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의 오해
어쩌면 나는 정확한 ‘시점’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과의 조율(전투)에서 언제나 철저하게 밀쳐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연속적인 순간들을 말이다. 물리적으로 한정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많은 것들은 생각보다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 중 어느 시점의 기준으로 가장 어렵게 다가오는 단어들이 있다. 여유-일탈 -휴식과 같은 조금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은,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장착되지 않은 단어인 것만 같은 그런 영역의 말들이다. 꽤나 그렇게 저 단어들로부터 나를 내몰아 가고 있었다.
‘조금 더 멀리, 일렁이는 여러 장면들을 그려 보고자 했습니다.’ 이현우 작가는 말했다. 담백하면서도 명료하고 동시에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추상적인 말임에도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고, 기시감이 느껴지지만 어딘가 모르게 변주가 가득할 것 같았다. 작가와 나눈 첫 미팅에서의 대화 역시 그러했다. 시간에 쫓겨 조금은 늦게 도착한 그의 작업실에서 작가는 나에게 커피를 내려주며 잠시 숨을 고르라 했다. 고백하건대 그날 역시 여유라고는 1도 없는, 다음 약속 시간을 걱정하던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는 마음을 숨기려 애를 썼다. 그렇게 그림들을 살펴보며 애써 여유로운 척 마시는 커피 한 모금에 질문을 던졌다. “그림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네요?” 작가는 말했다. “네 어디론가 가기도 하고 오기고 하며 머무 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일렁이는 표면과 축축이 젖은 땅과 거친 듯 부드러운 벽의 촉각적인 걸 그리고 있습니다.” 알 것 같은데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좋았다. 알 것 같 은데 알 수 없어서 알아가고 싶었다. 1)그렇게 전시까지 100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현우 작가의 그림은 사진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닮았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알 수 없는 표현인지 알고 있기에 더욱이 그 난해한 생각과 느낌을 작가와 세밀하게 주고받고 싶었다. 작업 내의 빛과 그림자의 역할이 흔히 말하는 도시와 자연 풍경과의 경계에서 모호성을 준다. 구성 요소 보다 빛과 그림자의 힘이 강력하게 발휘하여 입체감을 주지만 동시에 구분점을 흩트려 트린 다. 시선의 거리가 중요한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의 변형보다는 이미지 안의 비율과 리듬에 더 집중을 한다. 시선 안의, 시점의 차이로, 구성된 장면은 그의 회화적 흔적들로 완성된다. 이 사 이에서 작가가 그림을 통해 붙잡고자 함과 놓아주고자 함의 경계가 그림 조각들이 되어 모이게 된다. 평소에 익숙함에서 특별함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대상은 일상과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그저 찰나의 순간이 되어 지나치기 좋은, 섬세한 관찰력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이때 작가는 이 장면이 그림 안에서는 재현을 놓지 않으면서 추상적으로 읽히길 바라고 깔끔하게 정리된 면과 면의 경계에 남겨진
붓 터치에 집중한다고 한다. 과감히 남겨진 붓질은 겹겹이 그림 전체에 수북하게 쌓인다. 얼핏 보면 느낄 수 없는, 친숙한 장면과 색의 조화이기에 나조차 나를 속이며 보이는 게 전부라고 속이게 될 때가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켜켜이 쌓인 물감과 붓질 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으며 어딘가의 사이이자 어디로는 열려있는 시작과 같다.
지난 5월, 출장을 핑계 삼아 찾아간 강릉에서 바다를 잠시나마 거닐었던 적이 있다. 아주 작은 입자의 모래들이었지만 부드럽다기 보다는 억샌 편이었다. 신발에 푹푹 빠지는 감각은 낭만적이거나 평안함이 아닌 운동과 같았고 모래가 주는 공포를 떠올리며 새삼 모래의 촉감은 흔히 말하는 아름다운 백사장 바다의 모래가 아니었다 생각했다. 오해였다. 그저 나의 신발이 편하지 않았으며, 꿋꿋이 신발을 신고 있기보다 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그 순간을 즐겼어야 했다. 발바닥에 묻은 모래나 바닷물의 흔적 따위 아무래도 좋았어야 했다. 내 마음과 상황이 삐뚤어져 모래를 탓하고 있었다. 모래도 바다도 사실은 굉장히 아름다웠음에도 내 머리와 마음이 아름답지 못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앞선 여유-일탈-휴식과도 이어진다. 현실과는 동떨어져야 하는 단어들이 아닌, 굉장히 일상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단어들이며 저들로부터 내몰고 있는 사람 역시 나라는 걸 이현우 작가의 그림들을 보며 느낀 작은 수수께끼의 답이 었다. 너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다. 멀리에 만 있는 거라고 생각지 않아도 좋다. 떨어지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작가는 말했다. 갯벌을 그릴 땐 사막같이 그리며, 모래사장을 그리면서는 갯벌과 같이 그린다고.
오해해도 좋다.
아니, 조금 더 오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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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작가, [별관]기획자)
1) <Off to Off>는 이현a우 작가와 안부 기획자가 온라인 프로그램을 통해 100일간의 대화를 엮어 만든 출판물이다. 이는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삶과 작업, 전시와 그 이후를 잇는다.
참여작가: 이현우
글/기획: 안부
디자인: 김박현정
사진: 이의록
주관/주최: 별관
출처: 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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