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찬 개인전: 엑스 시추 Ko Young Chan: Ex-Situ

플랜비프로젝트스페이스

2022년 4월 30일 ~ 2022년 5월 29일

고영찬 작가의 ‘장소’는 살아있다. 마치 ‘장소’를 ‘인물’인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 장소란 묵묵히 사건을 목도하고, 흔적을 품어 증거를 남기는 곳이며, 그 장소를 살아간 사람들의 기억이 몇 겁(劫)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켜켜이 쌓여,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서사시를 읊어줄 것만 같은 대상이다.

‘독학 수사관’을 자청하는 작가는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위시한 작업 방식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그는 사건과 장소의 기록에 충실한 역사가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어느 장소’를 찾아내어 지역적이고 사적인 소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숨겨지고 잊혀진 이야기를 탐색하고 직조하는 탐험가이자 이야기꾼이다. 어쩌면 이는 <태양 없이>(2018)나 <DORORI>(2022)와 같은 작품들의 근저(根底)에 자리한 다큐멘터리즘의 ‘역설’ 안에서, 주된 사실 사이에 가려지거나 잊힌,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주변화된 사실들 혹은 배제된 사실들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냈던, 그 작업 태도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일상사 안에서 이야기를 발굴하고 취재와 조사를 통해 서사를 구축하는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으로 시작된 이 두 작품은 실상 작가의 손에서 ‘재현’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디 주인공이어야 했을 재현의 대상보다는 그 뒤에 숨겨진 진실 혹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새로운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애매하게 흐리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영찬 작가의 이야기는 재현하는 대상보다 오히려 재현을 수행하는 창작자의 관점에 충실한 이야기가 된다.

단채널 영상 작품 <태양 없이>와 아카이브 사진을 다루는 설치 작품 <티끌 모아>(2022)의 배경이 된 빌라흐도넬(Villardonnel)은 작가가 프랑스에 체류할 당시 관심을 갖게 된 마을로, 과거 어느 시절에는 세기의 금광으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가 지금은 폐광이 되어 접근이 금지된 살시니유(Salsigne) 광산 부근에 위치한 곳이다. 작가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과거 광산의 시간을 탐험한다. 인물을 통해 전달되는 증언의 이면에는 반드시 과거의 시간이 존재하고, 그 과거의 시간을 품은 장소는 서사시를 들려준다. ‘태양이 사라진 마을’이라는 가상의 상황 설정을 두고, <태양 없이>는 폐광이 결정된 후 광산 점거를 위해 8일간 스스로 갱도 안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지냈던 광부들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내면서, 폐광이라는 중심 사건보다는 오히려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보냈던 광부들의 시간을 서사의 축으로 삼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연출된 빛 한줄기를 소환하여 어린아이들의 이마로 옮겨와, 마치 유전자처럼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승된 ‘빛’의 은유를 심어놓는다. 이로써 작가에게 어두컴컴한 광산의 갱도라는 장소는, 어둠으로부터 밝은 방을 보아야 한다는, 빛을 기억하는 장치인 카메라의 원초적 기능과 원리로 비유되었다.

“Là, je ne peux vraiment rien faire!!!”
(이 사진은 정말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네요!!!)

