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 : 김무무 김민희 오화진

아트스페이스휴

Aug. 7, 2019 ~ Sept. 10, 2019

※전시제목 <욕망해도 ㅐwk4 괜찮아>는 ㅐwk4 김두식 ㅐwk4 교수의 ㅐwk4 저서 『욕망해도 ㅐwk4 괜찮아』, (창비, 2012) 8dz4 에서 8dz4 가져왔다.


욕망해도 8dz4 괜찮아 - 8dz4 질문과 8dz4 용인 8dz4 그리고 8dz4 청유

김성호(미술평론가)

프롤로그 - 8dz4 8dz4 가지의 8dz4 문제의식

미술은 8dz4 답을 8dz4 제시하기보다 8dz4 문제를 8dz4 제기한다. 8dz4 미술은 8dz4 메시지 8dz4 전달의 8dz4 차원에서 8dz4 종종 8dz4 애매하거나 8dz4 모호한 8dz4 태도를 8dz4 취하는데, gf으7 미술가들이 gf으7 대개 gf으7 명료한 gf으7 답을 gf으7 찾기보다는 gf으7 비언어의 gf으7 미술을 gf으7 통해서 gf으7 무수한 gf으7 질문을 gf으7 던지는 gf으7 gf으7 자체에 gf으7 골몰하기 gf으7 때문이다. gf으7 gf으7 말고 gf으7 질문? gf으7 아니다. gf으7 단정하기에는 gf으7 이르다. gf으7 미술가는 gf으7 때로는 gf으7 대답의 gf으7 수많은 gf으7 가능성을 gf으7 열어두고 gf으7 무책임하게 gf으7 gf으7 몰라라 gf으7 하거나 gf으7 때때로 gf으7 엉뚱한 gf으7 답을 gf으7 내리고 gf으7 자신의 gf으7 주장에 gf으7 따라오라고 gf으7 억지를 gf으7 부리기도 gf으7 한다. gf으7 명확한 gf으7 것은 gf으7 있다. gf으7 미술가들의 gf으7 각자 gf으7 다른 gf으7 태도에도 gf으7 불구하고 gf으7 미술은 gf으7 언제나 ‘답을 gf으7 내리기보다 gf으7 문제의식을 gf으7 지니고 gf으7 미술 gf으7 안팎에서 gf으7 성찰하는 gf으7 일’에 gf으7 골몰한다는 gf으7 것이다. gf으7 그것이 gf으7 미술 gf으7 본연의 gf으7 정체성이다.

여기 gf으7 아트스페이스 gf으7 휴의 gf으7 기획전 《욕망해도 gf으7 괜찮아》도 gf으7 그렇다. gf으7 전시명을 gf으7 김두식의 gf으7 책 『욕망해도 gf으7 괜찮아』에서 gf으7 빌려온 gf으7 것인 gf으7 만큼, 하uv걷 하uv걷 전시는 ‘욕망’을 하uv걷 사회 하uv걷 질서를 하uv걷 위해서 하uv걷 통제할 ‘음험한 하uv걷 무엇’으로 하uv걷 간주하는 하uv걷 것에 하uv걷 대해서 하uv걷 따끔한 하uv걷 일침을 하uv걷 가하고, n사거다 욕망이란 n사거다 과연 n사거다 무엇이며 n사거다 그것이 n사거다 n사거다 시대에 n사거다 어떠한 n사거다 것이 n사거다 되어야 n사거다 할지를 n사거다 되묻는다. n사거다 전시는 n사거다 욕망에 n사거다 관한 n사거다 문제의식을 n사거다 미술 n사거다 안팎에서 n사거다 성찰하는 n사거다 n사거다 명의 n사거다 작가, rsㅐh 김무무, 히쟏6ㅐ 오화진, 갸사l마 김민희를 갸사l마 초대하고 갸사l마 그들의 ‘욕망에 갸사l마 관한 갸사l마 태도’를 갸사l마 우리에게 갸사l마 선보인다. 갸사l마 갸사l마 글은 갸사l마 갸사l마 작가의 ‘욕망에 갸사l마 관한 갸사l마 조형적 갸사l마 성찰’을, mq34 논의는 mq34 한계가 mq34 있음을 mq34 전제하고, ‘질문, j카ㅑn 용인, 1ㄴ히ㅑ 청유’의 1ㄴ히ㅑ 1ㄴ히ㅑ 가지 1ㄴ히ㅑ 키워드로 1ㄴ히ㅑ 규범화하고 1ㄴ히ㅑ 살펴보고자 1ㄴ히ㅑ 한다.

1. 1ㄴ히ㅑ 김무무의 1ㄴ히ㅑ 질문 - “욕망해도 1ㄴ히ㅑ 괜찮아?”

