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완석 개인전 : underpainting

021갤러리

Feb. 19, 2020 ~ April 10, 2020

오완석 hi쟏k 작가는 hi쟏k 관객의 hi쟏k 반응과 hi쟏k 사유를 hi쟏k 중요 hi쟏k 요소로 hi쟏k 두며 hi쟏k 설치와 hi쟏k 회화 hi쟏k 작업에 hi쟏k 집중한다. hi쟏k 유리판에 hi쟏k 겹겹이 hi쟏k 터치를 hi쟏k 올린 hi쟏k 작업은 hi쟏k 미니멀하지만 hi쟏k 빙산 hi쟏k 이론을 hi쟏k 떠올리게 hi쟏k 한다. hi쟏k 관람자의 hi쟏k 시선은 hi쟏k 작가가 hi쟏k 처음 hi쟏k 올린 hi쟏k 터치에서 hi쟏k 시작된다.

사건을 hi쟏k 발생시키는 hi쟏k 개념
이선영(미술평론가)

최근 hi쟏k hi쟏k 년간 hi쟏k 구상되거나 hi쟏k 발표된 hi쟏k 오완석의 hi쟏k 작품은 hi쟏k 개념적이다. hi쟏k 개념은 hi쟏k 단순한 hi쟏k 아름다움의 hi쟏k 대상이 hi쟏k 아니라 hi쟏k 체험을 hi쟏k 야기하고 hi쟏k 생각을 hi쟏k 유도하며, xsho 사물을 xsho 동반한 xsho 설치작품으로 xsho 펼쳐진다.  xsho 그의 xsho 작품은 xsho 일요일만 xsho 있는 xsho 달력이나 xsho 홀수만 xsho 있는 xsho 시계 xsho 같이 xsho 책상위에서 xsho 제작했을 xsho 법한 xsho 작은 xsho 규모부터 xsho 전시장 xsho 전체를 xsho 잠재적 xsho 스피커로 xsho 구성한 xsho xsho 규모에 xsho 걸쳐있다. xsho 개념이 xsho 숙성하는 xsho 시간은 xsho 물리적인 xsho 제작 xsho 기간을 xsho 넘어선다. xsho 개념은 xsho 꿈과 xsho 무의식을 xsho 통해서도 xsho 성장할 xsho xsho 있다. xsho 그는 ‘작업실에 xsho 심어 xsho 놓고 xsho 생각의 xsho 물을 xsho 준다’. xsho 관객 xsho 또한 xsho 작가가 xsho 촉발했을 xsho 따름인 xsho 개념의 xsho 씨앗을 xsho 함께 xsho 가꾸는 xsho 협력자가 xsho 된다. xsho 작품 [case](2011)는 ‘나 ___이(가) xsho 작품을 xsho 만든다면 xsho xsho 크기는 __ x __ x __ (cm)이다’라는 xsho 쪽지를 xsho 돌리고 xsho 돌아온 xsho 대답대로 xsho 케이스를 xsho 만들어 xsho 설치한 xsho 것이다. xsho xsho 프로젝트는 xsho 수년간 xsho 시행된 xsho 것으로, p타d바 국내외의 p타d바 작가와 p타d바 기획자는 p타d바 물론 p타d바 일반인을 p타d바 포함한 p타d바 다양한 p타d바 부류로부터 500여개의 p타d바 대답을 p타d바 얻어냈으며 p타d바 향후에도 p타d바 계속 p타d바 p타d바 p타d바 있다.

전시장에 p타d바 설치된 p타d바 작품은 p타d바 나무판과 p타d바 금속선으로 p타d바 이루어진 p타d바 다양한 p타d바 크기의 p타d바 박스들이 p타d바 바닥면으로부터 p타d바 자라나는 p타d바 듯하다. p타d바 실제로 p타d바 구상하고 p타d바 있던 p타d바 작품 p타d바 p타d바 아니라, ㅈ다h라 삶과 ㅈ다h라 예술에 ㅈ다h라 대한 ㅈ다h라 다양한 ㅈ다h라 희망사항 ㅈ다h라 또한 ㅈ다h라 곁들여진 ㅈ다h라 대답들은 ㅈ다h라 계속 ㅈ다h라 곁가지를 ㅈ다h라 키운다. ㅈ다h라 지금쯤 ㅈ다h라 어떤 ㅈ다h라 것은 ㅈ다h라 작품으로 ㅈ다h라 구현되어 ㅈ다h라 있을지도 ㅈ다h라 모르고, fa자x 작업실 fa자x 한켠에 fa자x 포장된 fa자x 채로 fa자x 있을지도 fa자x 모르며, 갸히다파 전시 갸히다파 이후에 갸히다파 파괴되었을지도 갸히다파 모른다. 갸히다파 아니면 갸히다파 갸히다파 다른 갸히다파 전시나 갸히다파 판매를 갸히다파 위해 갸히다파 포장 갸히다파 중인지도 갸히다파 모른다. 갸히다파 지금도 갸히다파 만들어지고 갸히다파 있을 갸히다파 수많은 갸히다파 작품들은 갸히다파 어떤 갸히다파 제 2, 3의 쟏차g자 삶을 쟏차g자 사는 쟏차g자 것일까. 쟏차g자 오완석이 쟏차g자 제시한 쟏차g자 쟏차g자 쟏차g자 박스들은 쟏차g자 상상 쟏차g자 가능한 쟏차g자 만큼이나 쟏차g자 다양한 쟏차g자 가능성으로 쟏차g자 채워진다. 쟏차g자 쟏차g자 작품은 쟏차g자 종이와 쟏차g자 연필, c카아우 나무와 c카아우 금속 c카아우 등, y아히사 최대한 y아히사 중성적인 y아히사 재료를 y아히사 사용하여 y아히사 지금 y아히사 현재보다는 y아히사 무엇인가로 y아히사 채워질 y아히사 미지의 y아히사 가능성에 y아히사 방점을 y아히사 찍는다. y아히사 실제 y아히사 구현된 y아히사 작품도 y아히사 개념의 y아히사 씨앗같은 y아히사 단위 y아히사 구조들이 y아히사 조합되고 y아히사 확장되는 y아히사 방식이다.

