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성 Into the Unknown

플레이스막2

2021년 9월 10일 ~ 2021년 10월 2일

불완성(Into the Unknown), 예술이 있는 어떤 자리 

‘완성(完成)’은 의심의 여지없이 통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완성의 반대편에는 완성의 지연을 뜻하는 ‘미완성(未完成)’, 혹은 ‘시작’만이 자리하고 있다. 완성은 완전하다는 의미와 함께 끝을 뜻하기도 한다. 끝은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지만 더는 살피거나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허나, 완성의 존재 자체를 반문한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태야 말로 완성이다’라는 누군가의 주장을 보편적 진리로 내세울 수 있을까? 완성의 기준이 미리 제시되어 있는 경우라면 정답을 맞춰가는 시험지처럼 처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체계적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고 관리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완성은 일종의 약속이다. 남과의 약속,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 무엇을 완성으로 볼 것인가라는 관점, 그리고 이해관계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개념. 그렇다면 완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완성(不完成)’을 규범적인 메트릭스를 해체하는 제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코 완전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의, 세상에는 없는 단어 ‘불완성’.

완성을 의심하는 관점은 변화를 적극 수용하는 태도와 연결되고, 결국 ‘알 수 없는 세계’와 동반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누군가는 공포를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낙관적 미래를 꿈꾸는 이들도 역시 공존한다. 우리의 선택과 감각이 어느 쪽으로 향하든, ‘알 수 없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은, 변화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정지상태가 아닌 끝없는 움직임과 연결된다. 계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고 더 정확히는 다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우리가 나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적절히 매개되었을 때 일어난다. 사실, 알 수 없다는 것의 명명은  알 수 있는 것, 알고 있는 것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번 플레이스막에서 만나게 되는 박다솜, 백경호, 서원미, 유창창 네 작가 역시 현실 세계나 과거의 궤적들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 그것들을 변형, 부정, 재전유 (Re-appropriation) 하며 새로운 예술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네 작가는 각각 서로 다른 의미와 방식으로서 완성의 기존 통념을 전복시키고 있다. 이들이 완성과 종결의 도그마적(dogmatic) 의미를 부정하는 장면은, 지금 여기에서의 발견, 설계 바깥의 우연,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 등에 몸을 맡기는 선택과 연결된다. 흡사 자기 작업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스스로 내던져 버리는 행위들은 다가올 무언가를 조심스레 따라가 보는 여정과도 같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만 같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Godot)’씨는 누구일까? 우선 박다솜 작가는 특히 애착이 가는 가족이나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호흡하는 밀착된 요소들을 작품의 요소로 가져와 ‘기울기’라는 매우 강력한 자기 시선으로 재조립한다. 밀도 높은 관찰을 통해 자유자재로 대상들의 구조 일부를 변경하여 ‘갈아 끼우는’ 하는 이 과정은 블록 놀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눈에 포착된 ‘기울기’ 라는 공통분모로 엮이면 전혀 다른 두 대상(인간과 비인간)은 자신의 구조 일부를 교환하게 되고 관계가 형성된다.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들이 그림 속 요소들로 들어 있으니 알 것만 같다. 모르겠다고 선언하면 바보가 될 것만 같은, 그러나 이미지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판독하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철저히 주관적인 작가적 관점과 기준으로 이미지의 부분 부분을 바꿔치기 해 놓은 결과물을 작가 본인이 아닌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뉘앙스 뿐 일지 모른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자신도 자기 작업이 어떤 길로 들어설지 끝까지 가봐야만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는다. “농담, 장난과 같은 개입들이 특정 행위들이 완성될 수 없도록 방해한다.” 관람자가 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작품이 완성된 것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종료하기로 선택한 것이니 그것이 완성인 셈이며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므로. 그저 무한대로 이어질 수 있는 그 장난질을 ‘일단은 그만둘게’, ‘오늘은 여기까지’로 매듭 하는 것이다. 