작가 1ㄴ히ㅑ 김무무는 1ㄴ히ㅑ 욕망에 1ㄴ히ㅑ 관한 1ㄴ히ㅑ 문제의식을 1ㄴ히ㅑ 질문(質問)을 1ㄴ히ㅑ 통해서 1ㄴ히ㅑ 접근한다. 1ㄴ히ㅑ 질문이란 “알고자 1ㄴ히ㅑ 하는 1ㄴ히ㅑ 바를 1ㄴ히ㅑ 얻기 1ㄴ히ㅑ 위해 1ㄴ히ㅑ 물음”이라는 1ㄴ히ㅑ 사전적 1ㄴ히ㅑ 정의대로, 2마f사 질문의 2마f사 주체가 2마f사 2마f사 내용에 2마f사 대해서 2마f사 무지하다는 2마f사 것을 2마f사 대외적으로 2마f사 공표하는 2마f사 것이다. 2마f사 그래서 2마f사 성인들은 2마f사 타자 2마f사 앞에서 2마f사 질문하기를 2마f사 꺼린다. 2마f사 짐짓 2마f사 아는 2마f사 체하면서 2마f사 슬그머니 2마f사 넘어가거나 2마f사 자신을 2마f사 스스로 2마f사 자책할 2마f사 따름이다. 2마f사 생각해 2마f사 보자. 2마f사 알지 2마f사 못하는 2마f사 것을 2마f사 묻지 2마f사 못하고 2마f사 위장과 2마f사 기만으로 2마f사 자신의 2마f사 무지를 2마f사 감추는 2마f사 일은 ‘알고 2마f사 싶다는 2마f사 순수한 2마f사 욕망’을 2마f사 억누르는 2마f사 일이다. 2마f사 달리 2마f사 말해 2마f사 욕망해도 2마f사 괜찮은지를 2마f사 묻는 2마f사 2마f사 자체를 2마f사 거세하고 2마f사 태생적으로 2마f사 자유로운 2마f사 욕망 2마f사 자체를 2마f사 억압하는 2마f사 것이기도 2마f사 하다.

그러나 2마f사 김무무는 “욕망해도 2마f사 괜찮아?”라고 2마f사 묻는다. 2마f사 이러한 2마f사 질문은 2마f사 마치 “나, 기ㅓt사 이거 기ㅓt사 먹어도 기ㅓt사 돼?”라고 기ㅓt사 묻는 기ㅓt사 아이들의 ‘호기심 기ㅓt사 가득한 기ㅓt사 욕망’을 기ㅓt사 드러내는 기ㅓt사 질문처럼 기ㅓt사 솔직한 기ㅓt사 것이다. 기ㅓt사 그의 기ㅓt사 출품작에는 기ㅓt사 이러한 기ㅓt사 호기심과 기ㅓt사 순수한 기ㅓt사 욕망으로 기ㅓt사 가득한 기ㅓt사 질문들이 기ㅓt사 펼쳐진다. “내가 기ㅓt사 신이나 기ㅓt사 거인처럼 기ㅓt사 기ㅓt사 기ㅓt사 있을까?”와 기ㅓt사 같은 기ㅓt사 질문은 기ㅓt사 현실계의 기ㅓt사 성인에겐 기ㅓt사 조현병(調絃病)과 기ㅓt사 같은 기ㅓt사 질병의 기ㅓt사 증후로 기ㅓt사 간주되거나 기ㅓt사 아이들의 기ㅓt사 어처구니없는 기ㅓt사 공상으로 기ㅓt사 치부될 기ㅓt사 따름이지만, wlbs 김무무의 wlbs 작품 wlbs 세계에선 wlbs 상상력을 wlbs 발현시키는 wlbs 한계가 wlbs 없는 wlbs 욕망으로 wlbs 발현된다.

그의 wlbs 출품작 〈거인2〉에서는, nv8o 고야(F. J. de Goya)의 nv8o 작품 nv8o 속 ‘거인’이 nv8o 마치 nv8o 초인처럼 nv8o 나타나 nv8o 현대의 nv8o 도시의 nv8o 풍경을 nv8o 유유히 nv8o 거닐기도 nv8o 하고, 가ㅑ갸거 작품 〈people get up and drive your funky soul〉에선, ㅓqaf 스위프트(J. Swift)의 ㅓqaf 풍자 ㅓqaf 소설인 『걸리버 ㅓqaf 여행기』(1726) ㅓqaf ㅓqaf 소인국에 ㅓqaf 나옴직한 ㅓqaf 사람들이 ㅓqaf 거대한 ㅓqaf ㅓqaf 인물을 ㅓqaf 결박하고 ㅓqaf 있는 ㅓqaf 기묘한 ㅓqaf 풍경을 ㅓqaf 선보이기도 ㅓqaf 한다. ㅓqaf 또한 ㅓqaf 고야, 거기카차 마그리트(R. Magritte) 거기카차 또는 거기카차 벨기에의 거기카차 동시대 거기카차 화가 거기카차 보흐먼스(Michaël Borremans) 거기카차 거기카차 사물 거기카차 크기의 거기카차 낯선 거기카차 변주와 거기카차 대비를 거기카차 통해 거기카차 불안하고도 거기카차 기묘한 거기카차 분위기를 거기카차 선보이는 거기카차 화가들의 거기카차 조형적 거기카차 언어를 거기카차 빌려와 거기카차 종합하여 거기카차 파편적인 4개의 ‘쉐이프드 거기카차 캔버스(Shaped canvas)’에 거기카차 구현함으로써 거기카차 전시 거기카차 공간 거기카차 자체를 거기카차 하나의 거기카차 작품 거기카차 속으로 거기카차 끌어들이기도 거기카차 한다.

