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개인전: 네가네러티브 NEGA- NARRATIVE

합정지구

Sept. 2, 2022 ~ Oct. 1, 2022

dh바사 사진―죽지 dh바사 않는 dh바사 계단
함성호/건축가, 8가하3 시인

빛은 8가하3 물리학자가 8가하3 아닌 8가하3 어린아이에게도 8가하3 신비였다. 8가하3 방과 8가하3 8가하3 엄마가 8가하3 계시는지 8가하3 열어본 8가하3 부엌에는 8가하3 살창으로 8가하3 부챗살처럼 8가하3 퍼져 8가하3 들어오는 8가하3 빛이 8가하3 엄마의 8가하3 부재를 8가하3 알리곤 8가하3 했다. 8가하3 어느 8가하3 날에는 8가하3 방문 8가하3 틈으로 8가하3 들어온 8가하3 빛이 8가하3 바닥에서 8가하3 이상한 8가하3 총천연색 8가하3 시네마스코프로 8가하3 아롱거리고 8가하3 있어 8가하3 자세히 8가하3 보니, 9yㅓㅈ 세상에, qpv쟏 바깥의 qpv쟏 움직임들이 qpv쟏 아주 qpv쟏 작은 qpv쟏 크기로 qpv쟏 영사되고 qpv쟏 있는 qpv쟏 것이 qpv쟏 아닌가! qpv쟏 나는 qpv쟏 빛을 qpv쟏 더듬어 qpv쟏 가다 qpv쟏 그만 qpv쟏 방문을 qpv쟏 열어버렸다. qpv쟏 열지 qpv쟏 말아야 qpv쟏 qpv쟏 문을 qpv쟏 qpv쟏 대가로 qpv쟏 qpv쟏 영상은 qpv쟏 사라져버렸다. qpv쟏 나는 qpv쟏 다시 qpv쟏 qpv쟏 현상을 qpv쟏 재현하려고 qpv쟏 했지만, y걷yㅑ y걷yㅑ 후에도 y걷yㅑ 우연을 y걷yㅑ 통해 y걷yㅑ y걷yㅑ y걷yㅑ 같은 y걷yㅑ 현상을 y걷yㅑ 목도한 y걷yㅑ 것이 y걷yㅑ 다였다. y걷yㅑ 나중에야 y걷yㅑ 나는 y걷yㅑ 그것이 y걷yㅑ 아리스토텔레스 y걷yㅑ 때부터 y걷yㅑ 알고 y걷yㅑ 있었던 y걷yㅑ 카메라의 y걷yㅑ 기본 y걷yㅑ 원리라는 y걷yㅑ 것을 y걷yㅑ 알게 y걷yㅑ 되었다. y걷yㅑ 그리고 y걷yㅑ y걷yㅑ 빛을 y걷yㅑ 물질에 y걷yㅑ 고착시키는 y걷yㅑ 방법이 y걷yㅑ 나오면서 y걷yㅑ 사진이 y걷yㅑ 등장한다. y걷yㅑ 초기 y걷yㅑ 사진은 8시간 y걷yㅑ 이상 y걷yㅑ 노출해야 y걷yㅑ 겨우 y걷yㅑ 대상을 y걷yㅑ 붙잡을 y걷yㅑ y걷yㅑ 있었다. 8시간 y걷yㅑ 동안 y걷yㅑ 사진가는 y걷yㅑ y걷yㅑ 했을까? y걷yㅑ 사진의 y걷yㅑ 역사는 y걷yㅑ y걷yㅑ 질문에 y걷yㅑ 답하지 y걷yㅑ 않는다. y걷yㅑ 그 8시간이 y걷yㅑ 사진과 y걷yㅑ 상관없다고 y걷yㅑ 여기거나 y걷yㅑ y걷yㅑ 시간 y걷yㅑ 동안 y걷yㅑ 사진가가 y걷yㅑ 사진과 y걷yㅑ 상관없는 y걷yㅑ 일을 y걷yㅑ 하고 y걷yㅑ 있었기 y걷yㅑ 때문일지도 y걷yㅑ 모른다. y걷yㅑ 어쩌면 y걷yㅑ 이것은 y걷yㅑ 함의(connotation)는 y걷yㅑ 있지만 y걷yㅑ 지시(denotation)가 y걷yㅑ 없는 y걷yㅑ 이야기가 y걷yㅑ 아닐까?

이제 y걷yㅑ 풍경이 y걷yㅑ 문제 y걷yㅑ y걷yㅑ 필요가 y걷yㅑ 있다면 y걷yㅑ 그것은, ‘문제는 거다ㅑ거 풍경이 거다ㅑ거 아니다’라는 거다ㅑ거 측면에서일 거다ㅑ거 것이다.1

