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 자라는 말>
; 수많은 물음표, 그리고 저마다의 사유의 지표
글: 강가연
우리는 누구나 땅을 딛고 서있다. 항상 바닥을 걷고 있지만, 바닥은 인식의 주된 대상으로부 터 먼 곳에 있다. 안서연과 이재희에게 낮은 곳이 그렇다. 모두가 땅을 딛고 있지만 그만큼 인식되지 않는 것, 분명히 존재하지만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 낮은 곳에서 자라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의 말로 풀어내는 것이다.
안서연은 천과 실을 사용한 섬유예술의 방법을 공생의 도구로써 제시한다. 유행하는 자연 속 식물을 인위적으로 정제한 것이 아닌, 식물의 모습을 안서연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이 오브제를 지극한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공생을 제안하고 있다. 주류적 관점으로 피식된 비주류적 존재를 의식해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가짜 반려식물 오브제’를 제시한다. 자연과 물질 그리고 인간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작품은 지극히 일상의 오브제로 시각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던 감상의 영역을 벗어나 촉각적 와유(臥遊)를 유도한다. 촉각과 같은 원초적인 방법으로 교류하는 실용적 오브제는 단순히 관람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안서연의 언어(말)인 이 오브제는 세계의 사본이 아니다. ‘오브제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끊임없는 질문과 더불어 자신의 감각과 지각을 이용해 안서연의 오브제와 교감하다보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무언가에 대한 것이 보인다.
이재희는 본인을 둘러싼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감각적 흔적을 수집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 흔적들을 2차원 혹은 3차원의 오브제 위에 모으고, 흩뿌리고, 걸러내고, 저장하는 과정으로 드로잉하고 레이어를 쌓아나간다. 시간 위에서 지속하고 있던 각각의 무엇들은 작가의 파토스에 각기 다른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고, 감각적 언어로 재탄생한다. 연계되지 않는 무언가들의 집합이지만 작가의 감각적 재배치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분명하게 분리시키지 않는 것,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착각, 의미를 고정시키는 지배적 방식이 아닌 가능성의 지대에 대한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재희가 수집한 혹은 남긴 흔적들을 자유롭게 따라가보자. 그 사이에는 작가의 사유의 시간과 내러티브, 낮은 곳에서 자란 말들이 있다.
두 작가는 자신만의 말이나 언어 혹은 기호를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베일에 싸인 그들의 말은 무엇일까. 창조적 생성을 통해 탄생된 형상의 자유로운 놀이에 참여해보자. 정답을 산출하려는 노력을 행하는 것이 아닌 그저 그들의 장에서 노닐다보면 수많은 물음표들이 사유의 지표를 유연하게 넓혀줄 것이다.
작가소개
안서연
쓰기와 만들기를 하고 있는 사람.
침해하고 침해당하는 세계의 꺼풀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다수의 시선으로 묶이고 분류되고 때로 동경받는 것들은 우리가 쉽게 ‘잡초’라 불러온 식물들의 지워진 이름 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들을 조심스레 훑으며 쉽게 누려온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경계해야 한다. 정제해낸 의식 속에 남은 티끌같은 욕구를 포악하게 속물적으로 풀 수 있는 대상은 우리가 만들어낸 모방된 이데아, 미시적으로는 개체의 삶과 거시적으로는 생태의 연속성이 없는 가짜들 뿐이라 믿는다. 거기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는 자라난다.
이재희
모으고 조합하는 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 질퍽하게 흘러내리는 덩어리. 파헤쳐진 땅의 시간들과그 위에 서 있는 사람들. 어떠한 인과관계로 나에게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지만 계속해 주위를 맴도는 것들을 펼쳐본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서로의 연관성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목격되고 존재한다. 각자의 서사를 가진 것들은 일일이 명명할 수 없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만날지 모르는 여행의 한 장면 같다.
출처: 오재미동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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