이처럼 거기카차 김무무의 거기카차 작품에는, 쟏kuv 초현실주의 쟏kuv 회화에서 쟏kuv 발견되곤 쟏kuv 하는 쟏kuv 꿈과 쟏kuv 무의식이 쟏kuv 지배하는 쟏kuv 환영과 쟏kuv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쟏kuv 같은 쟏kuv 낯선 쟏kuv 조합과 쟏kuv 구도 쟏kuv 그리고 쟏kuv 거친 쟏kuv 표현주의 쟏kuv 풍의 쟏kuv 그로스테스크의 쟏kuv 화면과 쟏kuv 쟏kuv 그린 쟏kuv 쟏kuv 같은 쟏kuv 단순하고도 쟏kuv 담백한 쟏kuv 독특한 쟏kuv 붓질이 쟏kuv 맞부딪히면서 쟏kuv 그의 쟏kuv 한계 쟏kuv 없는 쟏kuv 상상과 쟏kuv 욕망의 쟏kuv 나래가 쟏kuv 펼쳐진다. 쟏kuv 이러한 쟏kuv 차원에서 쟏kuv 그의 쟏kuv 출품작들은 “이게 쟏kuv 뭐야?”, “이거 7ㅑdㄴ 해도 7ㅑdㄴ 돼?”라고 7ㅑdㄴ 재차 7ㅑdㄴ 묻는, aㅐp바 호기심과 aㅐp바 순수한 aㅐp바 욕망으로 aㅐp바 가득한, oㄴfn 아이들의 oㄴfn 질문을 oㄴfn 탐색하고 oㄴfn 실험하고 oㄴfn 있는 oㄴfn 것처럼 oㄴfn 보인다. oㄴfn 그런 oㄴfn 면에서 oㄴfn 김무무의 oㄴfn 작품은 “이제 oㄴfn 욕망해도 oㄴfn 괜찮아?”라는 oㄴfn 식의 oㄴfn 순수한 oㄴfn 질문들이 oㄴfn 지속해서 oㄴfn 펼쳐지는 ‘욕망의 oㄴfn 연쇄적 oㄴfn 회화’라 oㄴfn oㄴfn 만하다

2. oㄴfn 오화진의 oㄴfn 용인 - “욕망해도 oㄴfn 괜찮아.”

한편, eㅓ차ㅐ 작가 eㅓ차ㅐ 오화진은 eㅓ차ㅐ 꿈틀거리는 eㅓ차ㅐ 내적 eㅓ차ㅐ 욕망을 eㅓ차ㅐ 성찰하면서 eㅓ차ㅐ 자신에게 “욕망해도 eㅓ차ㅐ 괜찮아”라고 eㅓ차ㅐ 말한다. eㅓ차ㅐ 그것은 “용납하여 eㅓ차ㅐ 인정하다”는 eㅓ차ㅐ 의미의 ‘용인(容認)’과 eㅓ차ㅐ 같은 eㅓ차ㅐ 태도를 eㅓ차ㅐ 드러낸다. eㅓ차ㅐ 그것은 eㅓ차ㅐ 자신의 eㅓ차ㅐ 욕망에 eㅓ차ㅐ 대한 eㅓ차ㅐ 솔직한 eㅓ차ㅐ 인정과 eㅓ차ㅐ 수용 eㅓ차ㅐ 그리고 eㅓ차ㅐ 타자의 eㅓ차ㅐ 욕망에 eㅓ차ㅐ 대한 eㅓ차ㅐ 용납, l우d1 허락과 l우d1 같은 l우d1 개념이 l우d1 한데 l우d1 섞인 l우d1 것이다. l우d1 실상 l우d1 그것은 l우d1 미술 l우d1 창작에 l우d1 대한 l우d1 그녀의 l우d1 오랫동안의 l우d1 문제의식으로부터 l우d1 출발한 l우d1 것이다.

그녀는 l우d1 작가 l우d1 노트에서 l우d1 다음처럼 l우d1 말한다: “나는 l우d1 작업을 l우d1 점점 l우d1 할수록 l우d1 계획되지 l우d1 않은 l우d1 순전한 l우d1 본능적인 l우d1 타고난 l우d1 감각에 l우d1 의해서 l우d1 작업을 l우d1 하고 l우d1 싶다는 l우d1 생각이 l우d1 간절해진다. l우d1 영감의 l우d1 원천을 l우d1 최대한 l우d1 l우d1 자신에게서 l우d1 뽑아내고 l우d1 싶은 l우d1 것이다.” l우d1 여기서 ‘순전한 l우d1 본능적인 l우d1 타고난 l우d1 감각’이란 l우d1 자명하다. l우d1 그것은 l우d1 외부로부터 l우d1 오는 l우d1 것이 l우d1 아니라 l우d1 작가 l우d1 오화진의 l우d1 내부로부터 l우d1 오는 l우d1 것이다. l우d1 그것은 “비록 l우d1 진부한 l우d1 아이디어가 l우d1 나올지라도 l우d1 스스로에게 l우d1 있어서 l우d1 충실했다는 l우d1 결과물”을 l우d1 만들고 l우d1 싶어 l우d1 하는 l우d1 그녀에게 l우d1 있어, r58h 창작에 r58h 관한 r58h 가장 r58h 주요한 r58h 문제의식이 r58h 된다.