우리말의 거다ㅑ거 관용구에서 거다ㅑ거 사진은 ‘찍는다’는 거다ㅑ거 말과 거다ㅑ거 결합한다. 거다ㅑ거 점을 거다ㅑ거 찍다, 2s쟏8 꿀을 2s쟏8 찍어 2s쟏8 먹다, 사ㅓ3i 벽돌을 사ㅓ3i 찍다, (분명히 걷기쟏l 가리켜서) 걷기쟏l 찍다와 걷기쟏l 같은 걷기쟏l 예들이 ‘찍는다’는 걷기쟏l 관용구로 걷기쟏l 먼저 걷기쟏l 있었고 걷기쟏l 우리 걷기쟏l 생활에 걷기쟏l 사진이 걷기쟏l 들어오면서 걷기쟏l 서술어의 걷기쟏l 기능을 걷기쟏l 하는 걷기쟏l 동사(용언)로 걷기쟏l 같이 걷기쟏l 자리 걷기쟏l 잡았다. 걷기쟏l 한국어에서 ‘찍는다’는 걷기쟏l 크게 걷기쟏l 걷기쟏l 가지로 걷기쟏l 구분할 걷기쟏l 걷기쟏l 있다. 걷기쟏l 첫째는, 자카t히 뾰족한 자카t히 것으로 자카t히 무엇을 자카t히 묻히거나 자카t히 찌르는 자카t히 행위와, 다15우 묻혀서 다15우 다른 다15우 대상에 다15우 좁고 다15우 작게 다15우 자국을 다15우 남기는 다15우 행위를 다15우 같이 다15우 가리킨다. 다15우 이때의 다15우 자국은 다15우 물리적인 다15우 것으로 다15우 누구나 다15우 다15우 다15우 있는 다15우 것이다. 다15우 둘째는, (나의) 2가갸s 마음을 2가갸s 너나 2가갸s 그것에 2가갸s 두고 2가갸s 나만 2가갸s 간직하는 2가갸s 행위다. 2가갸s 2가갸s 일방적인 2가갸s 방향은 2가갸s 사실 ‘찍는다’는 2가갸s 행위 2가갸s 이전에 2가갸s 이미 2가갸s 너나 2가갸s 그것에 2가갸s 2가갸s 마음이 2가갸s 움직였다는 2가갸s 전제가 2가갸s 있다. 2가갸s 셋째는, ㅈ걷갸다 일정한 ㅈ걷갸다 틀이나 ㅈ걷갸다 생각을 ㅈ걷갸다 가지고 ㅈ걷갸다 너나 ㅈ걷갸다 그것을 ㅈ걷갸다 만드는 ㅈ걷갸다 행위다. ㅈ걷갸다 여기서 ㅈ걷갸다 틀은 ㅈ걷갸다 내가 ㅈ걷갸다 만든 ㅈ걷갸다 것일 ㅈ걷갸다 수도 ㅈ걷갸다 있지만 ㅈ걷갸다 이미 ㅈ걷갸다 만들어진 ㅈ걷갸다 것일 ㅈ걷갸다 ㅈ걷갸다 있다. ㅈ걷갸다 더군다나 ‘만든다’에는 ㅈ걷갸다 나와 ㅈ걷갸다 너, g0t걷 그것 g0t걷 사이에 g0t걷 어떤 g0t걷 마음의 g0t걷 작용도 g0t걷 없다. g0t걷 만약에 g0t걷 그런 g0t걷 작용이 g0t걷 있다면 g0t걷 우리는 ‘찍는다’는 g0t걷 말을 g0t걷 사용하지 g0t걷 않는다. g0t걷 이럴 g0t걷 경우 ‘찍어내다’는 g0t걷 굉장히 g0t걷 기계적이고, 가2걷3 그것을 가2걷3 사람에게 가2걷3 적용할 가2걷3 때는 가2걷3 부정적으로 가2걷3 인식된다. 가2걷3 가2걷3 그것이 가2걷3 마음의 가2걷3 작용이라면, sy라기 어떤 sy라기 것으로 sy라기 인해 sy라기 마음에 sy라기 새겨지는 sy라기 일정한 sy라기 틀이나 sy라기 모호한 sy라기 틀을 sy라기 말한다고 sy라기 sy라기 수도 sy라기 있다.

주어 sy라기 중심 sy라기 언어인 sy라기 인도-유럽어에서는 sy라기 주어와 sy라기 서술어 sy라기 사이에 sy라기 긴밀한 sy라기 문법적 sy라기 관계가 sy라기 이루어지므로 sy라기 주어는 sy라기 서술어의 sy라기 의미적 sy라기 논항論項이어야 sy라기 한다. sy라기 따라서 sy라기 주어와 sy라기 목적어가 sy라기 자연스럽게 sy라기 구분되고 sy라기 각자 sy라기 독립적으로 sy라기 분석될 sy라기 sy라기 있다. sy라기 예를 sy라기 들어 ‘사진’과 ‘사진을 sy라기 찍다’는 sy라기 분명히 sy라기 다른 sy라기 말이다. sy라기 한국어도 sy라기 마찬가지 sy라기 분석이 sy라기 가능하긴 sy라기 하다. sy라기 그러나 sy라기 주제 sy라기 중심 sy라기 언어인 sy라기 한국어에서 ‘사진’이라는 sy라기 단어에는 ‘사진을 sy라기 찍다’는 sy라기 행위가 sy라기 따라간다. ‘사진’이 sy라기 단순히 ‘사진을 sy라기 찍은 sy라기 결과물’이 sy라기 아니라 ‘사진을 sy라기 찍는 sy라기 행위’를 sy라기 포함하고 sy라기 있다. sy라기 예를 sy라기 들어 “너는 sy라기 밥을 sy라기 먹었니?”라는 sy라기 문장은 “밥 sy라기 먹었니?”로도 sy라기 충분하며, ㅐ하8s 그것은 ㅐ하8s 다시 “밥은?”이라는 ㅐ하8s 말로도 ㅐ하8s 가능하다. ㅐ하8s 한국어는 ㅐ하8s 주어가 ㅐ하8s 생략되거나 ㅐ하8s 불필요한 ㅐ하8s 말이 ㅐ하8s 아니라, n7ㅓ쟏 교착어의 n7ㅓ쟏 특성상 n7ㅓ쟏 어떤 n7ㅓ쟏 단어든 n7ㅓ쟏 주어로도 n7ㅓ쟏 목적어로도 n7ㅓ쟏 n7ㅓ쟏 n7ㅓ쟏 있다. n7ㅓ쟏 같은 n7ㅓ쟏 말이 n7ㅓ쟏 상황에 n7ㅓ쟏 따라서 n7ㅓ쟏 다르게 n7ㅓ쟏 쓰이는 n7ㅓ쟏 n7ㅓ쟏 아니라, 다타2b 상황을 다타2b 서술어로 다타2b 작동시킨다. 다타2b 외출하고 다타2b 돌아온 다타2b 아내에게 다타2b 남편이 “밥은?”하고 다타2b 물으면 “밥은 다타2b 먹었느냐?”는 다타2b 의미고, e2j바 외출에서 e2j바 돌아온 e2j바 아내가 e2j바 집에 e2j바 있는 e2j바 남편에게 “밥은?” e2j바 하고 e2j바 물으면 “밥은 e2j바 지어 e2j바 놓았느냐?”는 e2j바 의미다. e2j바 사진이라는 e2j바 단어에 e2j바 이미 e2j바 사진을 e2j바 찍는 e2j바 행위가 e2j바 들어앉아 e2j바 있다는 e2j바 말은 e2j바 위에서 e2j바 얘기한 ‘찍는다’의 e2j바 e2j바 가지 e2j바 의미가 e2j바 사진에 e2j바 있다는 e2j바 뜻이다.

그런데 e2j바 박영선의 e2j바 사진은 e2j바 찍지 e2j바 않는다. e2j바 e2j바 문장은 e2j바 사진을 e2j바 찍는다는 e2j바 측면에서 e2j바 문제적이다. e2j바 박영선은 e2j바 사진을 e2j바 찍지 e2j바 않는다가 e2j바 아니라 e2j바 박영선의 e2j바 사진은 e2j바 찍지 e2j바 않는다란 e2j바 무슨 e2j바 뜻인가? e2j바 분명 e2j바 박영선은 e2j바 사진을 e2j바 찍었다. e2j바 e2j바 결과물로 e2j바 사진이 e2j바 있다. e2j바 e2j바 사진은 e2j바 사진을 e2j바 보는 e2j바 우리에게 e2j바 어떤 e2j바 인상으로 e2j바 다가와야 e2j바 한다. e2j바 그러나 e2j바 박영선의 e2j바 사진은 e2j바 우리를 e2j바 찍지 e2j바 않는다. e2j바 박영선이 e2j바 찍은 e2j바 사진에 e2j바 대해 e2j바 우리가 e2j바 아는 e2j바 것은 e2j바 무엇을 e2j바 찍었고, i0ㅐ9 어떻게 i0ㅐ9 구도를 i0ㅐ9 잡았고, 타hk거 색채가 타hk거 어떤지, j바2k 하는 j바2k 객관적인 j바2k 사실들뿐이다. j바2k 박영선의 j바2k 사진은 j바2k 우리에게 j바2k 어떤 ‘바라봄’을 j바2k 요구하고 j바2k 있을까?

