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 개인전: 오랫동안, 갑자기

d/p

Nov. 14, 2023 ~ Dec. 16, 2023

d/p는 맹나현 협력 기획으로 성시경 개인전 《오랫동안, 갑자기》를 개최한다. 성시경은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보단 그리는 행위 자체를 앞세운 회화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번 전시는 2019년 공간형과 쉬프트에서 진행된 《Exit Exit》 이후 4년 만에 개최되는 개인전으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길고 짧은 생각에 대한 그의 다차원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제작한 신작을 선보인다. 

작가는 그림의 틀 안에서 우연히 발생한 복수의 장면과 물감이 미끄러지며 남기는 흔적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작업 초기에는 하나의 캔버스 안에 복수의 임시 프레임을 구획하는 자신만의 규칙을 설정하여 프레임 사이의 낙차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을 작업에 활용했다. 그는 하나의 캔버스 안에 마스킹 테이프로 여러 겹의 프레임을 설정한 후 가장 작은 화면에서 점차 넓은 화면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빈 공간을 채워나갔는데, 이러한 방식을 '다중 프레임 장치(2016-2020)'로 분류했다. 

'다중 프레임 장치'는 그림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갔으며, 이 시리즈는 예측이나 계획을 하기보단 순간적으로 떠오른 형상을 즉각적으로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했던 작업이었다. 하지만 반복된 장치 설정에 익숙해지며 붓질의 동선에 관성이 생기자 점차 긴장감이 감소하게 되었는데, 작가는 그 과정에서 즉흥적인 것과 계획적인 것을 구분 짓는 경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떠오른 지 얼마 안 된 것은 즉흥적인 것으로, 오래전부터 생각한 것은 계획적인 것으로, 구분 짓곤 했다. 그간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즉흥과 계획 그 둘 사이에 완고한 장벽이 있는 것처럼 여겼고 한쪽을 선택하고 그에 걸맞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당분간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즉흥이 계획을, 계획이 즉흥을 서로 품고 있다.”1)

이러한 생각은 계획적인 것과 즉흥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해 설정했던 '다중 프레임 장치'에서 벗어나, 캔버스 안에서 발생하는 붓과 물감의 움직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2020년부터 진행해 온 '잠보니' 시리즈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시작한 작업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붓질의 동세를 잘 담아낸다. '잠보니'는 아이스링크장에서 빙질을 고르게 하는 정빙기를 뜻하는데, 새하얀 얼음을 부드럽게 갈아내듯 캔버스 전체를 흰색 유화 물감으로 덮은 후, 바탕이 마르기 전의 촉촉한 상태에서 그리기에 돌입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이번 전시의 중앙에 사선으로 설치된 <촉촉한 벽>은 '잠보니' 시리즈와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는 촉촉하게 스며드는 흰 벽에 벽화를 그린다고 상상하며 물감이 마르기 전 빠른 속도로 빈 곳을 채워나갔다. 벽체 면적에 맞춰 10개로 분할된 화면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그려졌으며, 그는 이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결합하였다. 덜 마른 물감 위에 더해진 또 다른 붓질은 화면 위에서 속도감 있게 미끄러지며 동세의 흔적을 그대로 담아낸다. <촉촉한 벽>이 짧은 호흡과 즉흥적인 조합을 기반으로 큰 틀의 계획 안에서 켜켜이 쌓인 순간적인 선택의 뒤섞임을 표현했다면, 그 외 작품들은 긴 호흡으로 짧고 긴 생각들이 충돌하는 장면을 담아냈다. 작가는 오랫동안 내재된 생각과 갑자기 떠오른 생각 사이의 전환에 집중하며 여러 부피와 길이의 생각들을 한 화면에 담아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유연하고 탄력적인 고무줄처럼 수시로 바뀌는 길이의 생각들을 화면의 곳곳에 재배치했다. 이전의 선택과 즉흥적인 판단에 의해 뒤덮인 궤적이 혼재된 화면 안에는 여러 생각의 시차가 담겨 있다. 

“'계획성과 즉흥성'처럼 상반된 개념을 양 끝에 고정된 축으로 만든 상태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길고 짧다는 표현은 '더 길다', '더 짧다'라는 표현을 더해 그 위치가 계속 갱신될 수 있다. '길고 짧은'처럼 상대적인 형용사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더 면밀히 감각하고 설명하고 싶다.”2)

이처럼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가의 신작은 오래된 생각과 즉흥적인 생각에 반응하는 복잡한 수행 과정을 담고 있다. "새로운 관절을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여러 모양의 관절은 한 화면 안에서 무한 증식하며 새로운 궤적을 발생시킨다. 캔버스 위에 흔적으로 남은 붓질의 동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수한 관절들을 통해 뒤섞인 여러 부피의 생각들이 포개지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1) 이전부터 계속 생각해오다 2023년 10월의 어느 날 문자로 옮겨 적은 성시경의 작가 노트에서 발췌.
2) 이전부터 계속 생각해오다 2023년 10월의 어느 날 문자로 옮겨 적은 성시경의 작가 노트에서 발췌.


작가 소개

성시경(b.1991)은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을 쫓기보다는 빈 공간에서 발생하는 조형 자체에 집중하며 주로 짧게 스쳐 간 형상이나 생각을 추상적으로 그린다. 작가는 프레임 내부에 특정한 장치를 설정하며 화면 사이의 낙차를 발생시키거나 유화 물감이 마르기 전 부드럽게 이동하는 붓질의 동세를 드러내는 등 즉흥적인 방식의 회화적 실험을 지속해 왔다. 최근에는 즉흥과 계획을 짧고 긴 생각에 비유하여 여러 부피의 생각이 혼재한 장면을 회화로 표현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개인전 《Exit Exit》(2019, 공간형/쉬프트)과 《DMZ 전시: 체크포인트》(2023), 《SUNROOM》(2023, BB&M), 《흰 그림》(2023, 갤러리팩토리), 《투투》(2022, P21/휘슬), 《가볍고 투명한》(2020, 원앤제이) 등의 그룹전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기획자 소개

맹나현(b.1991)은 전시를 매개로 시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관심사를 충실히 따른다. 복잡하고 명확한 선으로 나뉘지 않는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즐기며, 창작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믿는다. 『세 번째 시간』(2022, 미디어버스)의 기획 및 편집을 맡았으며, 가상의 소장품관리시스템 《PCS》(연구, 2021), 《un-less》(공동 기획, 2021, 두산갤러리), 《오민: 초청자, 참석자, 부재자》(2020, 플랫폼엘), 《카럴 마르턴스: 스틸 무빙》(2018, 플랫폼엘) 등의 전시 기획 및 연구에 참여한 바 있다. 


참여작가: 성시경
기획: 맹나현
그래픽 디자인: A Studio A (이재환)
구조물 제작: 김동섭
사진 촬영: 양이언
주최: d/p
후원: d/p, 우리들의 낙원상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메세나협회, 서울문화재단

출처: 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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