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 개인전 - 추신: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공간 가변크기

2019년 11월 19일 ~ 2019년 11월 30일

추신을 읽은 후
최선영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인 게 사람이고 마음이고 오늘이다. 그런데 이유를 찾고 싶은 것도 사람이고 마음이고 오늘이다. 그러고 있는, 혹은 그러지 않는 이유. 내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의 마음, 그 마음의 오늘. 그것은 그 자체로 힘들다. 누군가가 엉엉 울어버린 이유, 누군가가 밤늦게 전화한 이유, 누군가가 또 주저앉을 이유는 그래서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명확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뿐이다. 물론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듣고 싶은 사람에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힘 빠지는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왜, 그리고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누군가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견딤의 터널을 빠져나온 상태에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유희 작가의 덧붙임,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는 그래서 작가 스스로를 향하는 혼잣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작가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있어도, 그것은 더욱 고집스럽게 본인을 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어쩔 수 없음에서 시작된 편지는 그렇게 본인의 오늘로 배달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읽을 수 있으나 누구나 그 마음을 예상할 수는 없다. 써서 보내버리지 않으면 안 될 오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력한 이유가 된다.

작은 공간 안에서 불규칙한 생산을 해대고 있는 설치물 혹은 어떤 생명체 같은 것도 이유를 품고 설계된 유기체는 아니다. 며칠간만이라도 표현의 공간 안에서 존재하고 싶은, 혹은 존재할 수 있어서 다행인, 역시나 작가의 ‘덧붙임’이다. 뿜어내거나 쏟아내거나 흔들리는 그것은 다른 표출의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잠시 허락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라도 자신을 드러낸다.

더욱 예술적으로 작동되고 배치되어 편지든 설치물이든 작가의 미래에 어떤 기여를 하기를, 우리는 함부로 바랄 수 없다. 더 많이 울어버리고 못나버리고 어긋나버리고 그러다 더욱 사적으로 빠져들어 작품보다 작가의 감정이 불편할 만큼 툭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 어쩔 수 없음은 예술을 뒤덮는 무거운 돌덩이들처럼 쌓여야 한다. 이리저리 다듬고 매만져 모두의 눈앞에 미적으로 펼쳐낼 수 있다면 그건 감정도 아니고 예술도 아닐 테니까. 한 번의 전시로 미래를 살아낼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도 찾을 수 없는 (작가 이전에) 개인이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격하게 쏟아내야 관객이든 타인이든 그것을 볼 수 있다. 작품으로 격리된 감정이 아니라, 작품이라도 되어야 했던 감정을.

우리에겐 서로 연결된 삶과 마음이 오로지 단서다. 작가가 뾰족한 말투나 어두운 커튼, 시시콜콜한 문장들로 전시장을 가득 매워도 그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신호일지 모른다. 현재 작가는 계획된 방법을 통해 그 신호를 만들고 송신할 수 없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을 해봄으로써 오늘을 살 뿐이다. 이런 신호를 듣기 위해서는 수신 정보를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는지,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순간, 신호는 조금씩 작가의 육성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미 전시 제목에서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가. ‘추신’은 사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한 소통의 형식이다.

출처: 공간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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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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