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과 궤적》 잔존하는 소리와 유령들
서민우의 프로젝트 《허물과 궤적》은 ‘청취의 조건’을 세 차례의 과정으로 전개한다. 음반(5월), 퍼포먼스(8월), 전시(11월)로 이어지는 이 구조는 소리를 단일한 청각 경험이 아닌, 시간적·물질적 사건으로 재배치하는 실험이다. 그의 작업은 고정된 형식을 거부하며, 소리의 수집과 재조합, 그리고 음향을 위한 사물 제작을 통해 감각이 생성되고 잔존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음반 《허물과 궤적: 나선형 수평계》는 이러한 실험의 기점이었다. 서민우는 필드 레코딩을 통해 수집된 소리들을 쪼개고, 겹치고, 변형시켜 음악적 문법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배열한다. 작가는 소리를 감정의 매개나 서사적 장치로 다루지 않고, 소리 자체의 물질성과 시간성을 탐색한다. 그는 직접 스피커를 제작하고, 공간의 반향 구조를 설계하며, 듣기의 물리적 조건을 형성한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말을 떠올린다면, 이미지는 특정한 시대에 속박되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횡단하며 반복적으로 귀환한다. 서민우의 소리 또한 잔존하는 청각적 형태라고 바라보면 어떨까?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공간과 신체에, 음원에 스며들며 다시 들린다. 이 유령적 생명력은 1년의 시간을 통해 나선형의 구조로 실험한 서민우의 각기 다른 청취들에 깃들어 있다.
이후의 공연 《허물과 궤적: 궤적들》에서는 청취의 사건이 신체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공연장 바닥 전체를 덮은 라텍스는 소리를 받아내는 동시에 기록하는 매체로 기능했다. 관객들은 그 위를 걸으며, 밟고, 머뭇거리며, 각자의 흔적을 남겼다. 발자국과 주름, 체중의 이동은 단순한 동선이 아니라 청취의 물리적 잔존물이다. 공연은 더 이상 귀로만 감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발 아래의 압력, 표면의 마찰, 그리고 산만함과 긴장감으로 몸에 침투한다. 기억되지 못한 존재들의 귀환하듯 서민우의 소리 역시 음악으로 불리는 것의 체계에서 배제된 영역들이 불쑥불쑥 섞여 있다. 그것은 음악으로 불렸던 것과 함께 엉키며, 들리지 않았던 감각을 다시 불러온다. 이때 청취자는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여전한 세계에서, 그러나 이전엔 들리지 않던 감각의 증인으로 전환된다. 청취는 인식이 아니라 경험의 온전함이며, 경험함이 다른 궤적을 만들어간다.
세 번째 장인 《허물과 궤적》은 앞선 앨범과 공연의 잔여가 공간 속에서 다시 재연되는 장이다. 8월 공연장에서 사용된 라텍스는 수거되어 전시장으로 옮겨지고, 그 위에 남겨진 발자국과 주름, 흔적은 그대로 보존된다. 라텍스는 표면으로의 물질이 아니라, 청취의 사건이 남긴 허물이자 기록하지 않은 기록(기록하려고 택하지 않았던)이다. 작가는 이 잔존물을 전시장 안에서 다시 배치하며, 소리의 부재가 남긴 물리적 흔적을 감각의 새로운 질서로 전환한다. 이 전시에서 새로운 소리는 재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리 이후 발생한 사건과 감각적 파편들이 서로 얽히며 새로운 청취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는 완결된 형식 대신 현장성 속에서 감각을 임시적(ad-hoc)으로 구성한다. 스피커의 위치, 라텍스의 주름, 관객의 움직임. 이 전시는 계획된 구조물이 아니라, 청취 자체와 닮아 있다. 음악의 변두리에 있는 어떤 소리는 언제나 불안정하고, 구분되기 쉽지 않으며, 그 불안정성 자체가 감각의 생명력을 구성하고 있다.
이 전시에서 청취는 특정한 순간이나 형태로 고정되지 않는다. 음향은 공간과 신체, 그리고 사유와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떠돈다. 시각보다 청각이 우위에 서지 않으며, 그 반대도 아니다. 신체보다 물질이 뒤처지지도, 그 반대 역시 아니다. 모든 감각은 서로의 표면을 통과하며, 동등하게 흔들린다. 결국 그가 실험하고자 했던 ‘감각의 수평성’은 경험을 온전히 불러내려는 청신(請神)의 시도다. 감각들은 다시 엮이며 유령처럼 서로를 비껴가는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전시는 완결되지 않은 채 스스로를 노출한다.(글.윤여울)
작가소개
서민우는 소리와 조형을 결합한 '소리 조각'을 통해 청각적 경험을 시각/촉각화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직접 제작한 스피커를 일종의 내장 기관으로 보고 또다른 외피를 씌워 설치한다. 관객은 소리를 듣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하고 때론 낯선 스피커를 마주하며 시각 중심의 관람 방식에 균열과 감각의 위계가 뒤섞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소리를 물질로 바라보고 감각의 경계를 확장하는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소리와 조형을서민우는 자신을 “가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 표현하지만, 정작 그의 작업은 기존의 음악 범주를 넘어서 존재한다. 우리는 그를 흔히 음악가라기보다 소리를 다루는 작가로 인식해왔고, 이는 단순한 장르 구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일상 속 소리들을 수집하고 조합하여 청각적 산물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시공간 안에 배치함으로써 청취의 조건과 감각의 경계를 질문한다. 그의 작업은 음악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감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묻는 조형적 실천에 가깝다.
아티스트: 서민우 @concrete_exh
기획: 윤여울 @aeiou_wool
디자인: 장민혜 @cminhye
프로젝트 매니저: 김혜은 @euunn_2
비평: 하상현 @sanghyunnha, 모희 @__mohee
공간 디자인: 이용빈 @leeyongbin_ , 최봉석 @bongsukku
기술 도움: 노윤래 @Y0oleh
촬영: 이도현 @studio.anws
주관: 아케이드서울 @arcade.seoul
제작 지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korea
촬영: 이도현 @studio.anws
Album
허물과 궤적: 나선형 수평계
마스터링: 김수민 @drunken_sheep
글: 전대한 @reveur_daydreame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청취 가능합니다.)
전시 주최: 아케이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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