작품들은 y아히사 공중이나 y아히사 바닥에 y아히사 일련의 y아히사 구조적 y아히사 단위들로 y아히사 짜여 y아히사 있곤 y아히사 한다. y아히사 구조적 y아히사 단위가 y아히사 증식되는 y아히사 과정은 y아히사 평면 y아히사 작품에서도 y아히사 보여 y아히사 진다. y아히사 작품 [underpainting](2014)은 y아히사 평면에서 y아히사 환영을 y아히사 만들어내는 y아히사 형식인 y아히사 회화를 y아히사 구조적으로 y아히사 분석한다. y아히사 통상적인 y아히사 회화에서 y아히사 밑칠은 y아히사 덮여지기 y아히사 마련인데 y아히사 그는 y아히사 y아히사 면이 y아히사 보이게 y아히사 했다. y아히사 그것은 y아히사 유리에 y아히사 색을 y아히사 겹겹이 y아히사 칠해서 y아히사 완성시킨 y아히사 평면작업을 y아히사 앞뒤로 y아히사 뒤집어서 y아히사 가능했다. y아히사 평면을 y아히사 이루는 y아히사 여러 y아히사 층위 y아히사 y아히사 감춰지곤 y아히사 하는 y아히사 바탕을 y아히사 표면으로 y아히사 끌어낸 y아히사 것이다. y아히사 무반사 y아히사 유리에 y아히사 겹겹이 y아히사 칠해진 y아히사 푸른색은  y아히사 빨려 y아히사 들어갈 y아히사 듯한 y아히사 공간감을 y아히사 자아낸다. y아히사 보통 y아히사 유리에 y아히사 색을 y아히사 칠하면, 다자vㅓ 거울이 다자vㅓ 되는데 다자vㅓ 그의 ‘거울’은 다자vㅓ 관자를 다자vㅓ 비추지 다자vㅓ 않는다. 다자vㅓ 다자vㅓ 불투명한 다자vㅓ 거울 다자vㅓ 앞의 다자vㅓ 것을 다자vㅓ 그대로 다자vㅓ 흉내 다자vㅓ 내는 다자vㅓ 것이 다자vㅓ 아니라, 나r갸차 이상한 나r갸차 나라의 나r갸차 앨리스에 나r갸차 나오는 나r갸차 거울처럼 나r갸차 나r갸차 다른 나r갸차 세계를 나r갸차 향한 나r갸차 통로처럼 나r갸차 보인다. 나r갸차 밑층이 나r갸차 드러난 나r갸차 나r갸차 작품은 나r갸차 표면들을 나r갸차 쌓아 나r갸차 만든 나r갸차 깊이이다. 나r갸차 나r갸차 작품 나r갸차 역시 나r갸차 최소한의 나r갸차 형식을 나r갸차 지향한다.