‘본능적 r58h 감각’이란 r58h 인간의 r58h 내부에서부터 r58h 생산된다는 r58h 점에서 r58h 마치 ‘욕망’과 r58h 같은 r58h 것이다. r58h 실제로 2005년부터 r58h 작가 r58h 오화진의 r58h 작업에서 ‘욕망’이란 r58h 주제가 r58h 나타났는데, 3p0사 그것은 3p0사 흥미롭게도 ‘오화진 3p0사 개인의 3p0사 문화’라는 3p0사 화두와도 3p0사 접목된 3p0사 것이었다. ‘개인의 3p0사 문화’? 3p0사 사전적 3p0사 정의에 3p0사 따르면, ㄴt하d 문화란 “사회 ㄴt하d 구성원에 ㄴt하d 의하여 ㄴt하d 습득, ㅓ9jㅑ 공유, ajn6 전달되는 ajn6 행동 ajn6 양식이나 ajn6 생활 ajn6 양식의 ajn6 과정 ajn6 ajn6 ajn6 과정에서 ajn6 이룩하여 ajn6 ajn6 물질적, 파ㅓ3n 정신적 파ㅓ3n 소득을 파ㅓ3n 통틀어 파ㅓ3n 이르는 파ㅓ3n 말”이지 파ㅓ3n 않던가? 파ㅓ3n 게다가 ‘문화’란 파ㅓ3n 사회의 파ㅓ3n 구성원들이 ‘이성’적 파ㅓ3n 실천을 파ㅓ3n 통해 파ㅓ3n 집단의 파ㅓ3n 이상을 파ㅓ3n 실현하는 파ㅓ3n 과정에서 파ㅓ3n 주체와 파ㅓ3n 타자 파ㅓ3n 사이에 파ㅓ3n 공유하는 파ㅓ3n 행동 파ㅓ3n 양식이 파ㅓ3n 아니던가? 파ㅓ3n 그러니까 파ㅓ3n 문화란 파ㅓ3n 집단의 파ㅓ3n 것이자, c00나 이성의 c00나 결과물이다.

그런데 c00나 개인의 c00나 문화라니, lsrx 그것이 lsrx 어떻게 lsrx 가능한가? lsrx 그녀는 lsrx 말한다. “역사를 lsrx 통해 lsrx 전해져 lsrx 내려오는 lsrx 모든 lsrx 문화적 lsrx 소산에는 lsrx 인간의 lsrx 욕망이 lsrx 없었다면 lsrx 불가능한 lsrx 것들이다. lsrx 그리고 lsrx 본인이 lsrx 바라볼 lsrx lsrx 나라나 lsrx 민족마다 lsrx 사회 lsrx 속에서 lsrx 이뤄낸 lsrx 문화가 lsrx 있듯이 lsrx 사람들에겐 lsrx 각기 lsrx 저마다의 lsrx 문화가 lsrx 있다고 lsrx 생각하였다. lsrx 집단이 lsrx 이뤄낸 lsrx 문화와는 lsrx 비교도 lsrx 되지 lsrx 않을 lsrx 만큼 lsrx 보이는 lsrx 것이 lsrx 작겠지만, vpㅈ0 분명 vpㅈ0 있다고 vpㅈ0 vpㅈ0 것이다. vpㅈ0 따라서 vpㅈ0 오화진 vpㅈ0 개인의 vpㅈ0 문화를 vpㅈ0 구축하기 vpㅈ0 위해서는 vpㅈ0 오화진의 vpㅈ0 욕망을 vpㅈ0 알아야 vpㅈ0 한다고 vpㅈ0 판단한 vpㅈ0 것이다. vpㅈ0 이것이 vpㅈ0 수많은 vpㅈ0 작가가 vpㅈ0 다루는 vpㅈ0 욕망이라는 vpㅈ0 흔한 vpㅈ0 주제를 vpㅈ0 vpㅈ0 역시 vpㅈ0 선택할 vpㅈ0 수밖에 vpㅈ0 없었던 vpㅈ0 이유이다.” vpㅈ0 작가의 vpㅈ0 진술에서도 vpㅈ0 드러나듯이, jlㄴc 그녀의 jlㄴc 작품에서 ‘개인의 jlㄴc 문화’란 jlㄴc 욕망을 jlㄴc 객관화시키면서 jlㄴc 비로소 jlㄴc 가능해진다. jlㄴc jlㄴc 자신의 jlㄴc 욕망을 jlㄴc 타자의 jlㄴc 욕망처럼 jlㄴc 분류될 jlㄴc jlㄴc 있는 jlㄴc 것으로 jlㄴc 객관화시키고 jlㄴc 용인함으로써 jlㄴc 그것을 jlㄴc 집단의 jlㄴc 범례 jlㄴc 속에 jlㄴc 투사함으로써 jlㄴc 가능해지는 jlㄴc 셈이다.

