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진 개인전 : Lace

전시공간

2019년 12월 20일 ~ 2020년 1월 19일

‘너머’ 라는 조건들
이정민 (독립기획자)

... in copying such things as lace or leaves of plants, a negative image is perfectly allowable, black lace being as familiar to the eye as white lace... (William Henry Fox Talbot, The Pencil of Nature (London: Longman, Brown, Green and Longmans, 1844), 56.)

디지털의, 그래픽의 공간. 1과 0.9999999999999 사이에도 엄청난 거리가 존재할 수 있 는, 무한을 담아내는 작은 세계에서 숫자로 제시되는 좌표는 소수점 하나, 자릿수 하나 들을 늘리거나 줄이도록 미세하게 조정되면서 아주 치열하게 그 공간(화면)을 마주한 이에게 구현된다. 영점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오연진은 시간이나, 스케일, 초점 거 리 같은 조건들을 부여하면서 그 조건들의 반복과 조건들 간의 상호 간섭이 생산해내는 패턴들의 다양한 변주를 즐겨왔다. 패턴들의 변주 과정에서 상의 역전은 꽤 주요하게 등장하는데 0과 1을 전제하는 공간에서 1과 0의 자리는 쉽사리 뒤바꼈다.

영어에서 필름은 주로 ‘negative’라고 표현되었는데 인류가 가장 왕성하게 소비한 필름 이 바로 반전된 상이 맺힌 필름이기 때문이다. 반전된 필름의 상에 다시 빛을 투과하면 우리의 눈에 익숙한, 본래의 상으로 다시 반전된다. 단순한 역전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 서 한 장의 사진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반대로 거울을 마주할 때, 거울은 마주한 나를 부대낌 없이 보여준다. 사진은 세계의 형상이 필름이라는 지지체에 달라붙은 면, 그 면을 축으로 대입되는 다양한 조건들이 마지막 이미지의 결과를 다르게 한다. 이와 반대로 거울은 내가 속한 세계, 그 자체를 제시해주는 듯하지만, 거울면은 네거티브 필 름과는 다른 형태로 나를 반사할 뿐이다. 여전히 거울의 면이 존재하고, 그 거울의 면을 중심으로 역전된 나의 이미지가 보여진다.

‘−’가 ‘+’가 되거나 물이 얼거나 녹아버리는 것처럼, 세계의 역전은 자연스럽고, 물리적 인 세계의 장은 이런 역전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범주들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 예측 가능하다고 하지만 번번히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마는 이 범주들 사이엔 그래픽의 세 계에서는 통제할 수 있었던, 통제할 수 없는(때로는 인지할 수 없는) 무수한 조건과 상 황들이 빽빽하게 끼어있다. 여기는 온전히 자신일 수 없는 세계이다. 화면(공간)의 바깥 세계, 타자들의 세계에서 오연진은 동일한 원리를 사용해보곤 했다. OHP 필름에 빛을 투과시키거나 자른 패턴들의 면에 에어브러시를 사용해보는 등 인과관계가 있는 효과 로써 깊이를 구현해보는 것, 오연진은 그것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통제라는 말이 무색할 조건들, 커다란 작품 사이즈의 인화지를 직접 칠해서 만든다든 지, 온도 조절이 어려운 공간 안에서 컬러 작업을 하는 등, 오가면서 오연진은 사진을 만 든다. 그러면서 이미지의 면이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영점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다양 한 조건들을 대입해보기 시작했다. 대형 확대기를 사용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면서 도 오연진은 반전이라는 조건 넘기를 수행해본다. 오연진의 작업 속 이미지의 면은 축 을 중심으로 한 면의 상황들을 다른 면으로 그대로 투과시키기도 하고(창의 모양을 한 캔버스나 물감칠의 새어 나옴), 그 자체를 다시 영점으로 설정하여 다시 역전 시켜보기 도 하면서 탈봇이 과거 세계를 온전히 담고자 했던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면, 그 이미지 면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에 도전하고 그것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실험한다.

Michael Snow의 “Solar Breath”(2002)는 해안가의 소담스런 창 하나를 고정된 시선으로 담는다. 수수한 흰 커튼 뒤로 창의 실루엣이 보이고, 거의 닫힌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 면, 커튼은 공기를 한 움큼 안았다가 창에 바짝 붙어 버리기를 반복한다. 일정한 패턴처 럼 반복되는 이 장면을 두고 작가는 “태양의 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커튼의 움직임 으로 살짝살짝 창 밖의 세계를 보임으로써 창은 (외부로의 연결이라는) 그 기능을 완전 히 배반하지는 않으면서, 딱 붙은 커튼의 패턴을 통해 자신을 바로바로 드러낸다. 또 외 부를 보이는 2차원의 면이 외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준다.

오연진 작가의 불룩 솟은 이미지의 틈 사이로 하얀 벽의 공간감이 제시될 때, 배어 나온 혹은 칠해진 물감이 찍힌 이미지의 부분들이 이미지의 상을 교란할 때 이미지의 물리적 인 면은 이미지 면의 축이 과정 속에서 서로를 넘고 지나온 변주들을 상기시키기도 한 다. 이미지라는 고유 영역에 타자의 세계가 마구마구 개입함으로, 그 과정의 중간에서 이미 이미지는 자신이 품었던 세계로부터 한없이 멀어진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홀연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기도 한다. 역전의 역전의 역전된, 투과하고 다시 역전해서 반사 시키는 세계의 상에 대하여.

글: 이정민

출처: 전시공간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참여 작가

  • 오연진

현재 진행중인 전시

박미나 개인전: 검은

2024년 3월 8일 ~ 2024년 4월 27일

황예랑 개인전: 숨을 참는 버릇 Habit of Holding Your Breath

2024년 3월 16일 ~ 2024년 4월 4일

박인 개인전: 바깥 풍경

2024년 3월 27일 ~ 2024년 5월 4일

요린데 포그트 & 시야디에 2.0

2024년 2월 24일 ~ 2024년 4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