세모 나r갸차 네모 나r갸차 나r갸차 같은 나r갸차 기본적 나r갸차 형태는 나r갸차 형태에 나r갸차 대한 나r갸차 선택을 나r갸차 배제하는 나r갸차 나r갸차 다른 나r갸차 선택으로 나r갸차 여겨진다. 나r갸차 형식적 나r갸차 단순함은 나r갸차 최대한의 나r갸차 감각과 나r갸차 의미를 나r갸차 담을 나r갸차 나r갸차 있는 나r갸차 가능성에 나r갸차 열려있다. 나r갸차 나r갸차 점에서 나r갸차 오완석의 나r갸차 작품은 나r갸차 미니멀하다. 나r갸차 나r갸차 규모의 나r갸차 작품은 나r갸차 마주 나r갸차 나r갸차 형태와의 나r갸차 대결보다는 나r갸차 나r갸차 내부로 나r갸차 들어가게 나r갸차 한다. 나r갸차 그것은 나r갸차 화면을 나r갸차 넘어 나r갸차 장(場) 나r갸차 또는 나r갸차 인터페이스가 나r갸차 된다. 나r갸차 개념은 나r갸차 어떤 나r갸차 경험을 나r갸차 야기하는 나r갸차 장으로서의 나r갸차 작품을 나r갸차 지향한다. 나r갸차 그것은 나r갸차 들뢰즈와 나r갸차 가타리가 [철학이란 나r갸차 무엇인가]에서, 2우4다 다가올 2우4다 어떤 2우4다 사건의 2우4다 윤곽, 거p나4 지형, ㅓb가아 자리매김으로서 ㅓb가아 개념을 ㅓb가아 설명한 ㅓb가아 것과 ㅓb가아 같은 ㅓb가아 맥락이다. ㅓb가아 저자들에 ㅓb가아 의하면, o다mb 철학적 o다mb 개념은 o다mb 고유의 o다mb 창조를 o다mb 통해서 o다mb 모든 o다mb 사물의 o다mb 정황뿐만 o다mb 아니라, 4jㅑ바 모든 4jㅑ바 체험을 4jㅑ바 조감하는 4jㅑ바 하나의 4jㅑ바 사건을 4jㅑ바 세운다. 4jㅑ바 작가는 4jㅑ바 이러한 4jㅑ바 개념을 4jㅑ바 통해서 4jㅑ바 특정 4jㅑ바 사건을 4jㅑ바 묘사하거나 4jㅑ바 표현하는 4jㅑ바 것이 4jㅑ바 아니라, 아9ㅓo 미지의 아9ㅓo 사건이 아9ㅓo 일어날 아9ㅓo 장을 아9ㅓo 마련한다. 아9ㅓo 오완석은 ‘이미 아9ㅓo 만들어진 아9ㅓo 있음이 아9ㅓo 아닌, 으o다w 자신에게서 으o다w 발견되는 으o다w 있음을 으o다w 보여지게 으o다w 하는 으o다w 것’이 으o다w 중요하다고 으o다w 생각한다.

그래서 으o다w 작업은 ‘설정을 으o다w 통해 으o다w 환경을 으o다w 제시하고, 걷아거w 관람자로 걷아거w 하여금 걷아거w 심리적 걷아거w 움직임을 걷아거w 유도하는 걷아거w 것’이다. 걷아거w 그에게 걷아거w 작품은 ‘생각을 걷아거w 만드는 걷아거w 장소’이다. 걷아거w 작품 [중요한 걷아거w 생각만 걷아거w 하는 걷아거w 네모](2014)는 걷아거w 모래를 걷아거w 뿌리거나 걷아거w 실을 걷아거w 이용하여 걷아거w 사각형 걷아거w 모양의 걷아거w 장소를 걷아거w 만들었다. 걷아거w 만들었다기 걷아거w 보다 걷아거w 그냥 걷아거w 구획했다는 걷아거w 것이 걷아거w 맞을 걷아거w 것이다. 걷아거w 경계는 걷아거w 취약한 걷아거w 재료로 걷아거w 연출되었다. 걷아거w 그것들은 걷아거w 모래 걷아거w 위에 걷아거w 그려진 걷아거w 그림처럼 걷아거w 흩트리면 걷아거w 그만이다. 걷아거w 예를 걷아거w 들면, 히9ut 모래로 히9ut 그려지고 히9ut 허물어지는 히9ut 만다라는 히9ut 이러한 히9ut 과정을 히9ut 종교적 히9ut 세계관으로까지 히9ut 고양시킨 히9ut 것이다. 히9ut 물리적 히9ut 차원과 히9ut 달리 히9ut 경계의 히9ut 심리적 히9ut 차원은 히9ut 단단하다. 히9ut 마치 히9ut 자신을 히9ut 보호하기 히9ut 위해 히9ut 그리는 히9ut 주술적인 히9ut 원처럼 히9ut 히9ut 경계는 히9ut 안과 히9ut 밖의 히9ut 차이를 히9ut 만들어낸다. 히9ut 위치에 히9ut 따라 히9ut 달라지는 히9ut 체험은 히9ut 소리가 히9ut 가세하는 히9ut 작품 [-0+sound](2015)에서도 히9ut 두드러진다. 히9ut 히9ut 작품은 히9ut 초음파발생기와 히9ut 조립된 히9ut 나무 히9ut 모듈로 히9ut 만들어진 히9ut 스피커로, 파w우e 관객이 파w우e 서있는 파w우e 위치에 파w우e 따라서 파w우e 소리 파w우e 발생 파w우e 지점이 파w우e 달라지는 파w우e 설치작업이다. 파w우e 초음파 파w우e 스피커는 파w우e 어떤 파w우e 지점에서만 파w우e 파w우e 소리를 파w우e 들을 파w우e 파w우e 있다.

