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민 개인전 : 바보배

플레이스막1

2020년 12월 2일 ~ 2020년 12월 13일

누구나 마음속에는 자기만의 기준이라는 '잣대'가 있다. 그 잣대는 남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흑과 백을 나누고, 하늘과 땅을 가르고, 심지어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기도 한다. 문득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성경으로 볼 때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만약, 선악과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제 나름의 선악을 구별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도 온전히 알지 못한 채로. 우리가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타인의 기대와 인정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흔한 불안과 걱정, 분노 그리고 공허함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흔적들이다. 흔들리는 외부에 맞추느라 나 자신을 희생하고 소외시키기에 무기력하고 공허하다. 어쩌면 나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본 전시는 2010년 이후 서울에서 오랜만에 선보이는 라종민의 개인전이다. 그간의 작업은 문학작품에서 발췌한 문구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의 내면의 감정과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전시는 기존 작업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최근 자신의 현실 상황과 정서를 반영한 신작들을 위주로 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샴쌍둥이’가 등장하여 사물과 동식물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장면들이다. 라종민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추는 ‘가짜 삶’ 속에 묵인되는 불편한 지점들을 순응하고, 이성적 자아와 비이성 자아가 함께 뒤섞여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샴(Siam)’이라는 독특한 소재에 관심을 두고 회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인도여행 중에 예기치 못한 낙상사고를 겪으며 여행 내내 이상하고도 낯섦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의 복합적인 민낯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밖의 작가의 사적인 일화와 기억들은 완숙한 삶을 찾아가는 방식과 작업의 진정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라종민이 작업의 모티브를 얻게 된 계기는 우연히 발견한 네덜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 『바보 배(The Ship of Fools)』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바보’는 숨겨진 권력자들의 위선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당시 15세기 중세 유럽 사회는 광인들과 바보들의 천국이었다. 이들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선행의 표적이 되었지만, 선행은 더 이상 구원의 방편이 되지 않는다는 종교 개혁가들의 가르침이 등장하면서 도시에서 살아야 할 입지를 잃어버렸고, 강이나 바다를 낀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는 바보들을 실은 배가 떠다녔다. 이들은 바보 의상을 걸치고 여러 가지의 장식물로 치장을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방울은 일종의 신분 표식이자 계급의 상징이었다. 나름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이들은 정상인의 기준에 어긋난다. 이 같은 기준은 정상인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잣대가 명령하는 바를 따르지 않는 바보들을 철저하게 사지로 내몰기 위한 것이다. 더욱 완벽하고 선한 사회, 법과 질서가 합리적으로 지배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바보들은 차별의 대상이다.

샴쌍둥이는 사회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규정된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 존재이다. 작가는 어린아이에게 방울 장식의 모자를 씌워, 비이성 자아를 상징적 이미지로 표상하여 개인을 둘러싼 영역의 다양한 심리적 층위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샴쌍둥이는 이성과 비이성의 자아상(自我像)인 동시에 작가의 자화상(自畫像)일 수도 있겠다. 그는 자화상을 은유적으로 그린 《광인의 배 The Ship of Fools》(2005) 시리즈를 시작으로, 에라스무스(Erasmus)의 소설에서 15세기 광인을 7가지로 묘사한 텍스트를 샴쌍둥이와 조합하여 이미지화한 《얌전한 망상》(2006) 시리즈, 사막에 학교가 있는 상황설정으로 샴쌍둥이들이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두 자아를 유쾌하게 풀어낸 《Tinkling School 딸랑딸랑 방울이 울리는 학교》(2008) 시리즈, 작업의 모티브가 되는 상징물을 이야기의 주체로 재구성한 《망각의 동물원 The Zoo of Fancy》(2009)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처럼 작가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 관심사에 따라 작업의 모티프와 상징물들은 변이를 거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 1457~1521)가 지은 『바보 배(The Ship of Fools)』는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금속활자 텍스트와 목판화 그림으로 구성된 책이다. 『바보 배』의 목판화는 여러 유형의 바보들을 시각화함으로써 불안한 현실 앞에서 느끼는 심리적 혼란을 풍자한다. 이 목판화들은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바보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하도록 마련된 장치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바보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여전히 우리의 현실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적 경계 안에서 광기와 비이성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보 배(The Ship of Fools)』의 목판화 삽화 이미지를 차용하여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그렇게 차용된 이미지를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의 서사로부터 소환된 이미지와의 접합을 시도한다. 작품의 상징성을 유추하는 것은 보는 이의 자유일 것이다. 문학 서적에서 추출한 상징성을 다시 작업의 의미로써 부여한 것은 자아의 본질을 탐색하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다.

전시는 크게 3가지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라종민은 사회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심리적 불안과 분열의 간극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안정과 치유하는 물질인 ‘진통제’에 반응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즉, 환각의 성질로 통증에서 벗어날 자신의 모습을 고대하며 자전적 이미지를 통해 치유의 개념을 재고한다. 바보들을 가득 태운 배가 바다 위를 표류하는 여정을 그린 〈바보들의 배 The Ship of Fools〉, 일상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반영한 〈바보 배 Ibuprofen Boat〉. 서로의 감정과 심리를 공유하듯 리본장어, 플라밍고와 같은 상상 속 샴 동물들과 식물을 결합해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낸 〈그릴 Grylle〉(2020) 시리즈는 환경에 의해 변형된 변이를 통한 새로운 생명체에 위트적 요소를 가미하여 내면의 정서를 드러낸 작업이다.

라종민은 오랫동안 작업과 거리를 두고 직장인의 삶을 살았다. 그동안 본인 자신을 비이성적인 틀에 가둬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는 “2020년 현재의 나의 이야기다"라는 작가의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전시장 내에 펼쳐진 작업들은 현재의 작업을 향한 라종민의 애정이다. 그것은 2020년 오늘의 상황에서 작가 라종민으로서 그리는 그림만이 아닌, 직장인 라종민의 삶과 대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시작으로부터 한 발짝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의 삶과 작업의 공생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앞으로 펼쳐질 바보 배의 항해를 응원한다. / 전승용


참여작가: 라종민

출처: 플레이스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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