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대화 소리

인력시장

2025년 11월 15일 ~ 2025년 12월 14일

작은 라디오 소리, 나를 쳐다보는 강아지, 찢긴 노트, 거리의 포스터들. 중앙에 놓이지 않은 것들이 있다. 주변적인 풍경은 쉬이 아무것도 없는 듯 취급된다. 원하지 않아도 때로 귀에 들려오는 말소리는 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는 듯하다. 

여기에는 만들어지는 과정 뒤에 있거나, 예술 제도권 바깥에 위치한, 또는 특정한 형태로 완벽히 굳어지지 않은, 그래서 심지어 작업Artwork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들이 놓여있다. 또 이들은 빠르게 지나가 뒤로 밀려가는 것, 매우 임시적이며 그저 삶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사건 아닌 사건들”이다.

아주 작은 전시장에는 주변적인 이야기들이 모여든다. 이들은 가까이 붙어 서로 긴밀하게 이야기를 웅성이는 듯하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거나 중심을 향해있지 않은 목소리가 오히려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들은 그저 탈정치화된 하나의 미시적 사건으로 번번이 여겨지고 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사건과 흘러가는 매일, 그리고 이들의 작은 남김들은 무엇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걸까? 선택되지 못해 호명되지 않는, 그저 부차적인 것들이 ‘여기 있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것은 분명 가시화라는 권력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의미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힘일 것이다. 주변이 가진 꾸밈없는, 끊임없는 사소한 열망들을 들여다보자. 중심에 놓인 것만을 주목하고 이들만을 반복해 생산하는 광경, 그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자. 주변 혹은 부산물로만 가득찬 풍경이 언제나, 매일, 어느 곳에나, 부산스럽고 시끌시끌하게도 ‘있다’.

이지안은 ‘셀러리 취미 미술’이란 이름 아래 스크랩을 하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 취미는 생활에 부차적인 요소다. 스스로의 작업 활동을 취미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농담이나 유희의 일종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꽤 적극적인 자조나 방어기제로 느껴지기도 한다. 제도적 예술 교육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이가 미술사적 맥락이나 각 매체의 성격과 형식을 염두에 두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내보인다면, 특히 동시대-서울의 ‘전시장’ 안에 ‘전시’한다면 이 ‘작업물’은 무엇이 되는가? 

사각형, 액자와 캔버스의 네모는 담긴 내용을 쉬이 ‘그림’으로 만든다. 마치 엄마가 취미로 그린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자랑할 만한 ‘미술’이 되듯, 지안 역시 ‘취미’가 네모란 형식으로 그럴싸해 보이게 되는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자신의 취미가 네모 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림’이라 인정하게 되는 것만 같다고.

지안은 잠시 머무르던 브뤼셀을 떠나기 전, 두고 갈 물건을 나누는 전시 겸 송별회를 기획했다.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이, 네모난 책상 위로 전시물처럼 올라갔다. 하나의 스크랩북도 함께 그곳에 있었다. 도서관이나 영화관, 미술관에서 주워 온 ’무료 종이 셀렉션‘이었다. 전시장에 그 스크랩북이 놓여있다. 또한 벨기에 길바닥에 떨어진 빵을 찍은 사진들을 취미의 영역인 ‘포토 카드’를 수집하는 파일에 넣어 모은 ‘진zine’도 있다. 그리고 그 옆의 스탠드형 파일엔 주차금지 표지판, 벤치나 시계 등 거리에 놓인 가구들의 사진이 있다. 

지안의 작업물들에서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취미 미술과 순수 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이 뒤섞인다. 이처럼 이분화된 낱말들은, 이미 영역화된 권위를 의식하는 것이기에 가장 권위적인 행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권위를 의식하면서도 결국에는 아무런 직위도 없는 채로 ‘즐거워서’ 그리거나,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오일 페인팅을 하거나, 침대 위에서 노트에 끄적이는 일, 또 그 노트에서 찢어낸 ‘취미 미술’이 전시장의 벽에 걸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 일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Hugo Capablanca는 매주 찢겨지는, 찢겨질, 피드에서 내려갈 클럽의 포스터를 작업한다. 클럽의 포스터는 매주 밖에 붙여지고 곧 떼어진다.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올라가고 매혹시키고 휘발한다. 어찌 보면 이는 사실 다른 회화 작업이 소비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빠르게 소비되는 포스터의 이미지는 영원히 반복되기에 다양한 맥락에서 가시화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일 수 있음에도, ‘빠르게 사라지는 성질 때문에’ 그저 일시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매일, 매주, 매달 만들어지고 일어나는 일들, 그 미시적 사건들은 누군가의 몸과 기억에 자국을 남기고 지나간다. 포스터는 파티 혹은 어떤 일을 기록하지만, 실제 사건 이후 그것이 갖고 있는 쓸모는 없어지므로, 그 사건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은 속도로 인해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뿌려지고 홍보되며 피드와 공간의 안팎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임시적인 땅을 만들고, 그를 빠르게 다시 철거한다. 지안의 사진 진이 공공의 영역에서 사적인 소유물들이 임시적으로 구축하는 공유 공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듯, Hugo 또한 찰나를 점유하며 임시적인 땅을 만든다. 역사는 중심되게 여겨진 일의 축적이 낳는 서사이다. 그 외의 일들은 역사화 되지 않고 삭제된 채로, 그러나 어떤 이의 몸과 기억에는 영원한 자국을 남기며 어느 곳에나 유령처럼 부유한다. 포스터는 그 소비의 속도와 성질로 인해 끊임없이 굳어짐과 역사화를 자동으로 거부하게 되며, ‘그 외’의 일들이 존재할 ‘임시’의 땅을 고수한다.