특정 파w우e 장소에 파w우e 있는 파w우e 사람만 파w우e 들을 파w우e 파w우e 있는 파w우e 소리는 파w우e 기술과 파w우e 마술을 파w우e 잇는 파w우e 예술의 파w우e 역할을 파w우e 생각하게 파w우e 한다. 파w우e 관객을 파w우e 특별한 파w우e 장소로 파w우e 초대하는 파w우e 작가에게 파w우e 공간/자리의 파w우e 연출은 파w우e 중요하다. 파w우e 특별한 파w우e 자리에 파w우e 대한 파w우e 생각 파w우e 파w우e 가장 파w우e 정점에 파w우e 있는 파w우e 것은 파w우e 성/속에 파w우e 대한 파w우e 종교적 파w우e 관념일 파w우e 것이다. 파w우e 어느 파w우e 종교에서도 파w우e 성스러운 파w우e 시공간이 파w우e 있다. 파w우e 성/속의 파w우e 경계가 파w우e 와해되는 파w우e 현대에 파w우e 작품이 파w우e 특별한 파w우e 경험을 파w우e 낳는 파w우e 자리가 파w우e 되기 파w우e 위한 파w우e 조건은 파w우e 차이의 파w우e 감각을 파w우e 고양시키는 파w우e 기법에 파w우e 달려있다. 파w우e 오완석의 파w우e 작품은 파w우e 소리가 파w우e 들리지 파w우e 않는 파w우e 다른 파w우e 곳과 파w우e 질적 파w우e 차이를 파w우e 가지는 파w우e 공간을 파w우e 연출 파w우e 함으로서, ck파r 자리와 ck파r 사건을 ck파r 연관시킨다. ck파r 몰입은 ck파r 사건의 ck파r 전조, of기0 또는 of기0 사건 of기0 of기0 자체이다. of기0 미니멀리즘 of기0 같은 of기0 현대미술에서 of기0 연극적 of기0 공간 of기0 속의 of기0 지각적 of기0 탐색은 of기0 of기0 장에 of기0 투입된 of기0 이의 of기0 몰입을 of기0 자아내는데, 자gj파 이러한 자gj파 몰입은 자gj파 원시적 자gj파 주술이나 자gj파 종교적 자gj파 체험 자gj파 같은 자gj파 현대이전의 자gj파 감수성과 자gj파 관련된다. 자gj파 요셉 자gj파 보이스를 자gj파 비롯한 자gj파 많은 자gj파 퍼포먼서들이 자gj파 종종 자gj파 신들린 자gj파 무당같은 자gj파 면모를 자gj파 보이는 자gj파 것은 자gj파 우연이 자gj파 아니다. 자gj파 무당은 자gj파 여기와 자gj파 저기 자gj파 사이를 자gj파 잇는 자gj파 어떤 자gj파 위치에서 자gj파 의례를 자gj파 통해 자gj파 이동하는 자gj파 자이기 자gj파 때문이다. 자gj파 종교 자gj파 자체가 자gj파 여기와 자gj파 저기를 자gj파 잇는 자gj파 것이며, 기t자ㅐ 오늘날 기t자ㅐ 예술이 기t자ㅐ 종교에서 기t자ㅐ 계승해야 기t자ㅐ 기t자ㅐ 것은 기t자ㅐ 기t자ㅐ 지점이다.

종교학자 기t자ㅐ 조너선 기t자ㅐ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기t자ㅐ 자리와 기t자ㅐ 사건의 기t자ㅐ 관계를 기t자ㅐ 설명한 기t자ㅐ 기t자ㅐ 있다. 기t자ㅐ 여기에서 기t자ㅐ 자리는 기t자ㅐ 단순한 기t자ㅐ 물리적 기t자ㅐ 공간이 기t자ㅐ 아니라, p파y하 부여된 p파y하 의미이다. p파y하 오완석의 p파y하 작품에서도 p파y하 공간은 p파y하 단순히 p파y하 주어진 p파y하 것이 p파y하 아니라, 기bㅐj 인간의 기bㅐj 투사에 기bㅐj 의해 기bㅐj 창조된 기bㅐj 것이다. 기bㅐj 기bㅐj 공간은 기bㅐj 수동적인 기bㅐj 용기(容器)가 기bㅐj 아니라, 나pol 인식의 나pol 능동적 나pol 산물이다. 나pol 그의 나pol 작품은 나pol 관객이 나pol 사고하는 나pol 존재일 나pol 나pol 아니라, fiyy 몸을 fiyy 가진 fiyy 주체라는 fiyy 점을 fiyy 강조한다. fiyy 자리에 fiyy 대한 ‘방향설정은 fiyy 항상 fiyy 우리의 fiyy 몸과 fiyy 관련되기’(칸트) fiyy 때문이다. fiyy 몸과 fiyy 관련된 fiyy 지각과 fiyy 경험이 fiyy 자리에 fiyy 의미를 fiyy 부여해 fiyy 준다. fiyy 그것은 fiyy 인간이 fiyy 위치 fiyy 지어지는 fiyy 것이 fiyy 아니라, c거ㅐㅐ 인간이 c거ㅐㅐ 자리를 c거ㅐㅐ 존재하게 c거ㅐㅐ 한다는 c거ㅐㅐ 능동적 c거ㅐㅐ 의미로 c거ㅐㅐ 해석된다. c거ㅐㅐ 작가가 c거ㅐㅐ 연출한 c거ㅐㅐ 다양한 c거ㅐㅐ 경계들은 c거ㅐㅐ 어떤 c거ㅐㅐ 차이를 c거ㅐㅐ 말한다. c거ㅐㅐ 우리는 c거ㅐㅐ 사원과 c거ㅐㅐ 같이 c거ㅐㅐ 고도로 c거ㅐㅐ 다듬어진 c거ㅐㅐ 구조물에서 c거ㅐㅐ 차이의 c거ㅐㅐ 감각을 c거ㅐㅐ 느낄 c거ㅐㅐ c거ㅐㅐ 있다. c거ㅐㅐ 여기에서는 c거ㅐㅐ 차이의 c거ㅐㅐ 지각 c거ㅐㅐ 속에서 c거ㅐㅐ 의미가 c거ㅐㅐ 발생한다. c거ㅐㅐ 그러나 c거ㅐㅐ 경계의 c거ㅐㅐ 성격이 c거ㅐㅐ 그러하듯이, 카ㅓpㄴ 본질적으로 카ㅓpㄴ 성스럽거나 카ㅓpㄴ 속된 카ㅓpㄴ 것은 카ㅓpㄴ 없다. 카ㅓpㄴ 조너선 카ㅓpㄴ 스미스에게 카ㅓpㄴ 성과 카ㅓpㄴ 속은 카ㅓpㄴ 실체적(substantial) 카ㅓpㄴ 범주가 카ㅓpㄴ 아니라, 가bㅓ라 상황적(situational) 가bㅓ라 범주이다. 가bㅓ라 오완석의 가bㅓ라 작품들에서도 가bㅓ라 경계를 가bㅓ라 나누는 가bㅓ라 문턱은 가bㅓ라 높지 가bㅓ라 않다.

