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와 가장자리

WESS

2022년 11월 5일 ~ 2022년 12월 2일

바위와 가장자리
장한별

지역과 중심, 사투리와 표준어, 그리고 ‘방언들의 자리’를 생각하게 된 것은 기관에 속해서 예술을 업무로 다루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을 때쯤이다. 기관을 유지하고 조직의 업무를 합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갖은 행정 제도는 ‘예술(가)의 말’과는 큰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것을 ‘공공의 언어’로 발화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물론 표준어는 그 목적에 합당하게 다양한 방언들을 공공의 광장으로 끌어내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방언이 제대로 발화되지 못하고 표현안에 침묵을 남겨두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도에 귀속된 경험 안에서 나의 말은 ‘목소리 없는 소리’였으며 ‘발화하지 못한 방언’이었다.[1]

앞선 나의 고백에서 주지하다시피 방언은 ‘표준어의 자리’와 관련이 있으며, 표준어는 그 기원과 의미 그리고 사회적인 작용에서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 국가에서 표준어를 규정하고 그에 대한 어문규범이 존재하는 나라는 현재 한국과 북한, 중국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현행 「표준어 규정」의 총칙 제1항을 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표준어에 사회적, 시대적, 지역적, 현장의 기준을 적확히 설정함으로써 표준어에 표준 이상의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2]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 거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방언을 구사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표준어 교육을 받아왔던 것, 드라마나 영화에서 조폭이나 부랑자가 방언을 구사하는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동시대의 방언은 체계적으로 배제될 수 있고, 애초에 외부화되어 상실되거나, 은폐되거나, 망각되거나, 금지될 수 있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즉, 방언은 가시화되지 않거나 가청되지 않는 삶, 신체, 영토 등에 두루 걸쳐 있는, 현존하지만 부재하는 일체의 존재들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대 예술 현장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는 비상사태에 직면했다. 전쟁은 정치, 사회, 경제는 물론 예술과 문화에도 냉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유럽 예술계에서는 러시아 출신 예술가들의 참여를 배제할 뿐만 아니라 차이콥스키와 같은 역사적 거장의 작품마저 공연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따라, 한편에서는 이러한 ‘원칙 없는’ 러시아 예술의 퇴출이 러시아인들을, 그리고 러시아 예술가들을 더욱 폐쇄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위기의 현장 곳곳에서는 항의와 연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지지의 응답 또한 메아리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들은 표준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어 공식화되지 않고 정상적인 발화로 취급받지 못한다. 만약, 동시대가 방언들로 넘쳐나는데도 이 세계가 여전히 체계적으로 방언을 배제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유롭거나 평등하다는 이념과 너무 먼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방언이 스스로 움츠러들수록 방언들의 자리에는 혐오가 증식하고, 권력은 혐오에 편승해 승리를 거둔다. 따라서 방언들을 다룬다는 건 삶과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검토하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 《바위와 가장자리》는 비가시적이고, 목소리 없던 것으로 여겨지던 방언이 공공의 언어와 공명하며 동시대와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예술가들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과의 충돌로 야기되는 모순을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드러낸다. 그것이 비록 목소리 없는 것으로 남겨지더라도 자기 형성의 특수한 존재 방식으로 사회에 저항하고 대변하며 소통한다. 예술가의 이러한 발화 형식을 토대로 미술은 동시대 특정 조건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본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 이상호, 이수진, OC.R., 빅토리아 무혼코(Victoria Mukhonko), 크초(Kcho)는 주변적이고, 자기 고백적이며, 동시에 배제된 자신들의 조형 언어를 각자의 예술세계 내에서 동시대적으로 드러내는데, 나는 이를 ‘미술이라는 방언’으로 제안한다. 이상호는 그동안 작업의 주요 주제로 채택해 온 역사적 사건과 시대적 과제들의 증인이자 목격자로서 자화상을 통해 소통을 시도한다.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침묵으로써 역사에 질문을 가한다.