2bpencil의 재형과 희주는 과거의 라이브 방송과 단파 라디오를 전시한다. 이들은 평소 라이브를  2bpencil.online이라는 독립적인 채널/사이트, 즉 그들이 직접 지은 장소에서 진행하고, 아카이브 하여 업로드한다. 대남방송이 들리는 곳에 가 그 기이한 소리를 라이브 하거나, 라이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사주를 봐 주기도 하고, 외부에서 진행한 토크를 기록하기도, 타인의 이야기와 사운드를 섞어내기도 한다. 그들의 라이브와 퍼포먼스는 채널에 ‘기록’되지만, 기록은 결국 부차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은 ‘당시’에 존재한다는 순간적 성질을 잃지 않는다. 2bpencil이 행하거나 참여하는 소리-이야기-라이브-퍼포먼스-이미지들은 추후 내어진 결론의 형태가 아니라, 과정적인 시간의 형태로 축적되고 읽혀진다.

전시장에 위치하는 송신기들에 수신기의 안테나를 맞추면, 단파 라디오가 지나는 주파수를 통해 알 수 없는 말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들은 정확한 근원지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보는 눈이 많을수록 그 이미지의 효용성이 소비되어 닳아 없어지듯, 2bpencil은 ‘듣는 귀를 모아 소리의 소비를 가속화시킬 수 있진 않은가’라고 질문한다. 마치 친구와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며 불안함을 잠재우듯이, 소비와 2차 생산(소리를 게임으로 만든다던지, 스팸메일을 모아두었다가 음악으로 만든다던지1) 하는)은 불확실함에서 기인하는 불안을 점차 사그라들게 하고 소리 자체에서 발생하는 흥미로움만을 부채질한다. 

부채질되는 흥미와 함께 ‘같이 잘 듣는’ 행위는 불확실한 소리들의 소비를 가속화한다. 그 소리는 예측 불가능하게 신경을 긁으며 공간의 구석구석을 침범하고 헝클어 엉키게 만든다. 대남방송 라이브에서 들리는 울부짖는 소리 위에 친구들의 농담 소리와 라이브의 채팅이 뒤덮는 것처럼, 2bpencil의 작업에서 이들은 불확실한 소리를 소비하며 타인과, 공간, 여러 이야기들을 뒤섞고 매개하는 자가 된다. 시각 이미지 중심의 감각 체계/환경에서 사운드가 “마치 배경의 벽지처럼 이미지의 뒤편으로 물러나2)”지 않고 그 자체로 적극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한다면, 그것의 주변적인 성질이 오히려 가능케 하는 것, 주변과 중앙의 역전을 자연스레 말하게 되지는 않는가.

1)2bpencil에서 스트리밍된 안민옥의 [알쏭달쏭, 닿이선] 참조.
2)오민 엮음, [동시], 작업실유령, 2024, 20p

*

김지현은 사건 없는 사건들을 담는다. 지현의 작업에는 특정해 낼 만한 사건이 없다. 보이는 것은 강아지의 가슴팍에 있는 씨앗 같은 털이다.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남는다.그의 작업에는 마치 항상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있었던 사건들, 실은 계속되고 있던 시간들이 있다.그 장소에 있던 이야기를 구체적인 다큐멘터리적 서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영상과 사진은 옅은 존재감을 가진다. 지현은 사건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그 장소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구해내는 방식으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그저 매일의 시간만이 남는다. 그곳에 쳐다보아진 객체도 쳐다볼 주체도 아닌 매일매일의 시간이 있다. 매일매일의 일들 아래에서 오늘과 내일은 같다. 무수히 반복되고 있는 시간이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을 제시하거나 서사를 목도한 몸과 눈을 증명하고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온전히 보이는 곁자리. 비켜가기에 보이는 비어 있는 공기와 흔들림들, 눅진한 바닥, 흔들리는 나뭇잎, 겨우 몸을 일으킨 곳에 남은 침구의 구겨짐. 

말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지현은 23년부터 24년 사이의 1년 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 어머니가 돌봄노동을 하는 가정에 방문하며 그 동네에서 모든 계절의 영상을 찍었다 - 다만 이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에겐 그 뒤에 존재한,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반복되는 매일들이 중요하다. 이야기가 없는 것이 그가 찍는 사건이다. 이야기나 특정한 형상이 없이도 시간은 흐른다. 그 시간 안에 살고 있는 그들은 여전히, 계속, 항상, 선택되지 않은 이미지이고, 지현은 선택되지 않은 이미지들의 자리를 만들고 오히려 그들에게 쳐다보아진다. 지현의 ‘말’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참여 작가: 김지현, 이지안, 2bpencil, Hugo Capablanca
기획: 이수민
디자인:주한별
사진:성의석
설치 도움: 박지호

출처: 인력시장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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