품은 언뜻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바위산에 올라서서 광활한 안개 바다를 내려다보는 프리드리히의 인물이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나 숭고를 불러일으킨다면, 전병구의 인물은 시선을 바로 발 아래로 향하고 있어 자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심상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인물의 개인적 심상이 이 작품에 담긴 작가의 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 좀더 다른 점이 무엇인지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전병구 특유의 중간색조, 즉 화면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중간 채도가 사용되지 않은 그림이다. 작가는 이 그림에 유화 물감이 아닌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였다. 물감층을 얇게 쓰는 방식과 켜켜이 쌓아 올리는 방식 사이를 오가는 실험 중인 그에게 빠르게 마르고 붓자국이 훨씬 강하게 남는 아크릴 물감은 그간 습득한 붓질의 속도와 조형성, 그리고 화면의 정서에 있어서 새로운 도전과제가 된다. 이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길 바라는데, 그 이유는 전병구가 말했던 ‘생각이 붓질에 머무르지 못하는 그림’의 또 다른 가능성이 기시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화가에게 그림의 유희는 무엇일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을 때가 아닐까. 화가를 방해하는 회화. 그것이 회화가 향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참여작가: 전병구

출처: 이유진갤러리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전시

지금 경남 미술: 산 섬 들 Gyeongnam Art Now: San Seom Deul

2024년 3월 22일 ~ 2024년 5월 26일

권혜성 개인전: 우산 없는 사람들

2024년 3월 22일 ~ 2024년 4월 19일

오용석 개인전 - 코로나: 세 번째 템플릿

2024년 3월 14일 ~ 2024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