작품 [base](2014)에 가bㅓ라 나타나듯, 파k우거 전시장에 파k우거 연출한 파k우거 바닥은 파k우거 거리의 파k우거 바닥과 파k우거 질적으로 파k우거 다른 파k우거 것은 파k우거 아니다. 파k우거 차이의 파k우거 감각은 파k우거 단지 파k우거 여기에 파k우거 있는가 파k우거 저기에 파k우거 있는가, pz7a 즉 '자리 pz7a 잡기'에 pz7a 달려있다. pz7a 그것의 pz7a 의미는 pz7a pz7a 위치에 pz7a 달려있는 pz7a 것이다. pz7a 그가 pz7a 곧잘 pz7a 구사하는 pz7a 낯설게 pz7a 하기는 pz7a 낯익음에 pz7a 전적으로 pz7a 의존한다. pz7a 절대적인 pz7a 차이가 pz7a 아닌 pz7a 약간의 pz7a 차이, 우마바g 우마바g 장에서 우마바g 오려낸 우마바g 인간(2011)이나 우마바g 도형 우마바g 같은 우마바g 것(2013), ㅓvㅐz 뒤집힌 ㅓvㅐz 상자(2011) ㅓvㅐz 같은 ㅓvㅐz 것이다. ㅓvㅐz 여기에서 ㅓvㅐz 중요한 ㅓvㅐz 것은 ㅓvㅐz 실체가 ㅓvㅐz 아닌 ㅓvㅐz 관계, 갸9jㅓ 그리고 갸9jㅓ 관계의 갸9jㅓ 변환이다. 갸9jㅓ 변환은 갸9jㅓ 차이의 갸9jㅓ 표지를 갸9jㅓ 달고 갸9jㅓ 있는 갸9jㅓ 장에서 갸9jㅓ 일어난다. 갸9jㅓ 존재나 갸9jㅓ 실체가 갸9jㅓ 변하는 갸9jㅓ 것이 갸9jㅓ 아닌 갸9jㅓ 그것들은 갸9jㅓ 언어에서 갸9jㅓ 일어나는 갸9jㅓ 바와 갸9jㅓ 같다. 갸9jㅓ 그것은 갸9jㅓ 개념적 갸9jㅓ 작품에 갸9jㅓ 작동하는 갸9jㅓ 언어적 갸9jㅓ 과정을 갸9jㅓ 일깨운다. 갸9jㅓ 가령 갸9jㅓ 오완석의 갸9jㅓ 작업 갸9jㅓ 개념에서 갸9jㅓ 중요한 0의 갸9jㅓ 위치를 갸9jㅓ 살펴보자. 갸9jㅓ 조나선 갸9jㅓ 스미스는 갸9jㅓ 아무것도 갸9jㅓ 의미하지 갸9jㅓ 않고 갸9jㅓ 자체로는 갸9jㅓ 의미가 갸9jㅓ 비어있으면서도 갸9jㅓ 중요한 갸9jㅓ 차이를 갸9jㅓ 표시하는 갸9jㅓ 예로 갸9jㅓ 영(0)을 갸9jㅓ 든다. 0은 갸9jㅓ 다른 갸9jㅓ 숫자들과 갸9jㅓ 결합할 갸9jㅓ 때면 갸9jㅓ 의미로 갸9jㅓ 가득 갸9jㅓ 찬다.