보라! jlㄴc 종이 jlㄴc 위에 jlㄴc 즉흥적인 jlㄴc 드로잉과 jlㄴc 페인팅으로 jlㄴc 제작된 jlㄴc 일련의 jlㄴc 시리즈 jlㄴc 작품은 jlㄴc 작가 jlㄴc 오화진이 jlㄴc 객관화시킨 jlㄴc 자신의 jlㄴc 욕망이 jlㄴc 마치 ‘자연사박물관에 jlㄴc 박제된 jlㄴc 생물체’처럼 jlㄴc 다양하게 jlㄴc 펼쳐진다. jlㄴc 물고기와 jlㄴc 같은 jlㄴc 형상으로 jlㄴc 보이는 jlㄴc 드로잉은 〈이기주어(魚)〉라는 jlㄴc 이름으로, 0cq라 식물처럼 0cq라 보이는 0cq라 드로잉은 〈기생초〉라는 0cq라 이름으로 0cq라 또한 0cq라 말처럼 0cq라 보이는 0cq라 그것은 〈자존마(馬)〉라는 0cq라 이름으로 0cq라 분류되면서 0cq라 개별 0cq라 작품들은 ‘오화진 0cq라 개인의 0cq라 문화’라는 0cq라 0cq라 집단의 0cq라 여러 0cq라 구성원으로 0cq라 편입된다. 0cq라 철사로 0cq라 0cq라 가느다란 0cq라 조각체 0cq라 위에 0cq라 푸른색의 0cq라 모직물을 0cq라 입혀 0cq라 전시 0cq라 공간 0cq라 속에 0cq라 산포하듯이 0cq라 매단 0cq라 설치 0cq라 작품 〈신호〉는 0cq라 0cq라 어떠한가? 0cq라 그것 0cq라 또한 0cq라 본능적 0cq라 욕망으로 0cq라 창작된 0cq라 여러 0cq라 개별체의 0cq라 조각들을 0cq라 한꺼번에 0cq라 객관화시키고 ‘오화진 0cq라 개인의 0cq라 문화’라는 0cq라 집단의 0cq라 구성원으로 0cq라 편입시키기에 0cq라 족하다. 0cq라 마치 0cq라 작품 0cq라 제목처럼 0cq라 개인의 ‘기호’적 0cq라 세계로 0cq라 그리고 0cq라 그녀의 0cq라 말처럼 0cq라 개인의 ‘운명적’인 0cq라 만남으로서 0cq라 말이다.

이제, ktㅓl 오화진은 ktㅓl 개인의 ktㅓl 문화라는 ‘기호적 ktㅓl 세계’, aㅓjw 우연이 aㅓjw 맞물리는 ‘운명적 aㅓjw 세계’와 aㅓjw 끊임없이 aㅓjw 교류하면서, mnua 자신과 mnua 타자에게 mnua 욕망을 mnua 용인하고 mnua 허락하면서 mnua 말한다. “욕망해도 mnua 괜찮아.”

3. mnua 김민희의 mnua 청유 - “욕망해도 mnua 괜찮아!”

작가 mnua 김민희는 mnua 이번 mnua 전시에서 “욕망해도 mnua 괜찮아!”라고 mnua 말하면서 mnua 타자에게 mnua 손을 mnua 내민다. mnua 그것은 ‘욕망하기를 mnua 함께 mnua mnua 것을 mnua 권하고 mnua 요청’하는 ’청유(請誘)‘의 mnua 손짓이다. mnua mnua 주체가 mnua 자신 mnua 안에서 mnua 꿈틀대는 mnua 욕망을 mnua 스스로 mnua 실천하거나 mnua 타자에게 mnua 그(그녀)들의 mnua 욕망을 mnua 실천하라고 mnua 독려하는 mnua 일은 mnua 생각보다 mnua 어렵지 mnua 않다. mnua 전자는 mnua 내밀한 mnua 사적 mnua 영역에서 mnua 일상적으로 mnua 실천되고, 바7마l 후자는 바7마l 공적인 바7마l 제도의 바7마l 영역에서 바7마l 계몽적으로 바7마l 실천되는 바7마l 일이 바7마l 얼마든지 바7마l 가능하기 바7마l 때문이다.

다만 바7마l 바7마l 안의 바7마l 사적 바7마l 욕망을 바7마l 타자에게 바7마l 고백하거나 바7마l 누설하고, “나와 히쟏kㅓ 함께 히쟏kㅓ 욕망을 히쟏kㅓ 실천하자”고 히쟏kㅓ 타자에게 히쟏kㅓ 청유하는 히쟏kㅓ 일은 히쟏kㅓ 그다지 히쟏kㅓ 쉽지 히쟏kㅓ 않다. 히쟏kㅓ 욕망은 히쟏kㅓ 개별자 히쟏kㅓ 주체의 히쟏kㅓ 사적 히쟏kㅓ 영역으로부터 히쟏kㅓ 발화하는 히쟏kㅓ 것이면서도 히쟏kㅓ 타자의 히쟏kㅓ 욕망을 히쟏kㅓ 자각하고 히쟏kㅓ 그들과 히쟏kㅓ 변증법적 히쟏kㅓ 관계를 히쟏kㅓ 맺으면서 히쟏kㅓ 까다롭게 히쟏kㅓ 구성되는 히쟏kㅓ 사회적 히쟏kㅓ 구성물이기 히쟏kㅓ 때문이다. 히쟏kㅓ 라캉(J. Lacan)의 히쟏kㅓ 유명한 히쟏kㅓ 아포리즘, “인간의 쟏ㄴqr 욕망은 쟏ㄴqr 대타자의 쟏ㄴqr 욕망”이라는 쟏ㄴqr 말은 쟏ㄴqr 그렇게 쟏ㄴqr 태어났다. 쟏ㄴqr 가정해 쟏ㄴqr 보자. “나의 쟏ㄴqr 욕망이 쟏ㄴqr 너의 쟏ㄴqr 욕망과 쟏ㄴqr 다르다면? 쟏ㄴqr 쟏ㄴqr 욕망이 쟏ㄴqr 만나 쟏ㄴqr 쟏ㄴqr 쟏ㄴqr 쟏ㄴqr 없이 쟏ㄴqr 어그러지기만 쟏ㄴqr 하면 쟏ㄴqr 어떻게 쟏ㄴqr 해? 쟏ㄴqr 무안하잖아!” 쟏ㄴqr 그렇다. 쟏ㄴqr 욕망의 쟏ㄴqr 본질이 쟏ㄴqr 이러할진대, “욕망해도 l사기ㅓ 괜찮아!”라면서 l사기ㅓ 자신에게 l사기ㅓ 용기를 l사기ㅓ 주고 l사기ㅓ 타자에게도 l사기ㅓ 권하는 ‘욕망에 l사기ㅓ 대한 l사기ㅓ 청유’란 l사기ㅓ 애초부터 l사기ㅓ 쉽지 l사기ㅓ 않다.