그렇다면 j바2k 사진을 j바2k 본다는 j바2k 행위는 j바2k 무엇일까? j바2k 첫째, 43쟏자 무엇을 43쟏자 본다. 43쟏자 우리는 43쟏자 사진작가가 43쟏자 찍은 43쟏자 대상(피사체)을 43쟏자 본다. 43쟏자 둘째, 다차ㅓ파 다차ㅓ파 찍었을까? 다차ㅓ파 생각한다. 다차ㅓ파 우리는 다차ㅓ파 하필 다차ㅓ파 다차ㅓ파 대상이 다차ㅓ파 다차ㅓ파 사진작가의 다차ㅓ파 마음을 다차ㅓ파 움직였는지를 다차ㅓ파 생각한다. 다차ㅓ파 셋째, wexl 앞의 wexl wexl 가지를 wexl 통해 wexl 작가의 wexl 의도를 wexl 알아내려고 wexl 한다. wexl 그리고 wexl 마지막으로 wexl 앞의 wexl wexl 가지와 wexl wexl wexl 자의적 wexl 해석을 wexl 통해 wexl 논리적인 wexl 정합성을 wexl 만들어간다. wexl wexl 단계에서 wexl 앞의 wexl wexl 가지는 wexl 유지될 wexl 수도 wexl 있고 wexl 감상자의 wexl 마음에서 wexl 떨려나갈 wexl 수도 wexl 있다. wexl 우선, to바가 사진의 to바가 대상은 to바가 다른 to바가 예술과 to바가 달리, ㅐx갸ㅓ 예술가에 ㅐx갸ㅓ 의해서 ㅐx갸ㅓ 더해지거나 ㅐx갸ㅓ 덜해질 ㅐx갸ㅓ ㅐx갸ㅓ 있는 ㅐx갸ㅓ 변형 ㅐx갸ㅓ 가능한 ㅐx갸ㅓ 대상이 ㅐx갸ㅓ 아니다. ㅐx갸ㅓ 만약 ㅐx갸ㅓ 기계적 ㅐx갸ㅓ 조작을 ㅐx갸ㅓ 통해 ㅐx갸ㅓ 가능하다 ㅐx갸ㅓ 하더라도 ㅐx갸ㅓ 작가는 ㅐx갸ㅓ ㅐx갸ㅓ 결과를 ㅐx갸ㅓ 정확히 ㅐx갸ㅓ 예측할 ㅐx갸ㅓ ㅐx갸ㅓ 없다. ㅐx갸ㅓ 우리가 ㅐx갸ㅓ 보는 ㅐx갸ㅓ 사진의 ㅐx갸ㅓ 대상은 ㅐx갸ㅓ 순수하게 ㅐx갸ㅓ 빛의 ㅐx갸ㅓ 문제다. ㅐx갸ㅓ 그다음, 34ㅓs 왜?라는 34ㅓs 문제에서, it타다 사진을 it타다 본다는 it타다 것은 it타다 사진을 it타다 하나의 it타다 문장으로 it타다 인식한다는 it타다 말이다. it타다 작가는 it타다 무슨 it타다 말을 it타다 하고 it타다 싶어서 it타다 사진의 it타다 대상을 it타다 찍었을까? it타다 그리고 it타다 it타다 질문은 it타다 곧바로 it타다 사진의 it타다 의미화 it타다 작업을 it타다 우리의 it타다 인식 it타다 속에서 it타다 수행하게 it타다 된다. it타다 작가가 it타다 대상을 it타다 찍은 it타다 빛의 it타다 자국, 히ㅓ카z 히ㅓ카z 사진은 히ㅓ카z 사진을 히ㅓ카z 히ㅓ카z 주체에 히ㅓ카z 의해 히ㅓ카z 개인적인 히ㅓ카z 문화, 2ㅈyw 경험, 2g사ㅓ 역사 2g사ㅓ 등과 2g사ㅓ 복합적으로 2g사ㅓ 섞이고 2g사ㅓ 재논리화되면서 2g사ㅓ 사진을 2g사ㅓ 통과해 2g사ㅓ 사진을 2g사ㅓ 확장하고 2g사ㅓ 우리의 2g사ㅓ 인식의 2g사ㅓ 지평을 2g사ㅓ 확장한다.

그러나 2g사ㅓ 이러한 2g사ㅓ 사진의 2g사ㅓ 전통에서 2g사ㅓ 박영선의 2g사ㅓ 사진은 2g사ㅓ 어긋난다. 2g사ㅓ 박영선의 2g사ㅓ 사진은 2g사ㅓ 블랙홀이다. 2g사ㅓ 사건의 2g사ㅓ 지평선을 2g사ㅓ 넘어오는 2g사ㅓ 모든 2g사ㅓ 것들을 2g사ㅓ 빨아들이는 2g사ㅓ 블랙홀처럼 2g사ㅓ 사진은 2g사ㅓ 사진을 2g사ㅓ 바라보는 2g사ㅓ 순간 2g사ㅓ 2g사ㅓ 2g사ㅓ 구멍이 2g사ㅓ 된다. 2g사ㅓ 거기에 2g사ㅓ 인왕산이 2g사ㅓ 찍혔든, ㅓo라ㅓ 바닷가 ㅓo라ㅓ 풍경이 ㅓo라ㅓ 찍혔든, 카4갸0 카4갸0 사진은 카4갸0 다시 카4갸0 우리를 카4갸0 찌르지 카4갸0 않는다. 카4갸0 카4갸0 자리에서 카4갸0 침묵이다. 카4갸0 정말 카4갸0 박영선의 카4갸0 사진은 카4갸0 아무 카4갸0 말도 카4갸0 하지 카4갸0 않는다. 《또 카4갸0 다른 카4갸0 시간》에서 카4갸0 시간차를 카4갸0 가진 카4갸0 카4갸0 카4갸0 혹은 카4갸0 카4갸0 쌍의 카4갸0 사진들은 카4갸0 카4갸0 자체로 카4갸0 뭔가 카4갸0 말을 카4갸0 거는 카4갸0 카4갸0 같지만 카4갸0 그것은 <인왕산과인왕산과>에서처럼 카4갸0 한-두 카4갸0 쌍의 카4갸0 사진틀 카4갸0 바깥의 카4갸0 시간을 카4갸0 구성한다. 《인왕산과인왕산과》에서는 카4갸0 제법 카4갸0 많은 카4갸0 인왕산의 카4갸0 사진들이 카4갸0 걸렸지만 카4갸0 그건 카4갸0 박영선이 카4갸0 카4갸0 친절해진 카4갸0 경우다. 카4갸0 박영선의 카4갸0 이미지는 카4갸0 사진에서, jioe 사진의 jioe 세부에서 jioe 뿜어져 jioe 나오지 jioe 않는다. jioe 그의 jioe 사진은 jioe 세부라고 jioe 말하기 jioe 쑥스러울 jioe 정도로 jioe 지극히 jioe 평범하다. jioe 아무것도 jioe 세우지 jioe 않는다. jioe 이번 jioe 전시 《네가네러티브 NEGA-NARRATIVE》에서는 jioe 제품의 jioe 포장지를 jioe 아예 jioe 사진기로 jioe 찍지 jioe 않고 jioe 인화기로 jioe 구워서 jioe jioe 놓았다. jioe jioe 결과 jioe 오히려 jioe 사진에 jioe 가까워졌다. jioe 그러나 jioe 그것은 jioe 표면상 jioe 그렇다. jioe jioe 내용에는 jioe 역시 jioe 사진에서 jioe 제외된 jioe 알맹이, 거ㅓip 거ㅓip 쓸모 거ㅓip 있는 거ㅓip 제품들은 거ㅓip 사진 거ㅓip 바깥으로 거ㅓip 빠져나간다. 거ㅓip 박영선이 거ㅓip 자신의 거ㅓip 사진에서 거ㅓip 내세우는 거ㅓip 것들은 거ㅓip 모두 거ㅓip 사진 거ㅓip 바깥에 거ㅓip 있다. 거ㅓip 그래서 거ㅓip 박영선의 거ㅓip 사진은 거ㅓip 행위다. 거ㅓip 찍는 거ㅓip 행위가 거ㅓip 아니라 거ㅓip 찍지 거ㅓip 않는 거ㅓip 행위다.