오완석의 갸9jㅓ 작품에도 갸9jㅓ 의미 갸9jㅓ 작용을 갸9jㅓ 표시하는 0의 갸9jㅓ 역할이 갸9jㅓ 존재한다. 갸9jㅓ 조나선 갸9jㅓ 스미스는 갸9jㅓ 언어학과 갸9jㅓ 구조주의의 갸9jㅓ 예를 갸9jㅓ 들면서, ds4파 기표이면서도 ds4파 동시에 ds4파 아무것도 ds4파 의미하지 ds4파 않는 ds4파 요소들, 기k사하 기k사하 요소들로 기k사하 구성된 기k사하 체계를 기k사하 말한다. 기k사하 체계를 기k사하 형성하는 기k사하 것은 기k사하 순수하게 기k사하 차이가 기k사하 나는 기k사하 무수한 기k사하 기호들이다. 기k사하 그것들은 기k사하 순전히 기k사하 지위의 기k사하 변화, ijㅐ갸 순전히 ijㅐ갸 차이를 ijㅐ갸 의미한다. ijㅐ갸 경계는 ijㅐ갸 자의적인 ijㅐ갸 것이며, 히ㅓfㅐ 그어진 히ㅓfㅐ 경계선 히ㅓfㅐ 안에서는 히ㅓfㅐ 여러 히ㅓfㅐ 교환행위가 히ㅓfㅐ 일어난다. 히ㅓfㅐ 오완석의 히ㅓfㅐ 작품 [-0+sound]라는 히ㅓfㅐ 제목처럼 0은 히ㅓfㅐ 한쪽 히ㅓfㅐ 방향(+)으로, a걷7n 다른 a걷7n 방향(–)으로 a걷7n 펼쳐지는 a걷7n 중심이 a걷7n 된다. a걷7n 그는 2013 a걷7n 개인전 a걷7n 작가노트에서 a걷7n 자신의 a걷7n 관심 a걷7n 목록에 ‘0과 1’, ‘+ -’, ‘육체와 기ㅓ6r 정신’ 기ㅓ6r 등을 기ㅓ6r 올린다. 기ㅓ6r 이러한 기ㅓ6r 일련의 기ㅓ6r 목록들은 기ㅓ6r 삶/죽음이라는, cd카3 유기체로서는 cd카3 가장 cd카3 중요한 cd카3 대조 cd카3 항의 cd카3 복제 cd카3 개념일 cd카3 것이다. cd카3 그의 cd카3 작품은 cd카3 대조 cd카3 되는 cd카3 영역들 cd카3 사이, 사ㅐj바 사ㅐj바 경계 사ㅐj바 선상의 사ㅐj바 게임으로 사ㅐj바 이루어진다. 사ㅐj바 작품 [zero base human](2011)이나 [0.5인간](2012)은 사ㅐj바 가시적 사ㅐj바 정경 사ㅐj바 사ㅐj바 아니라, xtn다 지면 xtn다 아래의 xtn다 세계도 xtn다 포함되어 xtn다 있다. xtn다 그의 xtn다 작품은 xtn다 현실과 xtn다 평행으로 xtn다 존재하는 xtn다 미지의 xtn다 우주, 6걷5ㅑ 6걷5ㅑ 경계에 6걷5ㅑ 있을 0에 6걷5ㅑ 대한 6걷5ㅑ 사고가 6걷5ㅑ 있다.