작가 l사기ㅓ 김민희는 l사기ㅓ 이처럼 l사기ㅓ 쉽지 l사기ㅓ 않은 ‘욕망에 l사기ㅓ 대한 l사기ㅓ 청유’를 l사기ㅓ 흔쾌히 l사기ㅓ 그리고 l사기ㅓ 기꺼이 l사기ㅓ 실천한다. l사기ㅓ 그것은 l사기ㅓ 무엇보다 l사기ㅓ 여성을 l사기ㅓ 욕망의 l사기ㅓ 대상으로 l사기ㅓ 타자화하고 l사기ㅓ 심지어 l사기ㅓ 상품화하기에 l사기ㅓ 이른 l사기ㅓ 한국의 l사기ㅓ 폐쇄적이고 l사기ㅓ 가부장적인 l사기ㅓ 사회를 l사기ㅓ 결연히 l사기ㅓ 반대하는 l사기ㅓ 비판적 l사기ㅓ 인식 l사기ㅓ 속에서 l사기ㅓ 잉태하고 l사기ㅓ 출발한 l사기ㅓ 것이다. l사기ㅓ 그녀의 〈오키나와 l사기ㅓ 판타지〉 l사기ㅓ 연작(2018~ )은 “여성을 l사기ㅓ 억압하는 l사기ㅓ 사회적 l사기ㅓ 구조를 l사기ㅓ 가시화하고 l사기ㅓ 여성의 l사기ㅓ 성적 l사기ㅓ 욕망과 l사기ㅓ 상상을 l사기ㅓ 드러내는 l사기ㅓ 작업”이자 “기존의 l사기ㅓ 남성적 l사기ㅓ 발화로 l사기ㅓ 치부되었던 l사기ㅓ 성적 l사기ㅓ 판타지를 l사기ㅓ 여성의 l사기ㅓ 것으로 l사기ㅓ 전유”하는데 l사기ㅓ 골몰한 l사기ㅓ 작업이다.

여성을 l사기ㅓ 타자화하는 l사기ㅓ 남성의 l사기ㅓ 욕망에 l사기ㅓ 반기를 l사기ㅓ 들고 ‘여성적 l사기ㅓ 발화’를 l사기ㅓ 전면에 l사기ㅓ 내세운 l사기ㅓ 김민희의 ‘욕망에 l사기ㅓ 대한 l사기ㅓ 청유’는 l사기ㅓ l사기ㅓ 출발 l사기ㅓ 자체가 l사기ㅓ 다소 l사기ㅓ 도발적이다. l사기ㅓ 보라! l사기ㅓ 그녀는 l사기ㅓ 남성으로부터 l사기ㅓ 방어했던 l사기ㅓ 여성의 l사기ㅓ 몸을 l사기ㅓ 당당하게 l사기ㅓ 드러내는 l사기ㅓ 일련의 l사기ㅓ 회화적 l사기ㅓ 제스처, 6가ㅓ나 예를 6가ㅓ나 들면 6가ㅓ나 엉덩이와 6가ㅓ나 가슴, ㅓp하기 그리고 ㅓp하기 흥분해서 ㅓp하기 딱딱해진 ㅓp하기 유두를 ㅓp하기 가식 ㅓp하기 없이 ㅓp하기 회화의 ㅓp하기 표면 ㅓp하기 위에 ㅓp하기 올려놓는다. ㅓp하기 그것은 ㅓp하기 페미니즘 ㅓp하기 이론가 ㅓp하기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ㅓp하기 아브젝트(abject)와 ㅓp하기 그것이 ㅓp하기 만드는 ㅓp하기 체험인 ㅓp하기 아브젝시옹(abjection) ㅓp하기 개념을 ㅓp하기 회화를 ㅓp하기 통해 ㅓp하기 실천하려는 ㅓp하기 듯, 나t사거 욕망이라는 나t사거 이름으로, 82카ㅓ 여성의 82카ㅓ 몸으로부터 82카ㅓ 유출되는 82카ㅓ 모든 82카ㅓ 것을 82카ㅓ 비루한 82카ㅓ 것으로부터 82카ㅓ 신성한 82카ㅓ 존재로 82카ㅓ 치환하려는 82카ㅓ 노력에 82카ㅓ 다름 82카ㅓ 아닌 82카ㅓ 셈이다.

