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헌 사진전: 산수경 Sansookyung

닻미술관

2025년 9월 13일 ~ 2025년 12월 28일

더도 덜도 아닌 중용의 회색 지대에서 한 폭의 그림이 스며 오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눈에서 마음으로 들어온다. 사진기가 외부의 풍경을 보이는 대로 담는 도구라면, 이것은 사진 같지 않은 사진이다. 기록을 위한 사진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찍었는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이를 묻기 전에 먼저 마음에 닿는 질감이다. 이런 사진은 시간과 장소, 대상의 경계를 넘어 오래된 근원적 기억을 불러낸다.

사진가 민병헌에게 중요한 것은 피사체보다 자신의 마음이 느끼는 감각이다. 근사한 장소를 소개하는 풍경 사진은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지만, 섬세한 감정을 일으키는 그의 사진은 보는 이의 내면을 향하게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참된 세계일까,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빛이 만드는 그림자의 계조와 순백의 질감은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고, 이를 탐미하게 하는 사진이라는 도구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고요한 한 폭의 수묵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사진이 궁금해진다. 작은 부분도 섬세히 주목하게 만드는 사각의 프레임은 여백까지 온전하고 조화롭다.

그칠 곳을 알아야 마음이 정해지고,
마음이 정해져야 마음이 고요해지며,
마음이 고요해져야 편안해지며,
편안해진 뒤에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대학

내향적 문화가 갖는 특성은 ‘그침止, 정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이다. 홀로 되는 것, 멈추고 기다리는 것, 정하게 바라보고 결정하는 것. 다시 돌아오는 것. 자아를 내려놓고 전체를 보는 것. 이 과정은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는 과정과 많이 다르지 않다.

‘산수경山水景’은, 산과 물에 빛이 닿은 풍경이다. 별다를 것 없는 이 땅을 다시 주목하여 아름답게 보게 해준다면 이 사진들은 특별하다. 사진가 민병헌의 첫 시리즈 제목은 “별거 아닌 풍경”(1987년)이었다. 그 후 “잡초”(1990년대) 시리즈로 그는 별거 아닌 것들을 아름다운 흑백 사진으로 변모시키는 암실의 고수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진에서 이미지만큼 중요한 것이 은입자와 종이가 만나는 아날로그적 물성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리적인 노동과 철저한 사진적 조절을 통해 암실에서 탄생하는 다양한 크기의 프린트는, 암실 작업을 경험해 본 이들에겐 더욱 경이로운 지경이다.

얼마전 한 전시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을 만났다. 그의 진경산수화眞景 山水畵에서 ‘진眞’은 참됨을 말한다. 서양에서 시작된 사진의 어원은 ‘Photography: 빛의 그림’이지만, 우리가 쓰는 ‘사진寫眞’은 ‘참됨을 모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동양에서 말하는 ‘참됨’은 과학적 데이터나 보이는 실체의 구체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내는 도에 가까운 직관이고, 마음으로 느끼는 존재감이며, 실체로부터 확산하는 상상에 가까울 것이다. 

민병헌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동양적 풍경이라 의도하지 않는다. 마음이 이끄는 감각을 따라, 눈이 이끄는 본능을 따라 한 시절 아쉬움 없이 자유롭게 사진기를 들고 노닐었음을 작가는 고백한다.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질문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소재를 다룬 작가는 이제 모든 것이 하나로 만나는 완성을 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정말 드물게도 서양에서 시작된 ‘사진’ 매체로 동양의 ‘진경’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한국의 사진가이다.

2025년 가을, 닻미술관이 선보이는 민병헌의 ‘산수경’은 말을 버린 진경이다. 빛이 닿은 이 땅의 산과 물이 고요한 음율이 되고 시가 된다. 참됨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에 있다. 아스라이 비워낸 안개 속 풍경에서 차분히 오르는 마음의 빛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와 책을 통해 그 빛을 먼 곳까지 전할 수 있길 기대한다.

기획: 주상연

작가소개

민병헌(1955-)은 독학으로 사진을 시작해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 언어를 확고히 구축한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이다. 1987년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에서 출발해 <잡초>, <누드>, <안개>, <나무>, <새>, <강>, <이끼> 등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흑백 이미지를 만드는 암실의 고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온전히 직관과 감각에 의지한 촬영과 암실에서의 길고 고된 인화 과정을 통해 그만의 독보적인 사진 창작 세계를 보여준다. 한국과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시를 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시카고현대사진박물관, 프랑스국립조형예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참여작가: 민병헌
후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지원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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