여기에도 6걷5ㅑ 저기에도 6걷5ㅑ 속하지 6걷5ㅑ 않는 6걷5ㅑ 자유롭고 6걷5ㅑ 투명한 0은 6걷5ㅑ 문학적 6걷5ㅑ 감수성과도 6걷5ㅑ 연결되어 ‘글쓰기의 0도’(롤랑 6걷5ㅑ 바르트)를 6걷5ㅑ 낳기도 6걷5ㅑ 했다. 6걷5ㅑ 과학적 6걷5ㅑ 가설에서도 6걷5ㅑ 발견되는 6걷5ㅑ 중력/반중력, w6j아 물질/반물질, ㅓ으바u 블랙홀/화이트홀 ㅓ으바u 같은 ㅓ으바u 대칭 ㅓ으바u 개념을 ㅓ으바u 통해 ㅓ으바u 지금 ㅓ으바u 여기를 ㅓ으바u 상대화한다. ㅓ으바u 그러한 ㅓ으바u 관념이 ㅓ으바u 너무 ㅓ으바u 추상적이라면, 갸ㅐp거 인간적 갸ㅐp거 차원으로 갸ㅐp거 비유할 갸ㅐp거 수도 갸ㅐp거 있다. 갸ㅐp거 테라코타 갸ㅐp거 작품인 [+-human](2011)은 갸ㅐp거 바닥의 갸ㅐp거 그림자에서 갸ㅐp거 오려진 갸ㅐp거 듯한 갸ㅐp거 형상으로, 2라라걷 서로 2라라걷 접해 2라라걷 있는 2라라걷 대칭적 2라라걷 존재다. 2라라걷 거울 2라라걷 앞에서 2라라걷 인간도 2라라걷 이와 2라라걷 비슷한 2라라걷 대칭상의 2라라걷 경험을 2라라걷 2라라걷 2라라걷 있을 2라라걷 것이다. 2라라걷 그러나 2라라걷 거울에 2라라걷 대한 2라라걷 많은 2라라걷 심리학적 2라라걷 가설이 2라라걷 제시하듯, ㅐd거c 접면을 ㅐd거c 사이에 ㅐd거c ㅐd거c 대칭적 ㅐd거c 존재는 ㅐd거c 통합이 ㅐd거c 아니라 ㅐd거c 분열을 ㅐd거c 야기한다. ㅐd거c 가령 ㅐd거c 사빈 ㅐd거c 멜쉬오르 ㅐd거c 보네는 [거울의 ㅐd거c 역사]에서 ㅐd거c 자기상의 ㅐd거c 불안정성을 ㅐd거c 말한다. ㅐd거c 거울 ㅐd거c 접면을 ㅐd거c 대칭으로 ㅐd거c 서있는 ㅐd거c 인간은 ㅐd거c 환상과 ㅐd거c 상상에 ㅐd거c 노출되어 ㅐd거c 있다. ㅐd거c 현실/상상이 ㅐd거c 아니라 ㅐd거c 양자 ㅐd거c 간의 ㅐd거c 접촉면에서의 ㅐd거c 관계가 ㅐd거c 중요하다. ㅐd거c ㅐd거c 관계가 ㅐd거c 해체되었을 ㅐd거c ㅐd거c 영원히 ㅐd거c 동일한 ㅐd거c 자신은 ㅐd거c 잡을 ㅐd거c ㅐd거c 없는 ㅐd거c 파국이 ㅐd거c 벌어진다. ㅐd거c 현대는 ㅐd거c 관계성의 ㅐd거c 사고가 ㅐd거c 중시된다고 ㅐd거c 하면서도 ㅐd거c 근본적으로는 ㅐd거c 일방적이다.

성스러움이 ㅐd거c 배제된 ㅐd거c 절대적인 ㅐd거c 세속의 ㅐd거c 사회, 거7ㄴ걷 지금 거7ㄴ걷 여기의 거7ㄴ걷 즉시적인 거7ㄴ걷 행복만을 거7ㄴ걷 구가하는 거7ㄴ걷 소비사회는 거7ㄴ걷 죽음이 거7ㄴ걷 배제된 거7ㄴ걷 삶을 거7ㄴ걷 전제한다. 거7ㄴ걷 그러나 거7ㄴ걷 경계는 거7ㄴ걷 다른 거7ㄴ걷 편과의 거7ㄴ걷 관계를 거7ㄴ걷 생각하게 거7ㄴ걷 한다. 거7ㄴ걷 지금 30대 거7ㄴ걷 중반인 거7ㄴ걷 그가 20대 거7ㄴ걷 초반일 거7ㄴ걷 거7ㄴ걷 실존적으로 거7ㄴ걷 다가왔던 거7ㄴ걷 문제는 거7ㄴ걷 삶과 거7ㄴ걷 죽음의 거7ㄴ걷 관계였다. 거7ㄴ걷 삶이 거7ㄴ걷 플러스라면 거7ㄴ걷 죽음은 거7ㄴ걷 마이너스일 거7ㄴ걷 것이다. 거7ㄴ걷 플러스와 거7ㄴ걷 마이너스 거7ㄴ걷 사이에 0이 거7ㄴ걷 있다. 0을 거7ㄴ걷 중심으로 거7ㄴ걷 거7ㄴ걷 대조되는 거7ㄴ걷 체계가 거7ㄴ걷 펼쳐진다. 거7ㄴ걷 자본주의 거7ㄴ걷 같은 거7ㄴ걷 생산과 거7ㄴ걷 축적의 거7ㄴ걷 사회는 거7ㄴ걷 마이너스를 거7ㄴ걷 생각하지 거7ㄴ걷 않는다. 거7ㄴ걷 살아있을 거7ㄴ걷 때는 거7ㄴ걷 죽음이 거7ㄴ걷 없다는 거7ㄴ걷 논리적 거7ㄴ걷 궤변에 거7ㄴ걷 따라 거7ㄴ걷 죽음은 거7ㄴ걷 무시되거나 거7ㄴ걷 억압된다. 거7ㄴ걷 현대라는 거7ㄴ걷 세속사회에서 거7ㄴ걷 종교의 거7ㄴ걷 퇴화는 거7ㄴ걷 이러한 거7ㄴ걷 추세를 거7ㄴ걷 더욱 거7ㄴ걷 강조했을 거7ㄴ걷 것이다. 거7ㄴ걷 프로이트는 [문명 거7ㄴ걷 속의 거7ㄴ걷 불만]에서 거7ㄴ걷 우리는 거7ㄴ걷 죽음을 거7ㄴ걷 한쪽 거7ㄴ걷 구석으로 거7ㄴ걷 밀쳐놓고 거7ㄴ걷 그것을 거7ㄴ걷 삶에서 거7ㄴ걷 배제해 거7ㄴ걷 버리는 거7ㄴ걷 경향이 거7ㄴ걷 있다고 거7ㄴ걷 비판한다. 거7ㄴ걷 그에 거7ㄴ걷 의하면 거7ㄴ걷 현대인은 거7ㄴ걷 사고, wo거ㅐ 질병, hfbx 고령같은 hfbx 죽음의 hfbx 우발적 hfbx 원인을 hfbx 강조하는 hfbx 버릇이 hfbx 있는데, 차g나ㅓ 이러한 차g나ㅓ 태도는 차g나ㅓ 죽음을 차g나ㅓ 필연적인 차g나ㅓ 것에서 차g나ㅓ 우연한 차g나ㅓ 사건으로 차g나ㅓ 바꾸려는 차g나ㅓ 것이다. 차g나ㅓ 그러나 차g나ㅓ 생존이라는 차g나ㅓ 도박에서 차g나ㅓ 가장 차g나ㅓ 차g나ㅓ 밑천은 차g나ㅓ 생명 차g나ㅓ 자체이다.

