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경, 이진한: 겨울, 여름

아트스페이스3

2021년 8월 26일 ~ 2021년 9월 25일

코끼리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지가 10년이다.

미술대학을 다닐 때 조소과 친구가 작은 모형 코끼리 몇 마리를 만들어 왔었는데 코끼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기억한다. 할머니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무리가 다 같이 가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기억은 맞는지도 모르게 희미하지만 앞으로 크게 만들어 보고 싶다는 조소과 친구의 모형 코끼리들의 동세와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 코끼리를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간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몰라 매번 다음으로 미루고 그리지 못했다. 2019년 설악에 머물며 조용한 곳에서 코끼리 무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여러 번 보았다. 코끼리 무리의 행렬도 보고 아기 코끼리가 맹수에게 공격을 당한 후 엄마 코끼리가 목이 말라 그를 떠날 때까지 죽은 아기 코끼리 주변을 오래 맴도는 광경도 보았고 아기 코끼리의 어림이 가득한 얼굴도 보았고 무엇보다 나이가 들은 늙은 코끼리의 얼굴을 보았을 때 아빠 생각이 났다. 코끼리의 주름과 그 얼굴 표정이 나이든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모습들과 풀을 뜯어 먹는 모습들, 연못에서 물을 마시고 첨벙거리는 모습들, 몸집은 크지만 모두가 선한 인상과 걸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도 그리지 못했다. 오랫동안 그리지 못했으니 코끼리를 그리는 것은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

2020년 1월 1일에 베를린에 왔다. 그때 첫 겨울을 맞았고, 분주한 사이 봄이 왔다. 2021년 늦은 9월부터 추위가 시작되며 겨울로 가고 있었고 독일의 겨울을 오롯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오후 세네시면 어두워졌고 매일같이 흐렸으며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비가 오지 않는다 하여도 해는 없었다. 해를 보지 못하고 한달 두 달 지나니 위기감이 찾아왔다. 위기감 이었는지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날이 좋았던 봄 여름에도 하지 않았던 걷기를 시작하게 된다. 어둡지 않은 시간에는 그저 밖으로 나가 줄곧 걸었다. 어디를 특별히 간 것은 아니었고 가지 않은 길을 여기 저기 다녔다. 집에서 시작해서 작업실까지 가는 길은 여러 번 가보았으니 베를린의 동, 서, 남, 북의 끝에서 시작해서 돌아오는 여정을 해보기도 하며 큰 생각없이 나가 걷기 시작한 것이 매일이 되었다. 처음엔 한시간 두시간이 어려웠으나 언제부턴가는 두시간을 넘어도 세시간이 되어도 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고 혼잣말도 하였으나 가끔, 그리고 점점 더 자주 아무 생각도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걷는 길에 이제 나무도 보이고 내가 걷는 길도 보게 된다. 걸음이 익숙해지고 편안해 졌다. 다음해엔 어떻게 겨울을 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독일에 와서 보낸 처음의 긴 겨울은 걸으며 보낼 수 있었다.

코끼리를 그렸다. 그렸다기 보다는 했다. 걷고 돌아온 날, 그간 바랬던 코끼리를 이렇게 쉽게 그려도 되나 싶게 그렸다. 아기 코끼리의 모습을 제일 먼저 그릴 수 있었고 양 옆의 코끼리도 어떻게 그렸는지 기억에 없을 만큼 쉽게 넣을 수 있었다. 겨울내 코끼리를 보고 지냈다. 어느 날 보니 그 코끼리들도 걷고 있었다. 추운 날도 걸어서 작업실엔 매일 왔었는데 코끼리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문득 그 아기 코끼리를 생각하니 어리고 예뻤던 한 아이가 떠오른다. 내 마음에 오래 담아둔다

(유현경)


Burning (2021) 은 내가 가진 가장 큰 붓 두 개를 써서, 거칠고 섬세한 두 종류의 빠름을 그렸다. 첫 번째 큰 붓을 들었다. 둥근 붓 전체에 특별한 미디움을 섞지 않아 퍼석한 페인스 그레이를 묻혀 캔버스 직조가 메워지도록 뭉갰다. 화면 안 왼쪽으로 사라져가는 사람의 두 다리가 그려졌다. 도망자의 급한 마음을 그리자니 내 몸 전체가 덩달아 빠르게, 거칠게 움직였다. 두 번째 큰 붓을 들었다. 넓적한 인조모 붓끝 테레빈유에 묽게 희석한 불투명한 레드를 살짝 적셨다. 붓을 캔버스 표면에 대고, 그러자마자 움직이고, 또 동시에 힘을 빼며 빗금을 그으니 화면 바깥, 오른쪽으로 번지는 불길이 나타났다. 휘어진 꽃과도 같은 불을 그리려고 붓을 꽉 움켜쥔 내 손이 보이지 않게 떨렸다. Three Yellow Flowers (2021) 나는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만 같은 노란빛의 꽃 같은 두 여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며 그들과 다름을 남몰래 느껴왔다. 끊임없이 나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끝나지 못할 고민을 하는 나는 분명 검은 꽃인데 나는 스스로를 아직 노란 꽃이라고 부르고 만다. Webs and Thorns (2021) 눈앞이 뿌옇게 흐리다. 저 멀리 무언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거미줄인지 가시인지 개미인지 거미인지 모르겠다. 누가 누군가에 죽임을 당하는 건지, 아님, 그래서 부활의 몸짓인지. 눈을 비비며 흐렸던 시야를 밝힌다. 부서진 작은 개미의 둥그렇고 큰 그림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건 서서히 다가오는 거미를 잡아 삼킬 듯 부풀어 오른다.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런던의 봄 햇살 아래에서 시작된 그림들은 한여름의 서울로 옮겨져 달라진 빛, 뿌옇게 데워진 공기를 견디며 하루 이틀의 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저녁 공기가 싸늘히 느껴지는 8월 말 늦여름 완성됐다. 마침내 완성된 그림 앞에 서니 여름내 나른하게 풀어져 가던 마음이 이제 조금씩 빳빳해져 간다.

(이진한)


참여작가: 유현경, 이진한

출처: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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