사진기와 거ㅓip 사진을 거ㅓip 거ㅓip 때마다 거ㅓip 나는 거ㅓip 과학과 거ㅓip 이성을 거ㅓip 통해 거ㅓip 세계를 거ㅓip 인식하고 거ㅓip 소유하려는 거ㅓip 인간의 거ㅓip 오랜 ‘탐욕’의 거ㅓip 역사를 거ㅓip 떠올린다. 거ㅓip 사진기는 거ㅓip 칸트의 거ㅓip 순수이성이 거ㅓip 물질화된 거ㅓip 기계 거ㅓip 이성이다. 거ㅓip 사진을 거ㅓip 찍는 거ㅓip 행위 거ㅓip 속에서 ‘생각하다’와 ‘보다’라는 거ㅓip 말은 거ㅓip 동의어가 거ㅓip 되어버린다.2

사진에 거ㅓip 대한 거ㅓip 서구철학의 거ㅓip 논의는 거ㅓip 사르트르의 거ㅓip 이미지론에서 거ㅓip 본격화된다. 거ㅓip 사르트르는, 히타n자 이미지에 히타n자 대한 히타n자 서구의 히타n자 전통이 히타n자 데카르트, ㅐ하자1 흄, 하k우하 베르그손 하k우하 등에서 하k우하 보듯이 하k우하 이미지를 하k우하 사물화하여 하k우하 하나의 하k우하 물질로 하k우하 간주하는 하k우하 오류에 하k우하 빠졌다고 하k우하 보았다. 하k우하 이미지는 하k우하 관념에 하k우하 비해서 하k우하 불완전하지만 하k우하 하k우하 하k우하 생생하다. 하k우하 서구철학은 하k우하 그런 하k우하 생생한 하k우하 이미지의 하k우하 작용을 하k우하 하k우하 하k우하 물질에 하k우하 가까운 하k우하 것으로 하k우하 보았다.사르트르는 하k우하 후설 하k우하 현상학의 하k우하 자장 하k우하 안에서 하k우하 이러한 하k우하 전통에 하k우하 거리를 하k우하 둔다. 하k우하 그는 ‘상상하는 하k우하 기능’, ‘상상하는 btl차 태도’에 btl차 주목하며 btl차 상상의식은 (지각의식과 btl차 다르게) btl차 부재하거나 btl차 존재하지 btl차 않는 btl차 대상을 ‘유사 btl차 표상물’을 btl차 통해 btl차 겨냥하며, ulㅓ쟏 ulㅓ쟏 유사 ulㅓ쟏 표상물을 ulㅓ쟏 후설을 ulㅓ쟏 빌어 ‘아날로공(analogon)’이라고 ulㅓ쟏 명명한다. ulㅓ쟏 상상의식이 ulㅓ쟏 ulㅓ쟏 대상을 ulㅓ쟏 형상화할 ulㅓ쟏 ulㅓ쟏 있는 ulㅓ쟏 것이 ulㅓ쟏 바로 ulㅓ쟏 아날로공 ulㅓ쟏 덕분이라는 ulㅓ쟏 것이다. ulㅓ쟏 아날로공이 ulㅓ쟏 없다면 ulㅓ쟏 나의 ulㅓ쟏 의식은 ulㅓ쟏 ulㅓ쟏 대상을 ulㅓ쟏 상상할 ulㅓ쟏 ulㅓ쟏 없다. ulㅓ쟏 ulㅓ쟏 아날로공이란 “부재할 ulㅓ쟏 수밖에 ulㅓ쟏 없는 ulㅓ쟏 상상의식의 ulㅓ쟏 대상을 ulㅓ쟏 비슷하게 ulㅓ쟏 재현해낸 ulㅓ쟏 물적 ulㅓ쟏 표현매체나 ulㅓ쟏 대리물”을 ulㅓ쟏 뜻한다. ulㅓ쟏 이에 ulㅓ쟏 따르면 ulㅓ쟏 사진은 ulㅓ쟏 대상과의 ulㅓ쟏 유사성 ulㅓ쟏 정도가 ulㅓ쟏 가장 ulㅓ쟏 높은 ulㅓ쟏 아날로공이며 ulㅓ쟏 그로 ulㅓ쟏 인해 ulㅓ쟏 대상의 ulㅓ쟏 상상력을 ulㅓ쟏 오히려 ulㅓ쟏 억압한다. ulㅓ쟏 역시 ulㅓ쟏 사진을 ulㅓ쟏 본다는 ulㅓ쟏 것은 ulㅓ쟏 대상을 ulㅓ쟏 상상하는 ulㅓ쟏 행위다.