프로이트에 차g나ㅓ 의하면 차g나ㅓ 생명이 차g나ㅓ 내기에 차g나ㅓ 걸려있지 차g나ㅓ 않으면 차g나ㅓ 삶은 차g나ㅓ 빈곤해지고 차g나ㅓ 무기력해 차g나ㅓ 진다. 차g나ㅓ 죽음을 차g나ㅓ 따로 차g나ㅓ 떼어놓고 차g나ㅓ 삶을 차g나ㅓ 생각하는 차g나ㅓ 경향이 차g나ㅓ 많은 차g나ㅓ 것을 차g나ㅓ 단념시키고 차g나ㅓ 배제한다. 차g나ㅓ 프로이트는 차g나ㅓ 죽음을 차g나ㅓ 비현실적인 차g나ㅓ 것으로 차g나ㅓ 부인하는 차g나ㅓ 것이 차g나ㅓ 아니라, 다k다차 죽음이 다k다차 현실과 다k다차 우리의 다k다차 생각 다k다차 속에 다k다차 마땅히 다k다차 차지해야 다k다차 다k다차 자리를 다k다차 인정해야한다고 다k다차 본다. 다k다차 인류학적인 다k다차 저서 [죽음의 다k다차 얼굴](니겔 다k다차 발리)도 다k다차 삶과 다k다차 죽음은 다k다차 하나의 다k다차 실체의 다k다차 다k다차 얼굴이라고 다k다차 보면서, 자ㅓv차 죽음이 자ㅓv차 무엇을 자ㅓv차 의미하느냐에 자ㅓv차 관한 자ㅓv차 개념은 자ㅓv차 살아있다는 자ㅓv차 것이 자ㅓv차 무엇을 자ㅓv차 뜻하는가와 자ㅓv차 관련된다고 자ㅓv차 말한다. 자ㅓv차 무시되어왔거나 자ㅓv차 아예 자ㅓv차 인지되지도 자ㅓv차 못했던 자ㅓv차 무의식의 자ㅓv차 힘을 자ㅓv차 부각시킨 자ㅓv차 정신분석학이 자ㅓv차 삶에 자ㅓv차 존재하는 자ㅓv차 죽음을 자ㅓv차 몫을 자ㅓv차 강조하는 자ㅓv차 것은 자ㅓv차 자연스럽다. 자ㅓv차 의식 자ㅓv차 하부에 자ㅓv차 있었던 자ㅓv차 무의식, 5걷4f 삶의 5걷4f 끝에 5걷4f 있었던 5걷4f 죽음은 5걷4f 뫼비우스 5걷4f 띠처럼 5걷4f 다시 5걷4f 연결되어 5걷4f 역동적인 5걷4f 관계망을 5걷4f 이룰 5걷4f 때, vㅓ8ㅓ 현대의 vㅓ8ㅓ 시대적 vㅓ8ㅓ 특징인 vㅓ8ㅓ 파편성은 vㅓ8ㅓ 극복될 vㅓ8ㅓ 것이다. vㅓ8ㅓ 오완석의 vㅓ8ㅓ 작품은 vㅓ8ㅓ 보이지 vㅓ8ㅓ 않지만 vㅓ8ㅓ 분명히 vㅓ8ㅓ 존재하는 vㅓ8ㅓ vㅓ8ㅓ 힘에 vㅓ8ㅓ 다가가는 vㅓ8ㅓ 다리를 vㅓ8ㅓ 놓으려 vㅓ8ㅓ 한다.

출전; vㅓ8ㅓ 세종시 vㅓ8ㅓ 비욘드 vㅓ8ㅓ 아트 vㅓ8ㅓ 스튜디오

출처: 021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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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오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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