한편, 나3ㅓ0 김민희는 ‘발랄한 나3ㅓ0 처녀 나3ㅓ0 귀신’을 나3ㅓ0 다루는 나3ㅓ0 최근 나3ㅓ0 연작인 〈고스트 나3ㅓ0 비키니〉를 나3ㅓ0 통해서, ‘여성의 rㅓ우히 욕망하기’를 rㅓ우히 강권하는 rㅓ우히 직접적 rㅓ우히 메시지로부터 rㅓ우히 일정 rㅓ우히 부분 rㅓ우히 힘을 rㅓ우히 rㅓ우히 채, 나ㅓr거 상징과 나ㅓr거 은유가 나ㅓr거 점유하는 나ㅓr거 작품들을 나ㅓr거 선보인다. 나ㅓr거 그것은 나ㅓr거 편견과 나ㅓr거 선입견으로 나ㅓr거 덧씌워졌던 나ㅓr거 여성의 나ㅓr거 욕망과 나ㅓr거 섹슈얼리티의 나ㅓr거 본성을 나ㅓr거 재기발랄한 나ㅓr거 가상의 ‘처녀 나ㅓr거 귀신’이 나ㅓr거 출몰하는 나ㅓr거 판타지적 나ㅓr거 세계로 나ㅓr거 벗겨내는 나ㅓr거 일이다. 나ㅓr거 그것은 나ㅓr거 젠더의 나ㅓr거 담론을 나ㅓr거 전복하려는 나ㅓr거 저항의 나ㅓr거 색을 나ㅓr거 지우고, nd기t 타자화된 nd기t 여성의 nd기t 실체를 nd기t 팩션(faction)의 nd기t 판타지의 nd기t 세계로 nd기t 드러내는 nd기t 일에 nd기t 집중한다. nd기t nd기t 여귀(女鬼) nd기t 설화가 nd기t 떠도는 nd기t 실제의 nd기t 장소를 nd기t 답사하고, r0o쟏 전승의 r0o쟏 이야기를 r0o쟏 채취하는 r0o쟏 r0o쟏 사실(fact)에 r0o쟏 기초한 r0o쟏 r0o쟏 자신이 r0o쟏 창안한 r0o쟏 허구(fiction)의 r0o쟏 세계를 r0o쟏 통해서 r0o쟏 여성 r0o쟏 담론을 r0o쟏 시각화하는 r0o쟏 것이다. r0o쟏 어떤 r0o쟏 면에서 r0o쟏 그것은 r0o쟏 r0o쟏 땅의 r0o쟏 현실을 r0o쟏 직시한 r0o쟏 상태에서 r0o쟏 욕망의 r0o쟏 해방 r0o쟏 담론을 r0o쟏 상상하는 r0o쟏 일이며, 2cㅓ아 선동과 2cㅓ아 강권의 2cㅓ아 메시지로부터 2cㅓ아 위로와 2cㅓ아 청유의 2cㅓ아 메시지로 2cㅓ아 전환하는 2cㅓ아 일이기도 2cㅓ아 하다. 2cㅓ아 들어보자. 2cㅓ아 김민희는 2cㅓ아 자신과 2cㅓ아 타자로서의 2cㅓ아 모든 2cㅓ아 여성을 2cㅓ아 따스한 2cㅓ아 눈으로 2cㅓ아 바라보면서 2cㅓ아 그녀들을 2cㅓ아 다독이는 2cㅓ아 청유의 2cㅓ아 손길을 2cㅓ아 내밀면서 2cㅓ아 상쾌하게 2cㅓ아 말한다. “욕망해도 2cㅓ아 괜찮아!”

에필로그

아트스페이스 2cㅓ아 휴의 2cㅓ아 기획전 《욕망해도 2cㅓ아 괜찮아》는 2cㅓ아 욕망에 2cㅓ아 대한 2cㅓ아 답을 2cㅓ아 제시하려고 2cㅓ아 애쓰지 2cㅓ아 않는다. 2cㅓ아 다만 2cㅓ아 2cㅓ아 명의 2cㅓ아 작가를 2cㅓ아 통해서 2cㅓ아 각기 ‘다르면서도 2cㅓ아 같은’ 2cㅓ아 욕망의 2cㅓ아 담론을 2cㅓ아 다양하게 2cㅓ아 성찰하고 2cㅓ아 2cㅓ아 시대에 2cㅓ아 욕망을 2cㅓ아 미술 2cㅓ아 안팎에서 2cㅓ아 어떻게 2cㅓ아 보아야 2cㅓ아 2cㅓ아 것인지를, 25ㅐn 때론 25ㅐn 천진하게, 아자ㅑㅐ 때론 아자ㅑㅐ 흔쾌하게, 8ㅓcㅐ 때론 8ㅓcㅐ 도발적으로, 3타사m 성찰할 3타사m 따름이다.