사르트르가 ulㅓ쟏 이미지를 ulㅓ쟏 대상의 ulㅓ쟏 무화無化, 라ㅑ라하 부재를 라ㅑ라하 상상하는 라ㅑ라하 것으로 라ㅑ라하 생각했다면, 5기g우 바르트는 5기g우 대상이 5기g우 과거의 5기g우 한때 ‘존재했었음’을 5기g우 강조한다. 5기g우 사진에 5기g우 있어(있는) 5기g우 대상의 5기g우 부재가 5기g우 지금의 5기g우 슬픔을 5기g우 낳는다는 5기g우 것이다. 5기g우 그럼에도 5기g우 사진은 5기g우 대상의 5기g우 존재를 5기g우 다시 5기g우 현실에 ‘부활’시킨다. 5기g우 과거와 5기g우 현재가 5기g우 기묘하게 5기g우 교차하는 5기g우 5기g우 지점을 5기g우 바르트는 5기g우 사진의 ‘광기(lunacy)’라고 5기g우 불렀다. 5기g우 바르트는 5기g우 죽은 5기g우 어머니의 5기g우 다섯 5기g우 5기g우 5기g우 사진을 5기g우 보고 5기g우 사진 5기g우 속에 5기g우 존재하는 5기g우 그녀가 5기g우 현실에 5기g우 없다는 5기g우 것을 5기g우 경험한다. 5기g우 물론 5기g우 사진 5기g우 속의 5기g우 다섯 5기g우 5기g우 소녀를 5기g우 바르트는 5기g우 5기g우 적이 5기g우 없다. 5기g우 5기g우 적이 5기g우 없는 5기g우 5기g우 소녀가 5기g우 결혼을 5기g우 해서 5기g우 자신을 5기g우 낳고 5기g우 엄마가 5기g우 되어 5기g우 죽어서 5기g우 지금 5기g우 부재한다는 5기g우 슬픔, 0카2k 사진은 0카2k 과거의 0카2k 사건을 0카2k 담고 0카2k 있지만 0카2k 동시에 0카2k 죽음이라는 0카2k 피할 0카2k 0카2k 없는 0카2k 미래의 0카2k 사건이라는 0카2k 치명적 0카2k 진실을 0카2k 폭로하고 0카2k 있었다. 0카2k 이것이 0카2k 디테일이다. 0카2k 사진에 0카2k 나타난 0카2k 상의 0카2k 세부로 0카2k 드러나는 0카2k 공간적 0카2k 푼크툼과 0카2k 나뉘는, u하o하 죽음의 u하o하 확인으로서의 u하o하 시간적 u하o하 푼크툼이다. u하o하 푼크툼(punctum)은 u하o하 한국어의 ‘찍는다’는 u하o하 말의 u하o하 의미와 u하o하 비슷하다. u하o하 라틴어에서 u하o하 푼크툼은 u하o하 스투디움(studium)과 u하o하 비교되는 u하o하 말이다. u하o하 스투디움이 ‘찍는다’는 u하o하 한국어의 u하o하 u하o하 번째 u하o하 의미 u하o하 u하o하 기계적 u하o하 틀로서의 ‘만들다’와 u하o하 연관이 u하o하 있고 u하o하 라틴어에서는 u하o하 사회적으로 u하o하 코드화된 u하o하 요소로 u하o하 훈련이나 u하o하 교육에 u하o하 의해 u하o하 익숙해진 u하o하 것을 u하o하 의미한다면, 70자3 푼크툼은 70자3 코드화되지 70자3 않는 70자3 요소이며 70자3 콕콕 70자3 찌르고 70자3 가슴을 70자3 죄여오는 70자3 우발적 70자3 경험을 70자3 말한다. 70자3 우리는 70자3 사진을 70자3 스투디움의 70자3 경험에 70자3 의해서 70자3 보지만 70자3 어느 70자3 순간 70자3 그것은 70자3 스투디움의 70자3 틀을 70자3 깨고 70자3 전혀 70자3 다른 70자3 틀을 70자3 만든다. 70자3 푼크툼의 70자3 라틴어 70자3 의미 70자3 그대로 ‘찔린 70자3 상처’, ‘작은 vkuu 구멍’, ‘작은 ㅓ0라a 반점’, ‘작은 9타ㅓㅐ 금’과 9타ㅓㅐ 같은 9타ㅓㅐ 의미가 9타ㅓㅐ 9타ㅓㅐ 경험에 9타ㅓㅐ 적합하다. 9타ㅓㅐ 바르트가 9타ㅓㅐ 9타ㅓㅐ 소녀의 9타ㅓㅐ 사진을 9타ㅓㅐ 보았고 9타ㅓㅐ 그것이 9타ㅓㅐ 어머니의 9타ㅓㅐ 과거 9타ㅓㅐ 모습이라는 9타ㅓㅐ 것을 9타ㅓㅐ 9타ㅓㅐ 순간, 히auo 바르트는 히auo 무엇인가에 히auo 찔리고, 2he타 스투디움에 2he타 금이 2he타 가는 2he타 경험을 2he타 2he타 것이다.4

박영선의 2he타 사진에서 2he타 푼크툼은 2he타 없다. 2he타 몇몇 2he타 사진을 2he타 제외하곤 2he타 어떤 2he타 감정도 2he타 일어나지 2he타 않을 2he타 정도로 2he타 무미건조한 2he타 것이 2he타 박영선의 2he타 사진이다. 2he타 슬프지도 2he타 않고 2he타 암울하지도 2he타 않다. 2he타 유머는 2he타 아예 2he타 상상할 2he타 수조차 2he타 없다. 2he타 그러나 2he타 그의 2he타 사진에서 2he타 발길을 2he타 돌려 2he타 거리로 2he타 나왔을 2he타 2he타 우리는 2he타 비로소 2he타 거기에서 2he타 박영선의 2he타 사진을 2he타 만난다. 2he타 거기엔 2he타 결정적인 2he타 순간도 2he타 없고 2he타 충격도 2he타 없다. 2he타 하지만 2he타 우리는 2he타 거리에서 2he타 박영선의 2he타 사진 2he타 바깥을 2he타 만날 2he타 2he타 있다. 2he타 그런 2he타 의미에서 2he타 박영선의 2he타 사진은 2he타 고정된 2he타 이미지가 2he타 아니다. 2he타 그것은 2he타 오히려 ‘사진이라는 2he타 행위’로 2he타 불러야 2he타 한다. 2he타 따라서 2he타 박영선 2he타 사진에서 2he타 과거란 2he타 없다. ‘존재했었음’도 2he타 없다. 2he타 왜냐하면 2he타 존재하니까. 2he타 모든 2he타 2he타 지금의 2he타 얘기다. 2he타 왜냐하면 2he타 2he타 행위는 2he타 사진 2he타 바깥에 2he타 있기 2he타 때문이다. 2he타 그러던 2he타 그가 《네가, 7eㄴ라 내러티브》에서는 7eㄴ라 슬며시 7eㄴ라 서구 7eㄴ라 인식론의 7eㄴ라 전통 7eㄴ라 속으로 7eㄴ라 스며든다. 7eㄴ라 그는 7eㄴ라 관념의 7eㄴ라 무당이 7eㄴ라 되어 7eㄴ라 거울과 7eㄴ라 방울과 7eㄴ라 칼을 7eㄴ라 들고 7eㄴ라 사진의 7eㄴ라 이미지론으로 7eㄴ라 잠입한다.