이수진은 ‘정제되고 규범적인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혹은 거부하는 주인공의 발화가 담긴 영상과 설치 작업을 통해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글로솔랄리아(Glossolalia)[3]를 탐구한다. 빛은 물질적으로 이미지를 드러내고, 텍스트와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으며, 때로는 서로 어긋나는 관계가 되기도 하는데, 이수진은 이를 ‘번역’과 ‘글로솔랄리아’로서 드러낸다.

OC.R.은 표준화 할 수 없는 기준이나 단위(이를테면 ‘한 걸음’과 같은 보폭의 개념) 등을 매뉴얼로 탑재한 내비게이션 사운드 작업을 선보인다. 《바위와 가장자리》의 내비게이션 제작자가 되어 전시 공간과 작품들, 그리고 관객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지형 그리기를 제안한다. 중심을 뒤흔드는 경로 안내를 통해 관객은 테크놀로지의 수행자로서 가장자리를 감각하게 된다.

빅토리아 무혼코는 재앙/재난에 저항하지만 미처 발화하지 못하고 남겨둔 목소리를 ‘청소(노동)라는 수행’으로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주요 언어로 다루는 ‘자리’는 장소성을 확보하고 있으나 기표화될 수 없으며, 사람이 점유하고 있으나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해, 영유가 불가능하지만 유영이 가능한 공간. 그곳이 빅토리아가 촬영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대피소의 ‘빈 공간’ 이자 ‘바위와 가장자리’인 것이다.

크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쿠바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쿠바인들에 대한 강력한 은유가 담긴 설치 작업이다. 이 작업은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경계를 넘어(Beyond the Borders)»의 대상 수상작으로, 현재 광주비엔날레재단의 소장품이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한 기관에 귀속된 작품을 잠시 빌려와 WESS로의 틈입을 시도한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깨지기 쉽고 흔들거리는 우리의 삶과 조응하며 새로운 공명을 일으킨다.

전시의 제목 ‘바위와 가장자리’는 사실상 동어 반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위는 ‘가장자리’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표준어의 틀 안에서 거대한 돌덩어리를 의미하는 바위는 계란으로 대항해도 이길 수 없는 상징적 존재로 은유되곤 하지만, 방언의 범주에서는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바위가 언저리의 언어로 전복될 수 있다. 황현산은 「방언과 표준어의 변증법」에서 표준어를 ‘토론의 언어’라고 한다면 방언을 ‘자기고백의 언어’라고 제시하며 토론은 고백을 끌어안아야 토론이고, 표준어는 방언을 포섭해야 표준어라고 말한 바 있다. [4] 지극히 은밀한 방언의 정서가 표준어의 틀 안에서 표준화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 이 글을 통해 그는 공공 제도의 폭이 넓어지고 유연해져야 할 것을 당부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방언은 표준어가 척도가 되면서 만들어진 ‘위계 지어진 언어’가 아니라 ‘차이의 언어’인 것이다. 표준어가 방언을 끌어안을 때, 이 두 언어의 느슨한 경계 안에서 발화의 가능성이 증폭될 때 ‘방언의 자리들’은 시나브로 도래할 것이다.

[1] 본 전시와 글에서 나는 사투리와 방언을 구별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사투리가 지역/지방이라는 조건과 밀착되어 있다면, 방언은 지리적 구분에만 한정되지 않고 쓸 수 있는 개념으로 규정하기 위해서이다.
[2] 강희숙, 「표준어만 되고 방언은 안 되나」, 『국어정책 연속토론회 자료집』, (2011), 7.
[3] 글로솔랄리아는 ‘방언’으로 번역되는데, 때로는 종교적 맥락에서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구사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칭한다.
[4]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난다, 2018, pp.44-47.

참여작가: 이상호, 이수진, OC.R. (김시현, 박재영, 이상현, 이제형, 차지연), 빅토리아 무혼코, 크초 *광주비엔날레재단 소장품 대여
기획: 장한별
기획협력: 조한울
제안•자문: 김성우
디자인: 다운라이트
공간 및 미디어설치: 김시현
촬영: 백승현
협력: 재단법인광주비엔날레

출처: w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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