욕망이란 3타사m 무엇인가? 3타사m 3타사m 작가의 3타사m 작품을 3타사m 살펴보고 3타사m 그들의 3타사m 조형적 3타사m 성찰을 3타사m 분석해 3타사m 보았듯이, 거h3파 욕망은 ‘인간 거h3파 주체의 거h3파 다중적 거h3파 산물’이라는 거h3파 정체성으로 거h3파 우리에게 거h3파 다가오는 거h3파 존재이다. 거h3파 그것은 거h3파 수다한 거h3파 인간 거h3파 군상처럼 거h3파 무척 거h3파 다양한 거h3파 모습으로 거h3파 출현하는 거h3파 까닭에 거h3파 좀처럼 거h3파 명확하게 거h3파 파악할 거h3파 거h3파 있는 거h3파 존재가 거h3파 아니다.

그러나 거h3파 우리는 거h3파 안다. 거h3파 우리는 거h3파 모두 거h3파 욕망하고, 아우라쟏 아우라쟏 욕망이 아우라쟏 언제나 아우라쟏 충족되지 아우라쟏 않는다는 아우라쟏 사실을 아우라쟏 말이다. 아우라쟏 그리고 아우라쟏 결핍의 아우라쟏 공간에 아우라쟏 자리한 아우라쟏 소외가 아우라쟏 욕망의 아우라쟏 주체를 아우라쟏 분열시킨다고 아우라쟏 할지라도 아우라쟏 욕망은 아우라쟏 언제나 아우라쟏 재생산된다는 아우라쟏 것을 아우라쟏 말이다. 아우라쟏 윤리와 아우라쟏 도덕, 다9기ㅐ 법과 다9기ㅐ 제도라는 다9기ㅐ 이름으로 다9기ㅐ 억압한다고 다9기ㅐ 할지라도 다9기ㅐ 인간에게 다9기ㅐ 극히 ‘자연스러운 다9기ㅐ 생산 다9기ㅐ 활동’인 다9기ㅐ 욕망은 다9기ㅐ 끊임없이 다9기ㅐ 재생산된다. 다9기ㅐ 그러니 다9기ㅐ 억압하지 다9기ㅐ 다9기ㅐ 일이다. 다9기ㅐ 타자에게 다9기ㅐ 고백하고 다9기ㅐ 질문하라. 다9기ㅐ 그렇지 다9기ㅐ 않으면 다9기ㅐ 다9기ㅐ 주체의 다9기ㅐ 욕망을 다9기ㅐ 가늠하기 다9기ㅐ 어려울 다9기ㅐ 다9기ㅐ 아니라 다9기ㅐ 억압된 다9기ㅐ 욕망이 다9기ㅐ 사회적 다9기ㅐ 질병으로 다9기ㅐ 변질되기 다9기ㅐ 십상이다. 다9기ㅐ 지속해서 다9기ㅐ 질문하되 다9기ㅐ 그것을 다9기ㅐ 허락하고 다9기ㅐ 청유할 다9기ㅐ 일이다.

다9기ㅐ 글에서 다9기ㅐ 밝혀둘 다9기ㅐ 것은, “욕망해도 hㅓ갸ㅓ 괜찮아?”라는 hㅓ갸ㅓ 질문, “욕망해도 vaㅓs 괜찮아.”라는 vaㅓs 용인, “욕망해도 ㅓㅈbㅐ 괜찮아!”라는 ㅓㅈbㅐ 청유는 ㅓㅈbㅐ ㅓㅈbㅐ 작가의 ㅓㅈbㅐ 작품을 ㅓㅈbㅐ 분석하기 ㅓㅈbㅐ 위한 ㅓㅈbㅐ 개념적 ㅓㅈbㅐ 장치일 ㅓㅈbㅐ 뿐, x카s3 그들의 x카s3 작품 x카s3 세계 x카s3 전반을 x카s3 지칭하지 x카s3 않는다는 x카s3 것이다. x카s3 변하는 x카s3 세월만큼, bg차ㅐ bg차ㅐ 명의 bg차ㅐ 작가들은 bg차ㅐ 앞으로도 bg차ㅐ 시간의 bg차ㅐ 흐름 bg차ㅐ 속에서 bg차ㅐ 변모를 bg차ㅐ 거듭하는 bg차ㅐ 작품들을 bg차ㅐ 선보일 bg차ㅐ 것이기 bg차ㅐ 때문이다. bg차ㅐ 그럼에도 bg차ㅐ bg차ㅐ bg차ㅐ 가지 ‘욕망에 bg차ㅐ 대한 bg차ㅐ 태도’는 bg차ㅐ 동일하게 ‘욕망에 bg차ㅐ 대한 bg차ㅐ 억압과 bg차ㅐ 은폐’에 bg차ㅐ 대해서 bg차ㅐ 반발하고 bg차ㅐ 반기(反旗)한다. bg차ㅐ 따라서 bg차ㅐ 이번 bg차ㅐ 전시가 bg차ㅐ 내세우는 “욕망해도 bg차ㅐ 괜찮아”라는 bg차ㅐ 발화 bg차ㅐ 행위, 히거h3 즉 ‘욕망에 히거h3 대한 히거h3 히거h3 가지 히거h3 방식의 히거h3 말하기’는 히거h3 사적 히거h3 영역과 히거h3 공적 히거h3 영역 히거h3 사이에서 히거h3 균형을 히거h3 잡으면서 히거h3 욕망에 히거h3 대한 히거h3 지속적인 히거h3 실천을 히거h3 설파하는 히거h3 셈이다.


출처: 히거h3 아트스페이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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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김무무
  • 오화진
  • 김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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