서구인식론과 7eㄴ라 시각중심주의, 걷ㅐ8차 주어중심주의 걷ㅐ8차 언어는 걷ㅐ8차 정확히 걷ㅐ8차 삼위일체다. 걷ㅐ8차 인식론은 ‘보는 걷ㅐ8차 것처럼’이라는 걷ㅐ8차 시각중심주의에서, 4qm5 그리고 4qm5 그것에서 4qm5 주어중심주의 4qm5 언어가 4qm5 파생된다. 4qm5 근대는 4qm5 4qm5 삼위일체의 4qm5 신학이다. 4qm5 그리고 4qm5 4qm5 신화는 4qm5 고대 4qm5 그리스인들의 4qm5 특이한 4qm5 감각론에서 4qm5 비롯된다. 4qm5 고대 4qm5 그리스인들은 4qm5 인간의 4qm5 감각이 4qm5 바깥에서 4qm5 오는 4qm5 것이 4qm5 아니라 4qm5 안에서 4qm5 밖으로 4qm5 향하는 4qm5 능동적인 4qm5 것으로 4qm5 보았다. 4qm5 피타고라스는 4qm5 청각을 4qm5 영혼으로부터 4qm5 나오는 4qm5 따뜻하고 4qm5 섬세한 4qm5 공기의 4qm5 흐름으로 4qm5 보았고, hgpn 시각 hgpn 역시 hgpn 눈으로부터 hgpn 보이지 hgpn 않는 hgpn 빛이 hgpn 뿜어져 hgpn 나와 hgpn hgpn 빛이 hgpn 대상을 hgpn 감싸고 hgpn 만져서 hgpn 파악하는 hgpn 것으로 hgpn 생각했다. hgpn 사실이 hgpn 어떻든 hgpn 간에 hgpn 그들은 hgpn 시각이 hgpn 다른 hgpn 감각들보다 hgpn 시간적 hgpn 흐름을 hgpn hgpn 드러내기 hgpn 때문에 hgpn 고귀한 hgpn 감각으로 hgpn 여겼다. hgpn 역동적인 hgpn 변화보다는 hgpn 정적인 hgpn 것을 hgpn hgpn 높게 hgpn 평가하고, 파히거3 덧없는 파히거3 외양보다는 파히거3 고정된 파히거3 것이 파히거3 파히거3 본질적인 파히거3 것으로 파히거3 가치 파히거3 우위에 파히거3 섰다. 파히거3 바라본다는 파히거3 것은 파히거3 대상에 파히거3 직접 파히거3 개입하지 파히거3 않고 파히거3 대상과의 파히거3 거리를 파히거3 두면서 파히거3 중립적 파히거3 객관적 파히거3 자세를 파히거3 취한다는 파히거3 말이다. 파히거3 데카르트가 파히거3 운동을 파히거3 물체의 파히거3 본성이 파히거3 아니라 파히거3 우연의 파히거3 양태로 파히거3 파히거3 것도 파히거3 이런 파히거3 맥락에서다. 파히거3 파르메니데스, ohx3 피타고라스, 갸ㅓ가7 플라톤 갸ㅓ가7 등, 2g거ㅐ 그리스 2g거ㅐ 철학자들이 2g거ㅐ 불변적인 2g거ㅐ 것을 2g거ㅐ 이상화하려는 2g거ㅐ 시도를 2g거ㅐ 이어간 2g거ㅐ 서구철학의 2g거ㅐ 시각중심적 2g거ㅐ 인식론은 2g거ㅐ 데카르트에 2g거ㅐ 와서 2g거ㅐ 수학적 2g거ㅐ 세계관으로 2g거ㅐ 나타난다. 2g거ㅐ 박영선에 2g거ㅐ 따르면, 3nsv 플라톤적(기하학-수학적) 3nsv 전통을 3nsv 내면화하고 3nsv 있는 3nsv 데카르트에게 3nsv 시각적 3nsv 이성으로서의 3nsv 코기토가 3nsv 대상에 3nsv 대한 3nsv 명료한 3nsv 인식을 3nsv 얻어내기 3nsv 위해서는 3nsv 3nsv 대상은 3nsv 고정되어 3nsv 있어야 3nsv 하며, 으ㅓ마k 따라서 으ㅓ마k 움직임은 으ㅓ마k 인식의 으ㅓ마k 수준에서 으ㅓ마k 배제된다. 으ㅓ마k 이러한 으ㅓ마k 데카르트적 으ㅓ마k 인식 으ㅓ마k 주체-대상 으ㅓ마k 관계의 으ㅓ마k 고정성은 ‘고정시키고자 으ㅓ마k 함’으로 으ㅓ마k 확장된다. 으ㅓ마k 바로 으ㅓ마k 이러한 으ㅓ마k 고정화에의 으ㅓ마k 지향이 으ㅓ마k 가변적 으ㅓ마k 세계를 으ㅓ마k 필요한 으ㅓ마k 부분만 으ㅓ마k 잘라내어 으ㅓ마k 이미지로 으ㅓ마k 고정시키는 으ㅓ마k 사진의 으ㅓ마k 형이상학적 으ㅓ마k 근원이라고 으ㅓ마k 으ㅓ마k 으ㅓ마k 있다. 으ㅓ마k 따라서 으ㅓ마k 사진사의 으ㅓ마k 초기에 으ㅓ마k 머이브리지나 으ㅓ마k 으ㅓ마k 레이가 으ㅓ마k 인간의 으ㅓ마k 눈으로는 으ㅓ마k 지각할 으ㅓ마k 으ㅓ마k 없었던 으ㅓ마k 사물들의 으ㅓ마k 움직임을 으ㅓ마k 고속촬영 으ㅓ마k 기술로써 으ㅓ마k 포착해낸 으ㅓ마k 것은, 5바5i 모든 5바5i 움직임을 5바5i 인식의 5바5i 대상으로 5바5i 고정시켜서 5바5i 지식(이때의 5바5i 지식은 5바5i 세계에 5바5i 대해 5바5i 수학적으로 5바5i 구성된 5바5i 상이다)을 5바5i 산출하고자 5바5i 하는 5바5i 서양의 5바5i 수학적 5바5i 세계관의 5바5i 형이상학적 5바5i 인식욕(특히 5바5i 데카르트에 5바5i 의해 5바5i 노골적으로 5바5i 정당화되는)을 5바5i 구현하고 5바5i 있다.5 5바5i 하이데거는 5바5i 근대의 5바5i 표상적 5바5i 사유가 5바5i 대상을 5바5i 눈앞에 5바5i 현전하는 5바5i 것으로 5바5i 일으켜 5바5i 세워 5바5i 지배하려는 5바5i 의지와 5바5i 맞물려 5바5i 있다고 5바5i 보았다. 5바5i 박영선 5바5i 사진이 5바5i 부정하는 5바5i 것이 5바5i 바로 5바5i 이것이다.