선택의 순간에 늘 참신한 것을 고르게 된다고 말하는 백경호 작가는 이전의 작업들 속에서 새 작업의 단초를 찾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복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방식이다. 줄긋기 작업은 그가 감정 없이 하는 행위, 부분(사건)과 부분(사건)을 잇는 공백에서 건져 올린 부산물이다. 그 실험 자체가 현재 가져다 준 결과는 참아왔던 분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붓질들. 휘 갈기기. 화장실 낙서, 침 뱉기. 관람자가 이것을 왜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를 아끼고 궤적을 좆던 이들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고, 모범적 화성을 깨버린 참신함의 선택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의외의 요소들이 불쑥불쑥 드러나는 화면이 주는 해방감이다. 진지함과 유머를 한데 뒤섞어 버리는 이 뻔뻔함. 좋아할지 말지는 철저히 관람자의 몫이다. 관람자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을 미리 상정하지 않는 태도가 형식으로 확장된다면, 이러한 형식은 또 다른 유희가 될 수 있다. 수행이 아닌 ‘다가올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속하던 그의 줄긋기가 ‘감정의 붓질’, 낙서들로 ‘망쳐진’ 신작들로 나타났다. “격자 형식에서 선묘 형식으로 줄을 스트로크 형태로 흐트리며 진행해보고 싶다.”는 과거 고백이 실현된 장면이기도 하겠다. 이보다 유쾌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또한 무엇을 향해 열린 자유의 함성일까 물음표를 던져 본다.

최대한 그림의 방향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서원미 작가는 “그림의 끝과 완성은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고 고백한다. 서원미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개인의 서사를 연결하고 인간과 유령을 연결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실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존재이며 물질도 비물질도 아닌 경계에 있는 포위된 존재 유령이라는 메타포로 표현되기도 하고 이미지화되기도 한다. 이번에 만나게 되는 카니발헤드 시리즈는 분열된 페르소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선언하며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정형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데, 악귀에 씌인 듯 으스스한 분위기로 묘사되고 있다. 색채와 소재 모두 ‘블랙커튼’ 시리즈나 ‘Facing’과 다르지만, 이 모든 시리즈들은 ‘잔혹한 현실 마주보기’ 라는 메인 필터로 묶여 있는 셈이다. 대상을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 이입과 투사. 흉측하고 그로테스크한 대상을 마주할 때 피하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는 그 이유와 결과는 또 무엇일까?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대상들이라도 그것이 내 삶의 주요한 부분과 닿아 있다면 절대 관심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정면응시와 곁눈질이 끝없이 이어지리. 허나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 존재를 제거하려는 이데올로기로 부터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될지 모른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양측을 인지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결과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망령처럼 떠다니는 것들을 실체화하며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내는 작업들, 그것을 위해 도리어 의식화된 판단과 감각을 내려놓으며 아직은 비가시적인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는 여정을 응원한다.

회화와 만화 분야를 넘나드는 유창창 작가는 작업을 바둑 두기에 비유한다. 자신이 토해 놓은 작품을 응시하며 대상화하는 장면. 이는 화면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림의 형식이 매우 다채로운 것도 이 때문일까? 삶에서든 예술에서든 중요한 것은 전하려는 메시지와 가장 최종적으로 남는 본질이라고 믿는 다면 형식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 유연함이 극대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만 국한하여 비교하자면, 만화는 무겁고 회화는 상대적으로 가볍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의 무게 값이 같아지는 효과가 나온다. 만화는 과자를 입에 넣으며 낄낄대며 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순수미술은 단정하게 갖춰 입고 조용히 의미를 음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대화와 소통에 방점을 두는 듯 한 작가의 관심은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묘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타이틀 ‘Dear’, ‘당신과 나 사이에’, ‘우린어쩜이렇게철딱서니가없을까’ 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 중심에 사람, 관계가 늘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더불어, 펼쳐보고 나서야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고백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생생한 대화를 원하는 진정성을 가늠하게 한다. 상대가 말하도록 하고 기다리는 작가의 작업은 영원히 완성 될 수 없을 것이지만 반면 관람자와 호흡하는 매 순간이 완성일 수 있다.  

완성이 없다고 보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계속 움직일 뿐이다. 움직임은 곧 ‘변화’와 연결된다. 어떤 대상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 정지를 요구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꼼짝마”, “가만히 좀 있어봐”라는 상대의 외침이 주술처럼 사용된다. 즉, 정지 상태는 대상을 통제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셈이다. 반대로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는 맹목적 믿음을 의심하고 얻게 되는 결과는 살아있음의 반증인 변화이다. 그 변화가 늘 좋은 결과를 도출한다고 보장할 수 없겠지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영구하지 않기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길이 계속 펼쳐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 창작에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 완결, 마감, 안정, 통제 등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경우라면 도리어 반가워 할 일이다.

김소원

참여작가: 박다솜 백경호 서원미 유창창

출처: 플레이스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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