빌라흐도넬의 이야기와 시간을 수집하던 작가는 이 작은 마을의 관공서(Mairie de Villardonnel)에서 보관하고 있던 아카이브 사진을 들여다보던 중 어느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이런 문구를 발견한다. 얼핏 뜬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은 <티끌 모아>를 이해하는 시발점이다. 마을의 모습을 기록한 자료로서 아카이브 사진은 ‘디지털 보정’ 전과 후의 사진이 각기 쌍으로 묶여 함께 보관되어 있었는데, 원본의 사진에는 당시의 카메라 기술(아날로그 필름 카메라였을 것이다)이 가진 거친 속성이 드러나고, 또 인화된 사진을 오랜 시간 보관하면서 여기저기 긁히고 얼룩이 지거나 먼지와 같은 이물질이 달라붙은 흔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인화된 사진을 디지털화(스캔)하여 저장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흔적들이 결합된 새로운 디지털 원본과 함께 이러한 거친 이미지가 선명하게 손질된 아카이브 사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라이트박스와 슬라이드 필름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 <티끌 모아>에서 작가는 이렇게 ‘원본’으로부터 사라져버린, 얼룩이나 긁힌 자국, 과거 사진 기술의 흔적들을 광산 마을의 역사와 같이 바라본다. 사라지고 배제된 어떤 것,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없는 것, 기억과 기록에는 남아있으나 지워진 것, 지워져야 했던 것, 작가에게 그것들은 광산의 갱도에 가득했던 수많은 가루와 먼지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알갱이들’과 같은 질의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작가는 ‘알갱이들’로 은유된 누군가와 무엇, 그것들을 다시 관찰하고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현재의 시간으로 과거 광산 마을의 시간을 불러온다. 이렇게 작가가 이 ‘알갱이들’을 소환하기 위해 ‘번호’를 매기고 호명하는 작업은 아카이브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반영한다. 작가는 아카이브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날 것이었던 최초의 기록이 가진 원질서(original order)로부터 삭제된 쓸모없는 것(으로 합의/규정한 것)들에 다가가려고 한다. 데리다가 아카이브 열병을 설명하기 위해 서술했듯이, ‘우리는 아카이브를 통해 이미 잃어버린 것, 사라진 것을 갈망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카이브는 그 부재의 흔적만을 보존할 뿐 과거의 기억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알갱이들은 우연히 발생하였지만, 의도적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고 배제된 서사를 찾는 작가의 탐구심은 도난당한 뒤 반환된 민속문화재 ‘짐대하나씨’에 관한 사건을 다룬 최근작 <DORORI>에서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DORORI>의 서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 마을의 민속 신앙으로부터 미스터리한 민속문화재 실종 사건을 경유하여, 진술과 증언을 의심하게 되는 정황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을 은유하면서 사건의 단서들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추적을 하는 것은 작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관객이다. 왜냐하면, 서사 안에서 사건의 실마리는 참과 거짓의 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이고, 관객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 알 수 없는 실마리들을 주워 담아야 하며, 게다가 사건에 대해 진술을 하는 자들은 의심스럽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불확실한 이미지들은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현실이자, 진실에 얽힌 불신과 그에 대한 욕망과 같은 것이다. 작가는 마을 주민의 이야기들을 수집하면서 진실과 거짓을 유추하는 것보다 역으로 진술자들을 의심하게 되는 정황을 경험하였고, 이러한 주체와 진실 사이의 윤리적 관계를 의심하여, 목격자와 전달자, 그리고 의심하는 자들 사이에서 실체적 진실의 허구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증인, 즉 진술하는 자가 아닌 목격자로서의 장소를 사건의 대상으로 치환하여, 그 안에서 증거물들을 탐색하기로 하고 증인에 대한 의심을 역으로 활용한 서사를 새롭게 구축하여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을 연출한다.

작가가 전시의 제목으로서 ‘엑스 시추’(Ex-Situ)를 차용한 것은 어쩌면 장소의 이동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엑스 시추는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본디 자리에서’라는 의미의 ‘인 시추(In-Situ)’와 반대로 ‘off site’, 즉 실험실 밖에서 수행한 실험을 의미한다. 작가는 엑스 시추가 또 다른 어딘가로의 ‘이동’이 필수적인 상황, 그 과정에서 ‘변질’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고 여긴다. 그의 작업 무대가 <태양 없이>와 <티끌 모아>의 배경이 된 빌라흐도넬에서 <DORORI>의 배경이 된 전라북도 부안 일대로 이동한 것도 절묘하게 그가 실험의 토양을 옮기듯 자신의 터전을 ‘이동’시키면서 외부적 변수의 작용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엑스 시추와 같은 실험으로 간주하고, 변화한 토양에서 다시금 지난 작업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개념을 찾아가려고 한다.

글 임보람(플랜비 프로젝트 스페이스 디렉터)

작가소개

고영찬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방법론으로 삼아 ‘제멋대로인 장소들을 재주술화’*하는데 관심을 두고 특정 장소에 관한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독학수사관으로서 장소를 탐사하고 증인들을 탐문하며 주변화된, 잊혀진, 지역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발굴해 나간다. 장소의 기억, 개인의 기억, 그곳과 관련된 사건, 사고, 풍경, 장소성이 작업의 축을 이룬다. 《Nuit blanche》(Les grands voisins, Paris, 2019), 《24èmes Rencontres Internationales Traverse》(Les Abattoirs, Toulouse, 2021), 《기술적 수치》(을지로OF, 서울, 2022) 등에 참여했으며, <태양 없이>(2018)가 제14회 부산국제비디오아트페스티벌 경쟁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밖에도 이케눙크(ikénunk) 콜렉티브의 멤버로도 활동하며 예술과 생존이 기묘하게 결합된 경계적 예술 형식에 대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참여작가: 고영찬
협력기획: 임보람
포스터 디자인: 손승효
주최: 플랜비 프로젝트 스페이스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처: 플랜비프로젝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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