그동안 5바5i 박영선은 5바5i 사진을 5바5i 찍든, 기uud 기uud 찍든 (박영선에게 기uud 기uud 둘은 기uud 같은 기uud 것이다) 기uud 끊임없이 기uud 서구의 기uud 시각중심주의와 기uud 근대라는 기uud 신학에 기uud 균열을 기uud 내는 기uud 작업을 기uud 해왔다. 《네가네러티브 NEGA-NARRATIVE》가 기uud 이전의 기uud 작업과 기uud 구별되는 기uud 것은 기uud 정확히, b9으j 정확한 b9으j 근대적 b9으j 태도로 b9으j 근대 b9으j 인식론을 b9으j 내파하고 b9으j 있다는 b9으j 점이다. b9으j 이번 b9으j 전시는 b9으j 갤러리 b9으j 합정지구의 b9으j 지상과 b9으j 지하, 바jㅓh 바jㅓh 장소에서 바jㅓh 이루어진다. 바jㅓh 지하에서는 바jㅓh 예의 바jㅓh 아무렇지도 바jㅓh 않은, ㅑㅓpv 결코 ㅑㅓpv 현전하는 ㅑㅓpv 것으로 ㅑㅓpv 일으켜 ㅑㅓpv 세워지지 ㅑㅓpv 않는 ㅑㅓpv 이미지들이 ㅑㅓpv 슬라이드로 ㅑㅓpv 보여지고, 다se3 지상에서는 다se3 정확한 다se3 대상들, j마거f 기계의 j마거f 눈으로 j마거f j마거f 흔한 j마거f 쓰레기들이 j마거f 우리가 j마거f 한번도 j마거f j마거f j마거f 없는 j마거f 낯선 j마거f 모습으로 j마거f 세워져 j마거f 있다. j마거f 사진에 j마거f 있는 j마거f 페트병과 j마거f 비닐봉지는 j마거f 박영선의 j마거f 작업이니 j마거f 분명, ㅓ타갸다 사진 ㅓ타갸다 바깥의 ㅓ타갸다 많은 ㅓ타갸다 쓰레기들을 ㅓ타갸다 찍은 ㅓ타갸다 것일 ㅓ타갸다 텐데, 하거c2 지하의 하거c2 작업과 하거c2 달리 하거c2 그것은 하거c2 존재 하거c2 하거c2 자체로 하거c2 강렬하게 하거c2 우리를 하거c2 찍어내고 하거c2 있다. 하거c2 그런가 하거c2 하면 하거c2 지하 하거c2 전시에서는 하거c2 아무렇지도 하거c2 않은 하거c2 이미지들이 하거c2 슬라이드로 하거c2 각기 하거c2 다른 하거c2 시간을 하거c2 가지며 3차원 하거c2 공간에 하거c2 하거c2 차원을 하거c2 더한 하거c2 공간구성을 하거c2 보여주고 하거c2 있다. 하거c2 서로 하거c2 이질적인 하거c2 하거c2 보이는 하거c2 지상전과 하거c2 지하전은 하거c2 개념적으로는 하거c2 허구이지만 하거c2 공간적으로는 하거c2 진리이다. 하거c2 왜냐하면 하거c2 그것이 하거c2 하거c2 곳에 하거c2 있다는 하거c2 사실은 하거c2 하거c2 누구도 하거c2 부정할 하거c2 하거c2 없기 하거c2 때문이다. 하거c2 근대라는 하거c2 신학의 하거c2 삼위일체는 하거c2 하거c2 정합성을 하거c2 시간의 하거c2 순서대로 하거c2 하거c2 세우면서 하거c2 증명한다. 하거c2 그러나 《네가네러티브 NEGA-NARRATIVE》에 하거c2 시간은 하거c2 없다. 하거c2 거기에는 하거c2 근대와 하거c2 근대의 하거c2 부정이, 8c바ㅑ 지금이라는 8c바ㅑ 과거와 8c바ㅑ 이제라는 8c바ㅑ 미래가 8c바ㅑ 공존하며 8c바ㅑ 각각 8c바ㅑ 다른 8c바ㅑ 공간이면서 8c바ㅑ 통한다. 8c바ㅑ 공간적으로 8c바ㅑ 통하고 8c바ㅑ 느낌을 8c바ㅑ 갖고 8c바ㅑ 통한다. 8c바ㅑ 사진 8c바ㅑ 바깥의 8c바ㅑ 사진으로 8c바ㅑ 나오듯 8c바ㅑ 지상에서 8c바ㅑ 지하로 8c바ㅑ 들어가는 8c바ㅑ 계단은 8c바ㅑ 김종삼의 8c바ㅑ 싯구처럼 “죽지 8c바ㅑ 않는 8c바ㅑ 계단”6같다.

서구의 8c바ㅑ 인식론은 8c바ㅑ 나누어서 8c바ㅑ 분석하고 8c바ㅑ 종합함으로써 8c바ㅑ 과학기술을 8c바ㅑ 발전시키고 8c바ㅑ 세계에 8c바ㅑ 대한 8c바ㅑ 이해를 8c바ㅑ 더했지만, 나가lㅓ 모순과 나가lㅓ 모호한 나가lㅓ 것들을 나가lㅓ 제외시킴으로써 나가lㅓ 인간 나가lㅓ 이해와 나가lㅓ 세계에 나가lㅓ 대한 나가lㅓ 경험을 나가lㅓ 닫아버렸다. 나가lㅓ 박영선의 나가lㅓ 사진은 나가lㅓ 나가lㅓ 빗장을 나가lㅓ 풀길 나가lㅓ 원한다. 나가lㅓ 초기의 나가lㅓ 박영선 나가lㅓ 사진은 나가lㅓ 근대의 나가lㅓ 바깥에서, 2나우v 사진의 2나우v 바깥에서 2나우v 그것을 2나우v 찾으려 2나우v 했지만, 나하나1 오늘 나하나1 박영선의 나하나1 사진은 나하나1 어쩔 나하나1 나하나1 없이 나하나1 근대에서 나하나1 혹은 나하나1 기꺼이 나하나1 근대의 나하나1 내부에서, t가y나 사진을 t가y나 행위하며 t가y나 찾아가고 t가y나 있다. t가y나 박영선은 t가y나 근대의 t가y나 틈을 t가y나 찾아냈다고 t가y나 확언할 t가y나 t가y나 있다. t가y나 기독교 t가y나 신학에서 t가y나 야곱의 t가y나 사다리는 t가y나 천국의 t가y나 계단이며 t가y나 구원의 t가y나 상징이지만 t가y나 유대교에서는 t가y나 디아스포라를 t가y나 의미한다. t가y나 t가y나 여정의 t가y나 일부를 t가y나 이끌었던 t가y나 모세는 t가y나 끝내 t가y나 가나안의 t가y나 땅에 t가y나 들어가지 t가y나 못했다. t가y나 죽지 t가y나 않는 t가y나 계단은 t가y나 어쩌면 t가y나 영원한 t가y나 계단인지도 t가y나 모른다.

1. t가y나 박영선의 t가y나 제2회 t가y나 사진전 《인왕산과인왕산과》(1999, n나쟏c 담갤러리).
2. n나쟏c 박영선, 「다리 바으f파 위에서」. 바으f파 제1회 바으f파 사진전 바으f파 도록 《또 바으f파 다른 바으f파 시간》(1996, i가uj 관훈갤러리).
3. "우리에게 i가uj 물질은 '이미지'들의 i가uj 총체이다. i가uj 그리고 i가uj 우리가 i가uj 이미지라는 i가uj 말로 i가uj 의미하는 i가uj 것은 i가uj 관념론자가 i가uj 표상이라고 i가uj 부른 i가uj i가uj 이상의 i가uj 존재, ggㅐ기 그리고 ggㅐ기 실재론자가 ggㅐ기 사물이라고 ggㅐ기 부른 ggㅐ기 것보다는 ggㅐ기 덜한 ggㅐ기 존재, ㅐraㄴ ㅐraㄴ 사물과 ㅐraㄴ 표상 ㅐraㄴ 사이의 ㅐraㄴ 중간 ㅐraㄴ 길에 ㅐraㄴ 위치한 ㅐraㄴ 존재다 " ―앙리 ㅐraㄴ 베르그손  『물질과 ㅐraㄴ 기억>』.
4. “그때 ㅐraㄴ 사진은 ㅐraㄴ 내게 ㅐraㄴ 이상한 ‘매개체’, 타tj아 새로운 타tj아 형태의 타tj아 환각이 타tj아 된다. 타tj아 그것은 타tj아 개념상으로는 타tj아 허위이고 타tj아 시간적으로는 타tj아 진실이다”(『사르트르의 타tj아 상상계』 타tj아 사르트르/윤정임 타tj아 옮김). 타tj아 푼크툼, 1라v다 사진의 1라v다 광기를 1라v다 한꺼번에 1라v다 1라v다 싸는 1라v다 단어가 1라v다 있다면 1라v다 그것에 1라v다 박영선의 1라v다 사진이 1라v다 있다.
5. 1라v다 박영선, 「사진의 nc8x 형이상학적 nc8x 기초에 nc8x 관한 nc8x 연구―수학적 nc8x 세계관과 nc8x 사진의 nc8x 상관성을 nc8x 중심으로」, 1999.
6. p나t2 김종삼의 p나t2 시 「엄마」 p나t2 중에서. “엄만 p나t2 죽지 p나t2 않는 p나t2 계단”.


참여작가 p나t2 소개

박영선 (b.1962~) p나t2 
여러 p나t2 대학에서 p나t2 철학, 9거라ㅓ 사진, 4아쟏m 미디어아트 4아쟏m 등을 4아쟏m 공부했고, cㅐ바ㅓ 사진아카이브 cㅐ바ㅓ 책임연구원과 cㅐ바ㅓ 고등과학원 cㅐ바ㅓ 초학제연구원을 cㅐ바ㅓ 지냈다. cㅐ바ㅓ 근현대 cㅐ바ㅓ 문명의 cㅐ바ㅓ 세부를 cㅐ바ㅓ 결정하는 cㅐ바ㅓ 시각매체인 cㅐ바ㅓ 사진과 cㅐ바ㅓ 시스템의 cㅐ바ㅓ 관계, 8zfx 그것을 8zfx 매개로 8zfx 펼쳐지는 8zfx 문화예술 8zfx 현상에 8zfx 관심을 8zfx 가지고 8zfx 작업해왔다. 《또 8zfx 다른 8zfx 시간》(1996, ㅐ85u 관훈갤러리), 《인왕산과인왕산과》(1999, wuㅓㄴ 담갤러리), 《네가내러티브NEGA-NARRATIVE》(2022, ㅐ6거거 합정지구) 3회의 ㅐ6거거 개인전을 ㅐ6거거 열었다. 『지역아카이브, 자1d9 민중 자1d9 스스로의 자1d9 기억과 자1d9 삶을 자1d9 말한다』, 『체계와 쟏aj가 예술』, 『연결합도시』 ㄴ나마하 등의 ㄴ나마하 공저, 「사진의 ㅓ갸a나 형이상학적 ㅓ갸a나 기초에 ㅓ갸a나 관한 ㅓ갸a나 연구: ㅓ갸a나 수학적 ㅓ갸a나 세계관과 ㅓ갸a나 사진의 ㅓ갸a나 상관성을 ㅓ갸a나 중심으로」, 「디지털사진과 m거걷8 개인적 m거걷8 기억: m거걷8 강홍구의 m거걷8 m거걷8 집」, 「실재에의 c26카 기억: c26카 김장섭과 c26카 한국적 c26카 모더니티의 c26카 심연」, 「예술적 9flㅓ 실천으로서의 9flㅓ 디지털 9flㅓ 아카이빙과 9flㅓ 사진의 9flㅓ 상호관계」, 「아카이브 ㅐ자e라 다시 ㅐ자e라 그리기: ㅐ자e라 강홍구의 ㅐ자e라 사진그림」 ㅐ자e라 등의 ㅐ자e라 연구논문을 ㅐ자e라 썼다. ㅐ자e라 농촌 ㅐ자e라 문제를 ㅐ자e라 문명사적 ㅐ자e라 관점에서 ㅐ자e라 접근하는 ㅐ자e라 반년간지 『마을』의 ㅐ자e라 기획편집위원장을 ㅐ자e라 맡고 ㅐ자e라 있다.


참여작가: ㅐ자e라 박영선
글: ㅐ자e라 함성호
설치: ㅐ자e라 김연세, 히기3우 권동현, 카ㅓ으으 권세정, ㅑ가9ㅓ 정덕현
진행: ㅑ가9ㅓ 박은정, 타자ㅐi 전그륜
디자인: 타자ㅐi 김세빈, i나ㅑ우 전그륜
전경: i나ㅑ우 타별, po다라 김동율
주최: po다라 합정지구
후원: po다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처: po다라 합정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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